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피치] 커브와 포크볼을 섞은 듯한 고속 슬라이더 (feat. 박명환)

조회 44,0992023. 5. 9. 수정
박명환은 투수가 타자를 이기는 데 있어 가장 좋은 공은 속구처럼 오다가 변화하는 변화구라고 밝힌다. (사진=LG 제공)

KBO리그에서 2000년대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투수가 박명환 경남대 투수 코치(이하 직책 생략)다. 박명환은 1996년에 프로에 데뷔해 두산과 LG·NC에서 17시즌을 뛰며 103승 93패, 9세이브, 8홀드, 평균자책점 3.89 등을 남겼다. 특히, 2004년에는 평균자책점 1위(2.50)는 물론이고, 탈삼진왕(162개)에 올랐다.

또한, 2006년 7월 26일 대전에서 열린 한화전에서는 4회 한상훈을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역대 6번째로 1,300탈삼진 고지를 밟았다. 당시 나이는 30세 1개월 19일. 이것은 정민철 해설위원을 밀어내며(30세 6개월 21일) 역대 최연소 1300탈삼진을 기록한 선수가 됐다.

그때를 돌아보며 그는 “1300탈삼진 가운데 속구로 잡은 것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500개 안팎이었다. 800탈삼진 이상을 슬라이더로 잡아냈다”라고 밝힌다. 그의 말처럼 박명환은 빠른 공과 슬라이더를 던지는 이른바 ‘투피치’다. 단조로운 구종으로 통산 103승과 많은 탈삼진(1421개)을 기록한 것은, 그만큼 빠르고 종으로 떨어지는 슬라이더가 위력적이었다는 방증.

그렇기에 그의 슬라이더는 KBO리그 역대 최구 구종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다만 그의 주 무기가 슬라이더라서 아마추어 때도 빠른 공과 슬라이더를 던졌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고교 시절까지 그의 주 무기는 커브였다. 이에 ‘머니피치’에서는 그에게 커브에서 변형을 준 슬라이더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저에게 있어 슬라이더는 되게 애착이 가는 구종이에요. 왜냐하면, 전성기 때는 예를 들어 스트라이크 2개를 잡은 0-2라는 볼카운트가 되면 제 마음속으로도 “슬라이더를 4개 던지자”라고 생각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렇게 던지면 90% 이상은 삼진이었어요. 그만큼 자신 있고, 위력적인 공이었던 거죠.

사실 저는 충암고 시절까지는 커브를 되게 잘 던지는 투수였어요. 근데 프로에 들어와서 쌍방울과의 데뷔전부터 혹독한 신고식을 치렀어요. 5이닝 5실점인가 6실점인가를 했으니까요. 그다음 한화와의 경기에서도 무너졌고요. 그때 정말 충격을 크게 받았죠.

고교 때는 커브를 던지면 제대로 치는 타자가 없었어요. 스트라이크를 던지면 못 치고, 볼을 던지면 헛스윙하고 그런 식이었죠. 근데 프로에서는 스트라이크를 던지면 쳐내고 볼을 던지면 안 치는 거예요. 그렇게 커브가 제 역할을 못하니까, 속구 하나로 버텨야 하는 상황이 된 거죠. 범 무서운 줄 몰랐던 어린 나이에 일찌감치 프로라는 큰 벽을 만나게 됐어요.

그러면서 ‘아, 뭔가 새로운 구질을 개발해야 한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슬라이더는 크게 고려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이전에도 여러 차례 슬라이더를 추가하려고 노력했거든요. 근데 슬라이더 그립을 잡고 던지면 각도 등이 밋밋해서 배트에 맞아 나갔어요. 그런 경험이 있어서, 제가 가지고 있는 것에서 변형을 주려고 했어요.

커브 그립을 잡고 속구처럼 세게 던져봤어요. 그런데 그게 옆으로 크게 휘더라고요. 그러면서 계속 던지면서 종으로 떨어지게도 던지게 됐어요. 이후로도 노력해 백도어 슬라이더도 던지는 등 슬라이더라는 구종을 여러 구질로 던지게 됐죠.

박명환은 프로에서 성공하는 비결은 끊임없는 자기 관리와 자기 계발밖에 없다고 말한다. (사진=NC 제공)

제 슬라이더가 종으로 빠르게 떨어지니까, 야구관계자 중에서는 포크볼이라고 하는 분들도 있었어요. 왜냐하면, 전성기 때 제 슬라이더 구속은 140km/h 초중반이 나왔거든요. 대부분 투수의 슬라이더가 빠르면 130km/h 초중반이니까, 엄청나게 빠른 거죠. 게다가, 옆으로 휘는 게 아니라 종으로 떨어지니까 타자가 더 대처하기 어려웠을 것 같아요.

어느 타자는 저한테 이런 말을 한 것도 기억이 나요. “슬라이더가 속구처럼 오다가 회전이 또다시 걸린 것처럼 뒤로 살짝 가는 느낌이 들다가 뚝 떨어져 치기 어렵다”라고요.

저는 이 슬라이더를 누군가에게 배운 게 아니에요. 제 스스로 활로를 찾기 위해 궁리하면서 만들어낸 거죠. 그 당시 제가 가장 자신 있는 구종이 커브였으니까, 가장 자연스러운 그립 역시 커브 그립이었고요. 그걸 속구처럼 세게 던지면 어떻게 될까에서 출발해 던지면서 조금씩 수정하고 만들어낸 거죠.

그런 점에서 김인식 감독님에게 항상 감사하게 생각해요. 제 기억으로는 데뷔한 1996년에 10경기까지 평균자책점이 7점대였어요. 그런데도 김인식 감독님은 계속 마운드에 올려 보내주셨고, 제 시도 – 커브 그립으로 속구처럼 세게 던지는 실험을 경기에서 할 수 있었어요. 그런 경험을 쌓으며 수정하고 보완할 시간이 있었으니까 제 슬라이더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해요.

투수가 하나의 구종을 개발하는 데는 적어도 3개월은 걸려요. 그것도 변화구 감각이 뛰어난 선수가. 대부분은 적어도 2년 정도는 연습과 경기에서 던져야 결과물을 얻을 수 있거든요. 그런 시간이 요즘은 없는 것 같아요. 그날 해보고 안 되면 포기하고 다른 걸 하고, 좀 극단적이지만 그런 모습을 많이 봤어요. 그런 점에서 결과물을 내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될 것 같아요.

송진우 선배님도 그렇고, 유택현 선배님도 그렇고 야구를 오래 한 분들이 있잖아요. 그런 분들에게는 배울 점이 많아요. 자기 관리는 물론이고 자기 계발을 게을리하지 않았거든요. 저도 종으로 떨어지는 슬라이더를 만든 후에도 그걸 더 발전하기 위해 노력했거든요. 2003년부터는 백도어 슬라이더를 추가하려고 했죠.

이것도 누구에게 배운 게 아니에요. 그때 리오스와 랜들이 같은 팀에 있었는데, 왼손 타자를 상대로 백도어 슬라이더를 효과적으로 쓰더라고요. 그걸 보고 저도 해보고 싶어서, 제 나름대로 궁리하면서 던지고 수정하고 보완하면서 제 공이 된 거죠.

올해 4월부터 신경현 감독과 함께 경남대를 지도하게 된 박명환 코치. 가운데는 박재규 총장. (사진=경남대 제공)

현역 시절에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두산 시절인 2001년에 한국시리즈 우승할 때랑 FA(자유계약선수)로 LG에 입단했을 때인 것 같아요. 특히, LG로 이적할 때는 정말 잘하고 싶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아서 항상 팀이나 팬에게 미안한 마음입니다. 특히, 몸이 아프니까 제 공을 던질 수 없었던 게 가장 안타까웠죠.

부상과 관련해서 여러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김인식 감독님이 너무 혹사해서 그렇다는 말도 있지만 그것은 사실은 아닙니다. 지금 할 수 있는 말은 요즘과 같은 체계적인 재활 시스템이나 선수 몸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은 게 원인이었다고 생각해요.

제가 커브 그립을 잡고 던졌으니까, 고속 슬라이더보다는 고속 커브라고 해도 되지 않느냐라고 묻는 분도 있는데, 저는 좀 달라요. 제가 현역 시절에 미국에 교육리그 등으로 참가했을 때 보면 미국 코칭은 되게 과학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무엇인가를 ‘안다’는 건 그것을 되게 쉽게 설명해 줄 수 있는 거잖아요. 미국 지도자는 그렇게 하더라고요.

포심 패스트볼만 해도, 실밥이 4개이고 손에 그 4개가 걸치니까 포심이라고 불리고, 홈 플레이트까지 갔을 때 공기 저항을 제일 덜 받으면서 가장 빠르게 가는 공이잖아요. 근데 우리는 ‘직구’라는 말로 끝나요. 그 공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런 것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아요. 단지 직구는 이렇게 잡고 포크볼은 저렇게 잡고 던지면 된다로 끝인 거죠.

정말 중요한 것은 원리를 잘 설명해 줘 선수가 이해하게끔 하는 데 있다고 생각해요. 이 공은 이런 원리이니까, 이렇게 해보면 어떻게 될까. 아, 해봤더니 이런 결과가 나왔다면 저렇게 하면 이런 식의 변화를 보이지 않을까, 그런 발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자기 것을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요.

역시 프로에서 성공하려면 자기에게 맞는 옷을 입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한데요, 그 옷은 누가 만들어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지도자 등 다른 사람이 봤을 때는 정말 멋진 옷처럼 보여도 입은 선수는 어느 부분이 당기거나 해서 불편할 수 있거든요. 그러면 그 불편함은 스스로 수정하고 보완해야 하는 거죠. 그런 코칭과 자기 계발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있어 슬라이더는 저를 이 자리까지 만들어 준 공이죠. 또 제가 그냥 가능성만 있는 투수로 끝나지 않게 해 준 공인 것 같아요. 박명환이라는 이름 석 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공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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