사라진 '만원의 행복'…점심메뉴, 북창동 28곳 중 15곳 값 올렸다

곽재민 2024. 10. 10.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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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강남구청 구내식당 앞 식권 발매 키오스크 앞에 시민들이 줄을 서 있는 모습. 곽재민 기자

지난 8일 낮 12시20분 서울 강남구청 내 지하 1층 구내식당. 50여 개 테이블은 대부분 차 있었다. 구청 인근 회사에서 근무한다는 이모(43)씨는 “강남 물가가 상대적으로 비싸기는 하지만 3년 전 1만2000원이었던 순대국밥이 1만5000원이 됐다”며 “스벅(스타벅스)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사면 점심값으로 거의 2만원이 깨진다”고 말했다. 그는 “구청 구내식당은 한 끼에 6000원이라 1주일에 평균 2회 정도 이용한다. 커피는 회사에 비치된 인스턴트로 때울 때가 많다”고 덧붙였다. 구내식당 관계자는 “이곳을 찾는 직장인과 주민 등이 지난해보다 30% 정도 늘었다”고 귀띔했다.

점심값 1만원 시대, 런치플레이션(점심을 뜻하는 런치와 물가 상승을 뜻하는 인플레이션의 합성어) 장기화로 직장인의 점심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수년째 이어진 고금리·고물가 여파로 식당들은 음식 가격 인상에 나섰는데, 직장인의 지갑은 얇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김영희 디자이너


치솟은 외식비가 지갑을 홀쭉하게 만든 주범 중 하나다. 중앙일보가 직장인들이 점심에 자주 찾는 서울 중구 북창동의 ‘음식 거리’의 주요 식당을 지난해 2월에 이어 이달 4일 다시 둘러보니, 28곳 중 15곳의 점심 메뉴 가격이 올랐다. 가격이 오른 식당 가운데 11곳의 가장 싼 점심 메뉴(기존 8000~9000원)는 1만원이 넘었다. 북창동 인근 직장을 다닌다는 30대 김모씨는 “예전엔 회사 상사들이 점심 먹으러 가자 하면 불편해서 피하기 바빴는데, 이젠 눈치껏 따라가려는 분위기”라며 “상사의 잔소리보다 점심값이 더 무섭다”고 전했다.

9일 푸드테크기업 식신에 따르면 지난 3분기 직장인이 점심시간(오전 11시~오후2시)에 쓴 평균 식대는 1인당 1만37원으로 1년 전(9923원) 보다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1만329원)·경상(1만917원)·전라(1만661원)·충청(1만550원)·대전(1만156원)·강원(1만124원) 등 전국 주요 시도 지역의 평균 점심값은 1만원을 넘어섰다.

김영옥 기자


이에 직장인들은 대형마트나 편의점, 구내식당 등으로 발길을 옮기고 있다. 신한은행이 발표한 2024년 신한 보통사람 금융생활 보고서를 보면 직장인 10명 중 7명은 점심값을 줄이기 위해 노력 중이며, 남녀 직장인이 공통으로 선택한 방법은 도시락이었다. 롯데마트는 초저가 델리인 ‘요리하다 월드뷔페’ 운영 점포를 지난 6월 4개에서 최근 27개까지 늘렸다. 3990원 또는 4990원짜리 점심 상품을 찾는 직장인이 늘면서다. 편의점들은 직장인의 짠물 소비 트렌드에 맞춰 3000~4000원대 도시락 상품을 잇따라 출시하고 있다.

이같은 직장인의 외식 지출 조이기는 자영업자의 고전으로 이어지고 있다. 중앙일보가 1년반새 다시 찾은 음식거리 주요 식당 28곳 중 폐업이나 이전, 점심 영업 중단을 선택한 식당은 8곳이나 됐다. 고물가·고금리 기조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농축수산물 등 식자재는 물론 인건비, 전기·가스·상수도 등 공공요금까지 줄줄이 오른 여파로 분석된다.

롯데마트 제타플렉스 잠실점에서 시민들이 점심 메뉴를 고르고 있는 모습. 롯데마트


음식 거리의 한 업주는 “재료값이 너무 올라 지난해 음식 가격 1000원 올렸더니 손님들 불편해하는 게 느껴지더라. 그나마 점심 장사로 버티는데 음식 가격을 올리면 아예 손님 발길이 끊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가스료·전기료·인건비가 다 올랐다. 이런 상황에서 음식 가격을 안 올리면 내 인건비도 안 나올 거 같아 고민이 크다”라고 하소연했다.

전체적인 소비가 줄어든 상황에서 음식 가격이 올라가면 식당을 찾는 소비자의 발길이 끊기는 악순환이 이어질 수도 있다는 게 자영업자들의 고민이다. 실제 이날 북창동 거리엔 1만원 이하 메뉴를 파는 일부 식당을 중심으로 직장인이 몰렸다. 경영난 등으로 폐업했거나 이전한 기존 식당 자리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테이크아웃 커피 전문점들로 채워져 있었다.

북창동 음식거리에 있는 폐업 식당에 '위험' 안내판이 붙어있다. 곽재민 기자

점심 장사를 접었다는 식당 관계자는 "전체적으로 손님이 줄어드니 북창동에서 터줏대감 역할을 하던 식당도 하나둘씩 떠나고 있다. 여기(음식 거리)도 곧 커피거리로 변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실제 경영난에 시달리다 폐업에 이르는 식당은 2년 연속 증가세다. 박성훈 국민의힘 의원이 국세청으로부터 받은 개인사업자 폐업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폐업한 음식점은 15만2520곳으로 1년 전보다 16% 증가했다. 이는 전체 업종의 폐업 증가율(13.9%)보다 높았다. 올해 7월까지 폐업을 이유로 소상공인에게 지급된 노란우산 공제금도 9000억원 규모로 1년 전보다 12.4% 늘었다.

고물가에 따른 '런치플레이션' 여파로 직장인은 점심 때 1만원의 행복을 누리지 못해서, 자영업자는 손님이 줄어 버티지 못해서 울상인 상황이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서울 시내 한 식당에 영업종료 안내문이 게시돼 있다. 뉴스1

향후 외식 물가 전망도 어둡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달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3년 6개월 만에 1%대로 낮아졌다. 하지만 외식 등이 포함된 개인서비스 물가는 전년 대비 2.9% 올랐다. 개인서비스 물가는 올 1월부터 3%대에서 2% 후반대의 상승률을 이어가고 있어 1%대까지 떨어진 전체 물가 상승률이 피부에 와 닿지 못하는 수준이다.

외식산업 경기 전망지수도 좋지 않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의 외식산업 경기동향지수 보고서에 따르면 3분기 외식산업지수는 2분기(83.85)보다 낮은 81.41로 전망됐다. 여름철 성수기와 계절 메뉴 수요 증가에도 불구하고 내수 부진이라는 기조적 흐름이 크게 변하지 않아서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농축산물과 필수 식재료인 설탕ㆍ소금ㆍ유지류 가격이 안정되지 않았고, 이상 기온으로 하반기 물가 예측도 어렵다. 자영업자에게 계속 부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곽재민 기자 jmkwa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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