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정말 인간도 아니었구나' 하지 않게, 동두천 성병관리소 남겨주세요"
[김성욱 기자]
▲ 1978년 동두천 성병관리소에 수용된 경험이 있는 피해 당사자 김아무개(67)씨가 지난 23일 경기도 수원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났다. |
ⓒ 김성욱 |
서울 은평구 출신이었던 김아무개(67·여)씨는 열아홉 때인 1976년 '미군 장교 클럽'이라고 적힌 신문 광고를 보고 전화를 걸었다. "어린 마음에 미국이나 서양 문화에 대한 환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씨의 나이를 묻더니 서울 종로로 오라는 얘기를 듣고 친구와 함께 갔다. "좋은 데 보내주겠다"던 소개업자의 차를 타고 향한 곳은 경기도 의정부의 미군 기지촌 성매매 업소였다.
기지촌의 포주는 소개업자에게 돈을 지불했다며 대뜸 김씨에게 돈을 갚으라고 했다. 돈이 없다고 하니 일을 해서 갚으라고 했다. 대신 새 옷과 화장품을 주며 먹여주고 재워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후에 알고 보니 이 역시 모두 김씨가 갚아야 할 '빚'에 더해지고 있었다. 첫날 생긴 빚만 당시 돈으로 80만 원이었다고 한다. "그 나이엔 꿈도 못 꿀 큰 돈이었죠." 업소를 떠나지 못 하게 하려는 포주들의 술수였다. 김씨 외에도 이미 20여 명의 젊은 여성들이 그 업소에 살고 있었다. 미군들이 기지 밖으로 나오기 시작하는 오후 5시부터 새벽 3~4시까지, 쉬는 날 하루도 없이 매일 일을 해야 했다고 한다.
김씨의 기지촌 생활은 2년 남짓이었다. 그는 "운이 좋았다"고 했다. 김씨보다도 두 살 어렸던 한 미군 병사가 클럽에서 만난 김씨에게 청혼을 한 것이다. "클럽 뒤에는 성매매가 이뤄지는 작은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는데, 거기 불려가지 않도록 남편이 돈을 내고는 나를 많이 지켜줬어요." 김씨는 그 미군과 결혼했고 아들을 낳았다. 스물한 살 때였다. 둘은 곧 미국으로 떠나기로 했다.
1978년 미국행을 앞뒀던 김씨는 친구와 함께 의정부 기지촌에서 차로 40분 정도 떨어진 동두천 기지촌을 찾았다. 역시 미국 군인과 결혼했던 한 친구와 만나기로 한 날 밤이었다. "길을 걸어가는데 갑자기 봉고차에서 남자들이 내리더니 우리한테 다짜고짜 검진증을 보여달라는 거예요." 검진증은 기지촌 여성들이 일주일에 1~2회 성병 검사를 한 결과 이상이 없다는 걸 증명하는 표식이었다. 검진증 대신 미군과 결혼해 받은 아이디카드를 지참하고 있던 친구와 달리, 그날 아이디카드를 집에 두고 왔던 김씨는 영문도 모른 채 남자들에게 붙잡혀 강제로 끌려갔다. "봉고차에 나 말고도 언니들이 열 명은 있었어요." 산속을 헤집고 달리던 봉고차가 멈춰선 곳은 동두천 성병관리소였다.
▲ 소요산 입구, 주차장 우측 숲속에 있는 옛 성병관리소 전경 |
ⓒ 최희신 |
그날 김씨가 밤을 지새워야 했던 곳은 건물 2층 3번방이었다. 이튿날 아침이 되자 1층으로 내려가 수십명이 줄을 지어 강제로 페니실린 주사를 맞았다고 한다. 2층은 자는 곳, 1층은 주사 맞는 곳이었다. 김씨는 동두천 성병관리소 직원에게 누차 성병에 걸리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당시 기지촌에선 페니실린 주사를 맞으면 약이 독해 애를 못 낳게 된다는 소문이 있었다고 한다.
"난 그때 이미 아들이 하나있었지만, 실제 이후로 아이를 더 낳으려 했는데 안 됐어요. 두 번이나 유산을 했으니까. 그때도 페니실린 때문에 임신 못 한다고 말하는 언니들이 많았어요. 다들 싫다는데도 그렇게 줄을 세워놓고 주사를 많이 맞혔던 걸 보면, 아마 성병관리소가 나라에서 돈을 더 많이 타먹으려면 사람 수나 건수를 늘려야 했던 거 아닌가 싶어요. 나는 기절하는 언니만 봤지만, 주사 맞고 쇼크 와서 죽은 언니들도 있댔어요."
김씨는 그곳에서 꼬박 일주일을 보내야 했다. 김씨가 지냈던 의정부 기지촌에도 성병관리소가 있었지만, 동두천 성병관리소의 시설이 더 열악했다고 했다.
이렇게 기지촌 여성들을 상대로 국가가 관리한 성병관리소는 경기도에만 6곳, 전국에 40여 곳 있었다. 이 중 아직까지 건물이 남아있는 유일한 곳이 바로 김씨가 기억하고 있는 동두천 성병관리소다. 오늘날 단풍철마다 인파로 북적이는 경기도 동두천시 상봉암동 소요산 등산로 입구 인근에 그대로 방치돼 있다.
1973년부터 1996년까지 운영된 동두천 성병관리소는 실제 매주 성병 검사를 받아야 했던 기지촌 여성들이 양성 반응이 나오면 강제로 격리 수용되는 곳이었다. 김씨 증언대로 2층짜리 건물에 20명씩 들어가는 방이 7개, 총 140명까지 수용됐다고 한다. '낙검자 수용소' 혹은 '몽키하우스로' 불렸다. 검사에서 떨어지면 가는 곳, '원숭이'처럼 갇히는 곳이라는 뜻이었다.
성병관리소는 국가가 주한미군을 상대로 하는 기지촌 성매매를 사실상 조장해 외화벌이의 수단으로 삼았음을 뒷받침하는 가장 대표적인 물증 가운데 하나다. 기지촌의 역사는 미군이 주둔하기 시작한 1950년대로 거슬러 오른다. 지난 2022년 9월 대법원은 기지촌 성매매 여성 100여 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국가의 기지촌 조성·관리·운영 행위 및 성매매 정당화 및 조장 행위는 구 윤락행위방지법을 위반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인권 존중 의무 등 마땅히 준수돼야 할 준칙과 규범을 위반한 것"이라며 기지촌을 만든 건 국가였고, 이는 잘못이었다는 점을 인정했다.
당시에도 성매매가 법으로 금지돼 있었음에도 국가가 미군 기지 주변을 성매매를 할 수 있는 예외구역으로 공식 허용하면서 기지촌이 조성됐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대법원은 특히 국가의 성병관리소 운영 역시 위법하다고 명시했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법령상 근거 없이 이뤄진 격리수용 치료나 의료 전문가의 진단이 없어 전염병환자라고 볼 수 없음에도 이뤄진 격리수용 치료 행위는 법령과 인권 존중 의무 등을 위반하고 객관적 정당성을 결여하여 위법하다"고 했다.
▲ 1978년 동두천 성병관리소에 수용된 경험이 있는 피해 당사자 김아무개(67)씨가 지난 23일 경기도의회에서 열린 동두천 성병관리소 건물 철거 반대 기자회견에 어렵게 참석했다. 김씨는 당시 의정부 기지촌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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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8년 동두천 성병관리소에 수용된 경험이 있는 피해 당사자 김아무개(67)씨가 지난 23일 경기도의회에서 열린 동두천 성병관리소 건물 철거 반대 기자회견에 어렵게 참석했다. 김씨는 당시 의정부 기지촌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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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단체들과 기지촌 성매매 피해자들은 반발하고 있다. '동두천 옛 성병관리소 철거 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는 지난 23일 경기도 수원시 경기도의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동두천시가 철거 계획을 철회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전국에 유일하게 남은 성병관리소를 단순 관광 사업 명목으로 없애는 건 국가 폭력의 증거를 맥락 없이 소거하는 어리석은 처사라는 것이다. 이들은 성병관리소를 근현대문화유산으로 지정해 보존하고, 여성평화 인권박물관 등으로 활용하자고 제안하고 있다.
동두천시의 철거 움직임이 임박해지자 공대위는 지난 5일 UN 인권위원회에 동두천 성병관리소에서 벌어진 인권침해를 기억할 수 있도록 이곳을 보존해야 한다는 취지의 긴급 진정을 넣기도 했다. 동두천시는 성병관리소 철거 계획과 보존 주장에 대한 입장을 묻는 <오마이뉴스> 질의에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23일 기자회견장 한편에는 김씨가 고개를 숙인 채 앉아있었다. 그의 앞에는 '그 당시는 애국 지금은 수치? 동두천 옛 성병관리소 보존하라'고 적힌 피켓이 놓여있었다. 김씨는 동두천 성병관리소를 경험한 피해자 중 유일하게 공개적으로 나서 철거를 반대하고 있는 당사자다. 1978년 동두천 성병관리소에서 나온 뒤 미국으로 건너갔던 김씨는 지난 2002년 사고로 남편을 잃고 2007년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그에게 왜 동두천 성병관리소를 보존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그것마저 없어지면 '정말 우린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 것 같거든요. 나도 이런 데 나오긴 하지만, 주변 사람들한테는 양색시라고 얘기 안 해요. 창피하니까. 이민 갔었다고 거짓말하죠. 내가 지금도 의정부에서 살면서 식당 일 나가거든요. 근데 가끔 사람들이 그래. 여기 다 기지촌이었다고, 양공주들 판이었다고 그렇게 욕을 해요.
나도 처음엔 그냥 그런가 하고 속으로 삭혔어요. 내가 뭔가를 그렇게 잘못한 건가, 해서 화가 나긴 해도 정확히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모르겠더라고요. 근데 이제와 생각해보면 열아홉, 스무 살 먹은 그 어린 애가 뭘 알았겠어요? 나라가 그런 걸 막는 게 정상이잖아요. 근데 그때는 달러벌이 잘한다고 하면서 거기에 기지촌 생겨나도록 놔두고, 모른 척했던 거 아니에요?
기지촌에서도 틈만 나면 그랬어요. 여러분이 산업역군이니까 1달러라도 더 벌어오라고. 심지어 포주들은 일 더 잘하라고 마약까지 먹였다고요. 그렇게 피 빨리며 일했는데 제대로 돈도 못 받았어요 우리는. 내가 기지촌 떠날 때도 80만 원 빚이 줄지도 않고 그대로 있었다니까요. 번 건 생활비로 다 제하고 플러스도 없이 끝난 거예요. 나는 그래도 결혼해서 양색시 됐으니까 운이 좋았던 거지, 결혼 못 한 언니들은 일본 같은 데 업소로 다시 팔려가기도 했어요.
▲ 1978년 동두천 성병관리소에 수용된 경험이 있는 피해 당사자 김아무개(67)씨가 지난 23일 경기도의회에서 열린 동두천 성병관리소 건물 철거 반대 기자회견에 어렵게 참석했다(왼쪽 첫 모자이크). 김씨는 당시 의정부 기지촌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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