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상또라이네"…물병도 날아왔다, 도로위 분홍선 만든 사연
나들목·분기점 색칠한 윤석덕 도로공사 차장
올해 추석 연휴 대한민국 구석구석으로 이동하는 사람들이 이만치다. 김용주(48·경기도 고양시)씨도 그중 한 명. 그는 14일 아침 고향인 경북 영주로 떠난다. 국토교통부가 “13일부터 엿새간 하루 평균 616만 명이 승용차로 고속도로를 이용할 전망”이라고 밝혔듯이 김씨도 차를 몰고 중앙고속도로로 접어들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분기점과 나들목에서 여전히 초긴장 상태로 차로를 바꿀 것이다. 김씨는 “나 같은 ‘길치’에겐 그나마 노면 색깔 유도선이 구원의 손길처럼 느껴진다”며 “누가 설치했는지 상이라도 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김씨와 같은 길치들에게 ‘구세주’로 불리는 이는 윤석덕(53) 한국도로공사 차장이다. 윤 차장은 지난 5월 ‘노면 색깔 유도선’을 만든 공로로 국민 추천을 통해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그는 지난해 4월부터 아프리카 섬나라 모리셔스에 지사장으로 파견돼 있다. 한국도로공사가 맡은 현지 도로와 교량 유지·관리를 총괄하는 역할이다. 김씨처럼 자칭 타칭 길치 다섯 명의 물음을 기자는 전화와 줌으로 전달했고 윤 차장이 이에 답했다. ‘윤 차장과 길치들과의 간접 대화’는 이렇게 시작됐다.
현재 아프리카 모리셔스 지사장 근무
Q : 길치들의 구세주로 회자되더군요.
A : “어이쿠, 구세주라뇨. 누구나 길치가 될 수 있어요. 운전 중에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요. 저도 서해안고속도로 안산분기점에서 제대로 못 빠져나가 둔대분기점까지 갔을 정도입니다. 그런 길치 경험이 유도선을 만든 이유 중 하나였죠. 알게 모르게 저도 절실했던 겁니다. 안산분기점 교통사고가 직접적인 계기가 됐지만요.”
Q : 저도 그곳에서 헤맨 기억이 있습니다.
A : “2011년 3월 안산분기점 4차로에서 왼쪽 강릉으로 향하던 화물차와 1차로에서 목포 방향으로 가던 승용차가 나란히 경쟁하듯 달렸어요. 승용차는 속도를 내서 빠져나갔지만 화물차는 콘크리트 벽에 부딪혔죠. 남성 운전자가 사망했습니다. 도로공사 수도권본부(현 서울경기본부) 군포지사장님이 대책을 마련하라고 제게 주문하더군요. 초보자도 알 수 있게요. 그런데….”
윤 차장(당시 과장)은 막막했다. 지사장의 ‘초보자도’를 ‘초등학생도’로 잘못 알아듣기도 했다. 마침 당시 초등학생이던 딸과 아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알록달록하게. 그 ‘알록달록’이 순간 머리에 스며들었다. 윤 차장은 이를 “실타래처럼 엉켜 있던 게 스파크처럼 튀었다”고 표현했다.
Q : 분홍색과 녹색 유도선의 탄생이었군요.
A : “네. 여러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선 흰색·파란색·노란색·빨간색·주황색은 기존 도로에 쓰던 색이라 피해야 했습니다. 둘째, 당시 친환경을 표방한 ‘녹색 고속도로’ 개념이 확산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성별에 따른 단순한 색깔 구분이란 비판이 있을 수 있겠지만 유도선 구분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안산분기점 사고 당시 여성이 몰던 승용차가 빠져나간 우측 도로를 분홍색으로, 남성이 운전하던 화물차가 가려던 좌측 도로를 푸른 계열의 녹색으로 정했습니다. 그런데….”
윤 차장은 다시 ‘그런데’라는 접속사를 썼다.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 같은 험난한 뒷얘기라는 신호다. 그는 “분홍색을 쓰면 ‘또라이’라는 비난을 받게 되지 않을까 걱정부터 되더라”며 말을 이었다. “더욱 염려되는 건 그런 색을 쓰는 게 당시엔 ‘불법’이었어요. 노면에 색깔을 입히면 사고 예방이 아니라 오히려 사고를 유발할 수 있다는 말도 나왔고, 사망사고가 또 나오면 책임질 거냐는 주위의 우려도 컸죠.”
Q : 그래서 결과는요.
A : “정말 ‘또라이’ 소리 안 들으려고 처음엔 분홍색 대신 주황색을 택했습니다. 그런데 주황색은 중앙선 침범 금지 등 규제 메시지가 강해 망설여지더라고요. 우여곡절 끝에 적극행정면책제도를 활용해 경찰의 승인을 받은 뒤 2011년 5월 3일 안산분기점에 최초의 유도선을 그리게 됐습니다. 주황색에서 처음 생각했던 분홍색으로 바꾼 건 그 며칠 전이었죠. 분홍색을 안 쓰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어요. 색칠 작업을 맡은 고속도로 시설물 유지·보수업체 소장이 ‘어차피 도로에 색칠하는 게 튀는 일이니 또라이가 되려면 상또라이가 되라’고 ‘응원’해준 것도 큰 힘이 됐고요.”
Q : 민원도 상당했을 것 같은데요.
A : “지금은 노면 도색을 할 때 차량에 달린 스프레이로 쫙쫙 뿌리면 됩니다. 하지만 당시엔 분기점 주변 1.5㎞를 막고 롤러로 미적미적 칠하니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물병이 날아오기도 했습니다. ‘너 때문에 내가 바이어랑 약속이 깨졌다. 책임질 거냐’며 목포에 도착할 때까지 3시간 가까이 스피커폰으로 욕한 분도 계셨어요.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습니다.”
Q : 어떻게 응대했나요.
A : “제가 직접 ‘나중에 보세요. 좋아하실 겁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2011년 안산분기점을 시작으로 이듬해 판교분기점 등 2014년까지 고속도로 10여 곳에 색깔 유도선이 그려졌다. 이후 2011~2014년 유도선이 그려진 고속도로 분기점·나들목의 교통사고는 27%나 줄었다. 2018년엔 서울시 평면 교차로에도 도입했다. 서울대 연구진은 2019~2021년 색깔 유도선이 그려진 서울시 23곳의 사망 및 중상자 수가 설치 전에 비해 무려 43% 감소했다고 발표했다. 현재 색깔 유도선은 고속도로에 676곳, 일반국도·지방도 등 전국의 모든 도로를 합하면 1000여 곳에 그려져 있다.
그렇다고 유도선이 만능은 아니다. 지난해 2월 서해안고속도로 무안·광주분기점에서 유도선을 놓친 60대 여성이 사망 사고를 냈다. 순간적으로 놓친 분기점으로 되돌아가려고 후진했는데, 뒤에서 오는 차가 미처 피하지 못하고 충돌해 50대 운전자가 사망했다.
Q : 색깔 유도선이 사고를 줄이는 효과가 있습니다만, 그래도 사고가 나긴 합니다.
A : “유도선은 그야말로 유도선입니다. 규제하는 선이 아닙니다. 옆구리를 쿡 찔러 그쪽으로 가게 하는 거죠. 순간적으로 잘 파악해야 하는데 인지가 안 됐을 땐 혼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최훈 한림대 심리학과 교수는 “뇌의 해마 속 신경세포 중 하나인 장소세포는 공간을 인식하고 기억하는 역할을 하고, 또 다른 신경세포인 격자세포는 공간과 거리 감각을 제공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며 “이른바 길치라고 하는 이들은 이런 세포들이 활성화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게 과학계의 가설”이라고 밝혔다. 2014년 노벨 생리의학상도 이 세포들을 연구한 학자들에게 돌아갔다.
“나도 길치, 안산분기점 놓치기도”
Q : 요즘은 지하철역에도 유도선이 있더군요.
A : “자동차공업사에도 대형차는 녹색선으로, 소형차는 분홍색선으로 가라고 표시해 놨더라고요(웃음).”
Q : 특허를 내지 않으셨다면서요.
A : “네. 내지 않은 게 아니라 못 낸 거죠. 불법이었는데 특허가 가당하겠습니까.”
Q : 불법 문제는 해결됐습니까.
A : “네. 추석 연휴 교통 체증이 뻥 뚫린 것처럼 속 시원합니다. 2014년 도로공사가 내부 방침으로 공식 인정한 데 이어 2017년 국토부가 ‘노면 색깔 유도선 설치 매뉴얼’을 내놨습니다. 이후 2021년 드디어 도로교통법으로 법제화됐고요. 안산분기점에 색깔 유도선을 그린 지 10년 만이었죠.”
Q : 국민훈장을 받으셨는데 누가 가장 좋아하던가요.
A : “물론 가족입니다. 모리셔스에서 귀국해 아내에게 행사장에 같이 가자고 했더니 ‘내가 왜 거기에 가냐’며 빼더군요. 그런데 정작 현장에선 셀카도 계속 찍고 제일 기뻐했어요.”
윤 차장은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으러 귀국한 김에 건강검진을 받았다. 방광에 악성종양이 의심됐다. 수술에 들어갔다. 다행히 양성으로 판정받고 수술 사흘 만에 모리셔스로 돌아갔다. 그는 “정말 큰일 날 뻔했는데 국민 여러분의 추천으로 훈장을 받으러 갔다가 내가 살았다”며 고마워했다.
Q : 색깔 유도선을 보면 어떤 마음인지요.
A : “제 새끼들 같아요. 또 운명 같달까요. 대학도 처음엔 전자공학과에 들어갔다가 반수를 해서 토목공학과로 갔는데, 전공을 안 바꿨으면 도로공사도 가지 않았을 거고 유도선도 태어날 수 있었을까 싶고요.”
Q : 추석입니다. 모리셔스에도 보름달이 뜰 텐데 소망이 있다면요.
A : “추석 연휴 기간 모든 운전자분이 색깔 유도선을 따라 부디 안전운전하시길 바라는 마음이 가장 큽니다. 고향길 가시는데 다치지 않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잖아요. 또 하나, 이곳 모리셔스가 유도선 2호점이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길은 많을수록 좋은 거잖아요.”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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