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과 남성의 유전자는 인간과 침팬지만큼 달라… “성차 반영한 연구 필요”

이해림 기자 2023. 5. 26.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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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게티이미지뱅크
남성과 여성은 인간과 침팬지만큼이나 멀다. ‘생물학적 측면’에서 그렇다.
세계적인 과학 저널 네이처에 실린 논문에 의하면, 남성과 여성의 유전자는 약 1%만 다르고 나머지 99%가 같다. 숫자만 보면 무시해도 좋을 수준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인간과 침팬지의 유전자 차이는 약 1.2%다. 여성과 남성의 몸은 사실 인간과 침팬지만큼 다른 셈이다.

이에 의학계 전문가와 한국과학기술젠더혁신센터, 식품의약품안전처, 한국보건산업진흥원 관계자가 지난 23일 국회의원회관 제8간담회실에 모였다. '성별 특성을 반영한 R&D 확산 방향 토론회'를 통해 연구에서 성차가 고려돼야 하는 이유를 되짚어보고, 성차 반영 연구를 촉진하는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서다.

지금까지의 의·과학 연구엔 성별 차이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 임상시험 참여자가 대부분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뇌혈관질환 약물 임상시험 참여자의 69%가 남성, 31%가 여성이었다는 여성가족부 조사 결과도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 허가총괄담당관 이근아 사무관은 “호르몬 등 신체 차이로 인해 남녀별로 약물 반응이 다르게 나타날 수 있지만, 여성의 의약품 초기 임상시험 참여가 여전히 미미하다”고 지적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약을 여성이 먹으면? 임상시험 단계에선 예측할 수 없었던 다양한 부작용이 나타난다. 대표적인 사례가 졸피뎀이다. 같은 양의 졸피뎀을 먹어도 여성은 남성보다 혈중 졸피뎀 농도가 약 30~40% 높게 유지된다. 친지질을 띠는 졸피뎀은 체지방에 축적되는데, 여성은 보통 남성보다 체지방이 많아 약이 몸에 오래 머무르는 것이다. 분당서울대병원 소화기내과 김나영 교수(성차의학연구소 소장)는 “처음엔 여성이든 남성이든 졸피뎀을 한 번에 10mg 복용하도록 했다가, 2013년에 여성은 남성의 절반인 5mg을 복용하도록 FDA 권고가 변경됐다”고 말했다.

남성과 여성이 하나의 병을 각기 다르게 경험하기도 한다. 역류성 식도염은 남성 환자 수가 더 많지만, 그 증상 중 하나인 ‘속 쓰림’은 여성 환자에게서 더 심하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남성 관상동맥질환 환자는 이 질환의 전형적인 증상인 ‘흉통’을 주로 호소하지만, 여성 환자는 비전형적 증상인 ‘가슴 답답함’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두 성에서 병이 진행되는 양상이 달라서다. 남성 환자는 보통 관상동맥에 있는 죽상동맥경화반이 파열되지만, 여성 환자는 곧바로 파열되기보단 서서히 금이 가는 식으로 진행될 때가 많다. 김나영 교수는 “남녀 증상이 다르다 보니 여성 관상동맥질환 환자는 병을 늦게 진단받는다”며 “각종 심혈관질환 관련 임상 시험 참가자의 20~30%만이 여성인데, 이 연구 결과를 여성에게 적용할 수 있느냐”고 의문을 제기했다.

생물학적 성의 차이만큼 사회적 성, 즉 ‘젠더’ 차이도 중요하다. 우리 사회엔 여전히 ‘남자가 그 정돈 참아야지’라는 인식이 있다. 이에 통증이 있어도 계속 참다가, 큰 합병증이 생긴 후에야 병원을 방문하는 남성이 많다. 대표적인 사례가 담낭 담석이다. 담낭 결석(담석) 탓에 통증이 있는 여성은 바로 병원을 찾아 수술받는 반면, 남성들은 담석을 내버려뒀다가 급성췌장염 등의 합병증이 생긴 후에야 병원을 찾는다. ‘남성만 생기는 병’ ‘여성만 생기는 병’이라는 편견도 문제다. 2020년 국내 연구에 의하면 유방암 환자의 약 0.4%가 남성이다. 남성 환자가 매우 드물지만 있다.  그러나 ‘유방암은 여성 질환’이란 인식 탓에 남성 환자가 병을 늦게 진단받는 경우가 많다. 김나영 교수는 “남성과 여성의 유방암 발생 양상도 조금 달라서 남성 환자는 고위험 유방암 발병률이 높은 편”이라며 “그런데도 유방암은 여성에게 주로 생기는 병이라는 이유로 유방암 2차 치료제는 남성 환자에게 보험 적용이 안 된다”고 지적했다.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 사회적 성별 차를 고려한 치료를 하려면, 의약품 임상시험 등 질환과 치료제를 연구하는 실험에 두 성이 골고루 참여해야 한다. 실험을 설계하는 연구자, 그리고 실험 계획안을 허가하는 기관에서 ‘성차’를 중요한 실험 구성 요소로 여겨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연구자나 허가 기관의 ‘성차 인식’에만 기대기엔 어려움이 있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 연구개발혁신본부 김현철 본부장은 “성차를 고려해서 연구하면 연구 비용이 많이 들고, 연구에 필요한 기관의 수도 느는 데다, 성차를 반영해 실험을 진행해도 연구 결과에 특이점이 바로 발견되지는 않아 실험을 여러 번 반복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며 “성차를 고려한 연구를 진행하는 게 연구자로서도 부담스러울 수 있다”고 말했다.

결국, 연구자들이 연구에 성차를 반영하도록 하려면 적절한 규제와 유인책이 필요하다. 이에 미국, 유럽연합, 캐나다 등 과학기술 강국들은 보건의료기술 연구를 시행할 때 성별 특성을 반영하도록 규정한다. 캐나다는 국가에서 연구비를 지원받는 연구진이 연구 설계부터 연구 과정 보고, 성과 관리에 이르는 전 과정에 성별 특성을 반영하라고 요구한다. 미국 국립보건원(NIH) 역시 사람에게 적용되는 연구는 반드시 성별 특성을 반영해야 한다고 규정하며, 하나의 성별에 대해서만 연구를 진행할 땐 그 정당성을 증명해야 한다.

한국은 아직 갈 길이 멀다. ‘국가연구개발사업 등의 성과평가 및 성과관리에 관한 법률’에 의하면 정부가 연구자의 성과를 평가할 때 연구개발사업의 성격을 고려해 성별 등 특성을 반영했는지 고려해야 하나, 이는 6월 29일부터 시행되므로 아직 가시적 효과가 없다. 또 ‘연구개발사업의 성격을 고려’한다는 말이 붙어 해외에 비해 규제가 느슨한 편이다. 한국과학기술혁신센터 이혜숙 소장은 “성차를 고려하는 연구 패러다임이 자리 잡게 하려면 연구 과제 제안서를 제출할 때 성별 특성이 고려된 연구인지 점검하는 체크리스트를 연구자가 의무적으로 작성하도록 하거나, 연구책임자와 연구진에게 젠더혁신 교육 이수를 필수화하는 등의 제도가 필요하다”며 “성차를 반영한 연구에 대한 정부 차원의 예산지원정책이 마련되고, 성차 연구에서 기념비적인 성과가 나올 수 있도록 유의미한 연구 아이템을 발굴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성별 특성을 반영한 R&D 확산 방향 토론회' 현장./사진=이해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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