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득권화된 실리콘밸리 정치권력이 접수
정치적 전향이 규제산업 금융회사 생존전략
트럼프의 신념과 게이츠의 가치 조화 어려워
‘오만은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할 수 없게 하고, 편견은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게 한다.’ 영국 소설가 제인 오스틴의 명언이다. 오만은 내게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을 밀어내고, 편견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다가설 수 없게 한다. 오만과 편견은 고립과 불행을 낳는다. 국내외 도처에서 목격되는 대부분의 비극은 오만과 편견에서 비롯됐다.
민주국가에서는 선거로 정권이 바뀐다. 전체주의 독재국가도 권력의 연속성은 보장되지 않는다. 정치권력이 만들어내는 정책은 시대적 요구와 집권세력의 신념에 따라 바뀐다. 하지만 기업은 정치지형과 무관하게 장기적으로 독자생존을 유지해야 한다. 기업에는 정치적 신념보다 비즈니스의 지속가능성이 더 중요하다.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을 맞아 실리콘밸리 빅테크 기술자본과 글로벌 금융자본이 심하게 친트럼프로 ‘전향’하고 있다. 트럼프의 줄 세우기에 아직 편승하지 않은 실리콘밸리의 대표 기업가는 빌 게이츠다.
최근 게이츠는 자서전 ‘소스코드:나의 시작’ 출간에 앞서 진행한 언론 인터뷰에서 "실리콘밸리는 항상 중도좌파라고 생각해왔는데 우파그룹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말했다. 실리콘밸리는 자유와 혁신의 진보적 가치를 토양으로 성장해온 것이 사실이다. 전통을 중시하고 지킬 것이 많은 보수주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트럼프 시대의 실리콘밸리는 이미 거대자본이 된 빅테크가 기득권을 지키는 쪽에 승부를 걸었다. 실리콘밸리가 진보적 가치를 중시한다는 것은 게이츠의 편견이다. 편견은 실리콘밸리가 전향한 이유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게 한다.
게이츠는 지난 2021년 출간한 ‘기후재앙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에서 지구 표면온도를 식히기 위한 ‘넷제로’ 달성의 필요성을 절절히 설파한다. 넷제로’는 탄소배출량을 모두 흡수해 순증가를 제로로 맞추는 것이다. 분출된 온실가스의 20%는 1만년 후에도 대기권에 계속 머문다고 한다. 화석에너지에 의존하는 지구공동체의 생존질서를 바꾸는 아주 장기적 과제에 도전하는 것이다. 패러다임 전환은 기존의 질서와 충돌하고 기득권층과의 갈등도 불가피해진다.
트럼프와 민주당이 가장 극명하게 대립하는 정치적 가치가 ‘기후변화 대응 이니셔티브’다. 트럼프는 기후대응 프로젝트를 사기라고 주장한다. 2017년 6월1일 트럼프는 백악관 장미정원에서 ‘파리기후변화협정’ 탈퇴를 선언했다. 그는 "미국에 경제적 부담을 지우면서 중국, 인도 등 다른 나라가 경제적 이득을 챙겨간다"고 비난했다. 이후 2021년 조 바이든 대통령 취임 퍼포먼스는 파리협정 재가입이었다. 지난달 20일 백악관에 재입성한 트럼프는 취임 즉시 파리협정 재탈퇴에 서명했다. 세일가스회사 리버티에너지의 크리스 라이트 회장이 에너지부 장관 후보자가 됐다. 전 지구적 기후위기를 음모론으로 치부하는 트럼프의 오만에 적응하지 못한 기업은 비즈니스를 계속하기 어렵다.
금융의 핵심 기능은 산업 구조조정이다. 성장이 필요한 곳에는 자금을 공급하고, 가치창출을 기대할 수 없으면 자금배분을 조절해 퇴출시킨다. 국제금융센터(2025.1.21)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트럼프가 대선에서 승리한 후 미국 6대 대형은행이 ‘넷제로은행연합(NZBA)’에서 모두 탈퇴했다. 지난해 12월 골드만삭스, 웰스파고, 뱅크오브아메리카, 씨티그룹이 이탈했고 올해 1월에는 모건스탠리와 JP모건이 떠났다. 대통령, 의회, 주정부 등 미국 정치지형이 공화당 중심으로 기울면서 불가피하게 선택한 은행의 생존전략이다.
지난해 12월 공화당 하원 법제위원장인 짐 조던은 금융계가 ‘기후 카르텔’을 구축해 기업에 ‘환경·사회·지배구조(ESG) 목표’를 강요하는 ‘반경쟁적’ 행위를 저질렀다고 비난했다. 미국 금융기관이 안티넷제로(Anti-Net Zero)로 전향한 것은 화석에너지 자본을 포함한 트럼프 진영이 정치권력을 장악한 결과다. 트럼프의 귀환은 소위 ‘깨어 있는 자본주의(woke capitalism, ESG경영)’에 대한 무차별 공세를 예고한다. 이미 3년 전부터 공화당이 장악한 주정부와 의회를 중심으로 반ESG법안 도입이 확산됐다. 반ESG 관련 혐의로 낙인 찍힌 금융사는 공화당이 장악한 주정부와 비즈니스 거래를 할 수 없다. 정치지형은 금융기관의 자원배분과 경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동안 넷제로를 주도해온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이 올해 1월 'NZAM(Net Zero Asset Manager Initiative)’에서 탈퇴했다. 2022년 뱅가드, 지난해 JP모건자산운용, 스테이트스트리트, 핌코 등이 뒤를 이었다. 악사, 알리안츠 등 13개의 미국 보험사는 이미 2023년 'NZIA(Net Zero Industry Act)'를 떠났다. 실리콘밸리에서 중도좌파보다 우파가 득세하고 글로벌 금융회사가 화석에너지 비즈니스로 전향하는 것은 미국의 정치지형 변화에 기업이 적응하는 과정이다. 트럼프의 독특한 정치성향에 편승해 자신의 비즈니스 영향력을 확대하는 일론 머스크 등 실리콘밸리의 거대 기술자본 기업가는 트럼프의 정치적 오만을 더욱 증폭시킨다.
미국 민주주의 상징인 의회에 난입해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주범을 트럼프는 취임 첫날 사면했다. 캐나다를 51번째 주로 편입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파나마운하와 그린란드에 대한 무력점령 위협은 정치적 언동에 그치지 않을 수도 있다. 미국의 저임금 노동시장을 떠받치는 이민자 추방과 글로벌 경제를 초토화하는 관세폭탄은 이미 예고된 일이라 놀랍지도 않다. 트럼프는 대통령직을 이용해 온 가족이 돈벌이를 한다는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정치적 자산을 동원해 직접 만든 밈코인 ‘오피셜트럼프’와 부인이 발행한 ‘멜라니아코인’으로 유권자의 호주머니를 순식간에 털어갔다는 지적에도 묵묵부답이다. 실리콘밸리 거대자본의 요구에 부응하는 자신의 친가상자산 정책을 이용해 트럼프가 밈코인으로 거둬들인 돈이 8억달러에 달한다고 알려진다. 이에 민주당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이 트럼프 밈코인과 관련해 규제기관에 조사를 요청하는 등 정치적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실리콘밸리와 금융사가 트럼프 진영으로 전향하는 것은 당분간 불가피해 보인다. 빅테크 기업은 인공지능(AI), 암호화폐, 자율주행 등 미래 산업에 대한 트럼프의 규제완화에 환호한다. 반독점 혐의로 피소된 구글, 아마존, 메타, 마이크로소프트(MS) 등은 이제 새로운 도전자가 아니라 지킬 것이 더 많은 기득권 세력이 됐다. 규제산업인 금융업은 애초에 정치권력에 맞서면 비즈니스를 하기가 어렵다. 트럼프의 오만과 게이츠의 편견이 해소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허정수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