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계 3위 기업의 도산...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박철현의 도쿄스캔들]
[박철현 기자]
▲ 지난 6일 일본 도쿄 도심의 시부야 교차로를 사람들이 건너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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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한때 연 매출 5000억 엔(4조 3318억 원)을 기록해 1조 엔 매출의 마루한, 7000억 엔의 다이나모에 이어 업계 서열 3위에 해당했던 가이아 그룹의 도산은 일본 파친코 업계에 커다란 충격을 줬다. 이른바 파친코 기업들이 몰려있는 도쿄 우에노 '파친코 마을'의 현업 종사자들은 "앞으로 더 많은 관련 기업들이 도산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기업 도산은 파친코 업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제국데이터뱅크 통계에 따르면 올해 2/4분기(4~6월)의 일본기업 도산 건수가 3년 만에 2000건 이상(2086건)으로 집계됐으며, 올해 상반기 도산 건수는 4006건으로 2018년의 4029건 이후 최대치를 기록했다. 코로나 시국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던 2020년 상반기 3943건보다 더 많다.
일본은 2020년 하반기부터 코로나로 인한 기업도산을 막기 위해 융자완화 정책을 국가 차원에서 실시했다. 저금리와 원금 상환 유예 정책을 적극적으로 폈고, 덕분에 연평균 8000건에 달했던 기업 도산이 2021년과 2022년 6000건 정도로 하락했다. 하지만 유예기간이 끝나고 보조금 정책 등이 폐지되자 다시 도산 기업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코로나 이전과 다른 점은 현재 일본 경제가 유례없는 초저금리 정책 유지와 30년 만에 닛케이지수 최고치(33000) 경신 등으로 겉으로는 호조를 띠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코로나 이전 도산 건수와 비슷해지고 있으며 나아가 일부 전문가들은 "일본경제의 중간층을 지지해 온 중소기업의 연쇄도산이 코로나 이전과는 비교도 못 할 정도로 마치 도미노처럼 발생할 것"이라며 경고하고 있다.
▲ 지난 16일 일본의 닛케이 225 지수를 보여주는 도쿄의 한 증권사 전광판 앞을 한 시민이 지나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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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제로 융자는 일본 정부가 각 지자체 신용보증협회에 기업 대상 융자 보증 심사를 대폭 완화시켜 중소·영세기업이 코로나 시국을 헤쳐 나갈 수 있도록 지원한 정책이다. 이 정책으로 인해 많은 기업이 도움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절차도 간단했다. 기업들은 주거래은행에 대출 신청을 했고, 금융기관은 최저 500만 엔(4333만 원)에서 1억 엔(8억 6658만 원)까지 거의 아무런 조건 없이 대출을 승인했다. 금융기관 입장에선 대출금이 상환되지 않더라도 신용보증협회로부터 받으면 되니 별다른 심사 없이 빌려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기업에 대출된 융자액은 54조 엔(467조 9532억 원)에 달한다. 그리고 3년 후 본격적인 변제가 시작되면서 대출상환능력 없는 기업들이 도산 쓰나미에 빠질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예측이 나오고 있다.
실제로 제국데이터뱅크에 따르면 오사카 지역에서만 대출금 변제에 불안을 느낀다고 답한 이들이 8만 기업 중 9.9% 즉 8000여 곳에 이른다. 이 중 7월 현재 변제를 못 해 도산할 것 같다고 말한 기업은 800여 개에 달하며, 실제로 오사카 지역에서만 하반기 도산 예측 기업이 500여 곳을 넘길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도쿄를 비롯한 관동지역은 더더욱 암울하다. 도쿄도는 중앙 정부 지원과 별도로 기업 파산을 막기 위해 기업 대상으로 고용안정 지원금을 내놓고 있다. 일례로 증가 일로에 있는 외국인 방일 관광객의 숙박업소를 운영하는 기업의 경우 자잘한 조건이 붙기는 하지만 종업원 1명당 연간 280만 엔(2427만 원)을 1년 동안 5명까지 무상으로 지원하며, 숙박 인테리어 공사비용도 최대 1000만 엔(8667만 원)까지 무상 지원한다.
그 외 업종에도 각종 지원금 혜택을 주고 있다. 하지만 제국데이터뱅크는 "하반기 도쿄도내 도산기업은 1000여 개를 넘을 것으로 보며, 전국적으로 연간 9000여 개 기업에 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들의 예상대로라면 일본은 2014년 이후 9년 만에 다시 도산기업수가 9000대로 올라선다.
물가인상률 따라잡지 못하는 실질임금인상률
유례없는 지원책을 폈고 지금도 각종 혜택을 주면서 기업을 도산시키지 않으려 하는 가장 큰 이유는 '고용' 때문이다. 회사가 파산하면 종업원들은 실직하며, 그에 따른 사회보장예산이 큰 폭으로 늘어난다.
또한 기업의 도산은 파급효과를 일으킨다. 중견기업의 경우 그와 거래하던 다른 영세기업과 중소기업도 위험해진다.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정부 예산이 더 들어갈 것으로 예상됐기 때문에 이러한 시책을 폈던 것이었다.
하지만 지난 2년,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역대급 물가 상승과 기록적인 엔저 현상이 찾아왔다. 실제로 사이타마 지역에서 금형 공장을 20년째 운영하는 사이토 히로시 씨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이대로 가다간 올해를 못 넘길지도 모르겠다"라며 이렇게 덧붙였다.
"우린 공장이니까 전기를 많이 쓰는데 (전기요금이) 한 15%는 올랐고, 수입하는 원자재 값이 30% 정도 올랐나? 그렇다고 엔이 올라갈 기미는 없고… 결국 다른 분야로 눈을 돌려야 하는데, 그럴 돈도 힘도 없고 은행도 더 이상 대출 힘들다 하니까 결국 사업 접으란 소리지."
수출 대기업은 엔저 현상으로 인해 연일 최고 실적을 기록하고 있지만, 일본에서 수출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30%에 불과하다. 즉 대다수의 기업과 중산층 이하 서민들은 물가 상승으로 인해 타격을 받고 있다. 하지만 실질임금인상률은 물가인상률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2022년 4월 1일부터 '임금인상 촉진세'라는 제도를 도입해 정부 차원에서 임금 인상을 독려했다. 종업원 급여를 3% 이상 올릴 경우 증가액의 15%를 법인세에서 공제해 준다(4% 인상은 25% 공제).
하지만 이 제도는 대기업에 한정되었다. 또한 설령 이렇게 임금을 올렸다 하더라도 물가인상률에 비한다면 턱없이 부족하다. 총무성 통계국이 발표한 지난 9월의 물가인상률 통계를 보면 식료는 전년도 대비 8.8%p 상승했고, 가솔린 8.7%p, 면류 10%p, 과자류 11.6%p, 전기 24.6%p, 가스 12.5%p 등 실생활 관련 물가상승률은 실질임금인상률보다 두 배 이상 높다.
▲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2일 도쿄 총리 관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기시다 총리는 이날 가처분 소득을 뒷받침해 경제를 선순환시키겠다는 목표로 소득·주민세 감세를 골자로 한 경제 대책을 발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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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후생노동성 '매월노동통계조사'는 "기본급과 잔업수당을 합한 현금 급여총액은 평균 27만 9304엔(242만 1677원)으로 작년 9월에 비해 1.2%p 증가했으며 21개월 연속 플러스를 달성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 수치는 물가상승률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후생노동성 역시 조사 마지막에 "춘투의 영향 등으로 임금은 올라갔지만 고물가 상황이 계속되고 있어 실질임금은 마이너스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10월 이후 최저임금이 상향 조정되므로 이후 상황을 주시하고 싶다"라고 썼다.
임금소득자 개인 입장에선 생활하면 할수록 적자란 뜻이다. 기업도 당연하다. 게다가 기업은 2~3년 전 빌린 제로제로 융자라는 거대한 빚까지 있다. 이런 상황에서 소비자는 적자 폭을 해소하기 위해 절약할 수밖에 없다. 재화 및 서비스가 팔리지 않는다. 외식을 줄이고, 관광을 안 가며, 오락을 즐기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파친코 빅3 가이아 그룹의 파산도 사람들이 오락이나 취미 생활을 할 여유가 없다는 뜻이다. 원자재를 수입하는 기업은 설상가상이다. 기록적인 엔저 때문에 수입하면 할수록 30% 이상 손해 보고 시작한다. 내외적으론 임금을 올리라는 압력을 받는다.
은행 빚도 갚아야 하고, 원자재 값도 치러야 하고, 종업원 임금도 올려줘야 한다. 정작 물건은 팔리지 않는다. 도무지 답이 없는 상황이니 결국 파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악순환을 끊을 고리는 과연 있을까. 역대급 주식시장만으로 높이 평가하기엔 힘든 일본 경제의 속내, 빈익빈 부익부의 양극화 현상을 '새로운 자본주의' 기치를 내 건 기시다 내각이 풀어낼 해법이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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