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여 버려" 팬들의 섬뜩한 응원, 제발...
[이현우 기자]
링 아나운서의 선수 소개가 끝나자, 드디어 두 명의 복서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음악과 함께 등장했다.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조명 빛과 준비운동으로 흘린 땀 때문인지 등장한 선수들의 근육은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종이 울리고 경기가 시작되었다. 몇 개의 경기가 끝났다.
일 때문에 조금 늦게 아내가 경기장에 도착했다. 바로 그때였다. 장동훈 선수의 전광석화 같은 펀치가 상대 선수의 턱에 적중되었다. 펀치를 맞은 선수가 그대로 링 바닥에 쓰러졌다. 쓰러진 선수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그대로 경기는 종료되었다.
아내에게 지나가는 말로 프로복서가 되고 싶다는 말을 해본 적이 있다. 놀랍게도 아내는 무조건 반대하지 않았다. 복싱을 꾸준히 해보면서 고민해 보라고 조언했다. 그랬던 아내가 본 프로복싱의 첫 경기가 K.O.로 끝났다. 자연스레 입이 쩍 벌어졌다. 펀치를 적중시킨 이가 나일 수도 있겠지만 쓰러진 이가 내가 아니란 법은 없지 않은가. 프로복싱 데뷔가 얼마나 무섭고 만만치 않은 일인지 새삼 깨달았다. 아내는 농담 반, 진담 반 "프로는 안 되겠다"라고 말했다. 꿈에 먹구름이 자욱해졌다.
▲ 지난 3일 KBM 슈퍼밴텀급 챔피언 결정전을 치른 심정현 선수와 육찬영 선수가 경기 후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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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복싱의 가장 큰 문제는 여러 개로 쪼개진 협회
이렇게 재밌는 복싱이 안타깝게도 국내에서는 비주류 스포츠다. 프로야구와 축구는 말할 것도 없고 최근에는 프로농구의 인기도 높아지고 있다. 종합격투기(MMA)도 날이 갈수록 팬층이 두터워지고 있다. 반면 복싱은 취미로 즐기는 이도 많지 않을뿐더러 프로복싱을 관람하는 이도 많지 않다.
물론 이는 국내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다. 여전히 세계 복싱 시장은 뜨겁다. UFC 선수 코너 맥그리거와 복싱 선수 플로이드 메이웨더 주니어 복싱 시합의 간접적 경제효과는 약 2조 원이 넘는 것으로 추산될 정도다.
그렇다면 왜 국내에서는 프로복싱이 인기가 없는 걸까. 선문대학교 강신준의 석사학위논문 '한국 프로복싱의 문제점 분석 연구(2018)'를 보면 여러 문제를 지적한다. 그중 몇 개의 지적에 공감했다.
첫째, 프로복싱의 운영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여러 개로 쪼개진 협회가 가장 큰 문제 아닐까. 선수 풀도 많지 않은 상황에 협회는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필자가 아는 협회만 네 곳이다. 관리가 되지 않아 몇 년째 시합도 없고 랭킹이 공석인 협회도 있다. 단 한 경기로 랭킹에 진입할 수 있기도 하다. 자연스레 선수의 기량이나 수준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또한 한 체급에 여러 명의 한국 챔피언이 있는 건 누가 봐도 문제 아닌가. 챔피언이라는 공적 지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협회 문제가 프로복싱의 발전을 막는다는 건, 복싱계에서 지속적으로 나온 케케묵은 이야기다. 프로복싱협회를 하나로 합칠 필요가 있다. 당장 하나로 합칠 순 없어도 정책적 지원을 받거나 권위 있는 대회를 개최할 때만큼은 서로 협력할 필요가 있다. 문화체육부를 비롯한 정부 기관에서는 프로복싱협회가 하나가 아니기에 정부 차원의 지원이 불가하다는 입장이다. 하나의 협회여야 형평성 등을 고려하여 정부 차원에서 작은 지원이나마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관료와 운영비 내면 수익이 없는 프로복싱
둘째, 전용경기장이 없다는 지적이다. 영주시에 복싱전용훈련장이 있지만 아마추어 실업팀이 훈련하는 전용경기장이다. 프로복싱을 위한 전용경기장은 없다. 몇 번 직관을 해보니 전용경기장이 없는 건 프로복싱 부흥에 큰 걸림돌이다. 이웃 나라 일본에는 1962년에 지어진 프로복싱을 비롯한 격투기 전용경기장 '고라쿠엔 홀'이 있다.
최근 복싱 시합이 지속적으로 개최되었던 장소는 서울 강남구에 있는 섬유센터 이벤트홀이다. 이곳은 13시~22시 기준 대관료만 460만 원이고 조명과 음향 비용은 별도다. 여기에 심판 인건비와 보안업체 비용까지 하면 하나의 대회를 개최하기 위해 약 1000만 원의 비용이 소요될 것으로 추측된다. 문제는 여기에 프로선수들의 대전료는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스탠딩석 입장료는 5만 원, VIP석은 10만 원. 스탠딩석 기준으로 200명분의 티켓을 판매해야 1000만 원이 된다.
프로복싱 선수들은 라운드당 얼마 안 되는 대전료를 받는 것으로 알고 있다. 얼추 계산을 해봐도 대관료와 운영비를 내고 나면 선수 대전료를 챙겨주기에도 쉽지 않은 현실이다. 결국 프로복싱 전용경기장이 없다는 점은 선수들의 대전료 현실과도 연결된다.
▲ 일본의 이노우에 나오야가 2021년 6월 19일 토요일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밴텀급 타이틀전에서 필리핀의 마이클 다스마리나스를 꺾고 벨트를 들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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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덕노 선수가 지난해 11월 WBO 아시아퍼시픽 타이틀을 획득했지만, 동양타이틀 소식임에도 기사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복싱은 비주류 스포츠다. 지난 6월 타이슨 고키 선수에게 빼앗겼다. 오는 11월 22일 섬유센터에서 리벤지 매치가 열린다.
복싱은 싸움이 아니다
마지막 문제점은 복싱이 위험하고 단순한 운동이라는 인식이다. 사실 위험한 운동이라는 인식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야구, 농구, 축구 등 스포츠 스타들이 한 번쯤은 큰 부상을 앓는다. 복싱도 마찬가지다. 물론 강도 높은 스파링이나 프로복싱 시합은 위험할 수 있다.
그런데 관람조차 하지 않는 건 단순히 '위험하고 단순한 운동'이라는 인식에 그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문화 저변에 복싱을 비롯한 격투기를 하나의 '스포츠'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깔려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복싱은 하나의 동작에도 수많은 원리가 담겨 있고 다양한 기술을 익혀야만 실전 스파링에 사용할 수 있다. 상대에 따라 다른 전략이 필요하고 스파링 도중 찰나에 이뤄지는 수싸움은 고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다만 복싱 팬 문화는 성숙해져야만 한다. 복싱 직관을 하면서 몇차례 눈살을 찌푸린 적이 있다. 응원전을 하다못해 경기장 내부에서 두 편으로 나뉘어 서로를 비방하고 욕하는 장면을 종종 보게 된다. 복싱 자체가 처음인 관람객이 이 장면을 보고서도 다시 복싱장에 찾아오겠는가.
"죽여 버려."
정말 복싱이 싸움이 되길 바라는 응원인가. 경기장을 찾을 때마다 거의 듣는 거칠고 과격한 응원이다. 한 선수를 응원하는 마음이야 이해하지만 상대 선수와 다른 관람객을 존중하지 않는 응원은 유쾌하게 들리지는 않는다. 이런 열광적인(?) 팬 문화가 복싱 팬덤을 키울 수 있다는 시각도 존재하겠지만, 글쎄다.
▲ 지난 3일 섬유센터에서 WBA 아시아 챔피언결정전과 KBM 3대 챔피언결정전이 열렸다. |
ⓒ 이현우 |
복싱을 시작한 지 2년이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다섯 차례 프로복싱을 직관했다. 20년 넘게 농구에 발을 담갔지만 프로농구를 관람한 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관찰파가 아닌 행동파인 내가 프로복싱 직관에 흥미를 갖는다는 건 돌이켜보면 놀라운 일이다.
프로복싱을 직관하면서 결론적으로 프로복서의 꿈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지만, 복싱을 수련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링 위에 오르는 선수를 향한 존경심이 더욱 커지고 있다.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성실하게 훈련했는지 가늠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의 온갖 욕구를 통제하고 링 위에 오르는 결전의 날을 위해 몸을 만들기 때문이다. 많게는 10kg 넘게 체중을 감량하는 선수도 있다.
오는 11월 22일 윤덕노의 리벤지 매치가 펼쳐진다. 윤덕노 선수뿐만 아니라 여러 프로복서들이 복싱 팬들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국내 프로복싱이 인기 스포츠로 가려면 가야 할 길이 멀다. 하지만 체육관에서 팬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성실하게 땀을 흘리는 선수와 지도자들이 여전히 많다. 여러 문제가 산적해 있지만 선수와 지도자가 희망이다. 산적한 문제들이 차츰 해결된다면 70~80년대처럼 세계 무대를 누볐던 한국 복싱이 부활할지도 모르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brunch.co.kr/@rulerstic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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