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콧구멍을 점령해 버린 향기, 9900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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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지 기자]
어릴 때 엄마는 나를 '개코'라고 불렀다. 엄마가 부엌에서 뚝딱대고 있으면 뭘 만드는지 냄새를 통해 단번에 알아맞혔기 때문이다. 나는 일생이 무딘 아이였는데 유일하게 예민한 것이 바로 후각이었다.
시골 촌뜨기가 서울에 처음 왔을 때도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빼곡한 건물과 많은 차들이 주는 시각적인 위압감이 아니라 냄새였다. 매캐하고도 꿉꿉한 거리의 냄새... 좁은 자취방 하수구 냄새, 회사에 수북한 복사지 냄새 같은 것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백화점 냄새였다. 달큼하고도 머리를 '띵' 하게 하는 백화점 1층의 화장품 냄새, 새 옷과 가죽 신발 냄새로 가득한 2,3층의 냄새, 또 각종 음식 연기들이 자기들끼리 충돌해 만들어내는 지하 1층의 냄새까지... 도시의 냄새는 참 복합적이면서도 치열했다.
▲ 우리집 거실에 놓인 모과 은은하게 향기가 퍼져요~ |
ⓒ 조영지 |
어느 순간, 나는 그 냄새에 익숙해져 갔다. 아니, 오히려 그 냄새를 더 맡고 싶어서 수집을 하기도 했었다. 도시의 냄새를 묻히고 여기저기를 활보하는 것도 참 좋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갑자기 그런 향들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사랑하던 남자가 어느 날 이유 없이 꼴 보기 싫어지는 것처럼.
향수, 화장품, 핸드크림, 디퓨저, 등 모든 인위적인 향들을 적대시했다. 나는 무향 선호자가 됐다. 향이 진한 화장품을 버리고 섬유 유연제도 버렸다. 남편은 정전기 때문에 못 살겠다고 투덜댔지만 타협할 수가 없었다. 인위적이고 짙은 향들은 머리가 아파왔으니까...
▲ 안방에 놓인 모과 안방 냄새도 은은합니다~ |
ⓒ 조영지 |
그런데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생활 냄새는 나의 고민거리였다. 대안으로 디퓨저를 사서 놓았더니 아까 말한 것과 같은 부작용이 나기 시작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이 울렁거렸다. 시트러스 향, 크리스피 향... 말도 어렵게 붙여놓은 별별 비싼 향들도 내 콧구멍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산책을 나갔는데 어떤 냄새가 박력 있게 '훅' 하고 코를 밀치고 들어왔다. 그 냄새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고도 능글맞게 내 콧구멍을 점령해 버렸다. 나는 벌름거리며 그 냄새의 정체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내 앞엔 뭉툭하고 노란 열매가 빼곡히 달린 나무가 우뚝 서 있었다. 바로 모과나무 였다. 떨어져 있는 모과를 주워서 코에 살짝 대보니 '그래. 바로 이 냄새였어' 하는 종소리가 귓가에 울렸다(거짓말 쪼꼼 보태서). 자연 각각의 개체들이 각자의 달콤함을 조금씩 모은 향을 모과가 품고 있는 듯했다.
▲ 욕실에도 모과 욕실에도 모과 냄새가 가득~ |
ⓒ 조영지 |
나는 집에 오자마자 모과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았다. 어렵지 않게 인터넷에서 모과를 찾을 수 있었다. 대부분 모과청 혹은 모과차를 담그는 용도로 많이 사는 모양인데 나는 방향제 용으로 샀다. 가격은 더 더 향기로웠다. 한 박스에 9900원.
며칠 후 모과 한 박스가 도착했다. 박스를 여니 푸르스름하고 못생긴 모과가 그득 담겨 있었다. 설익은 모과였다. 아이들은 처음 보는 모과를 신기해했고 남편은 '모과는 왜...?'라는 표정으로 어이없이 날 쳐다보았다. '다 쓸데가 있지 이 사람아...' 나는 화장실, 거실, 아이들 방, 안방, 곳곳에 모과 2-3개를 올려놓았다. 처음엔 가족들 모두 긴가민가 하는 표정으로 무반응이었지만 며칠 뒤 상황은 달라졌다.
"엄마, 난다 난다 정말 냄새가 나~ 이게 모과향이었어? 너무 향기로워~"
딸아이가 하교 후 집에 오자마자 건넨 말이다. 학생들도 처음엔 심드렁했다가 책상 위에 모과를 올려두자 조금씩 관심을 가지며 자연스럽게 퍼지는 향에 무척 놀라워했다.
"샘, 이거 여기서 나는 냄새예요? 대박! 젤리보다 냄새가 좋은데요?"
요즘 아이들은 모과를 본 적도 거의 없거니와 모과의 활용도도 거의 알지 못했다. 이 천연 방향제의 열매를 매개로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니 흥미롭게 귀를 쫑긋했다.
▲ 책상 위에 놓인 모과 수업하러 온 아이들이 보고 신기해 하는 모과 |
ⓒ 조영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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