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연의 K컬처] 부담스러운 추석 내려놔야 가족이 더 애틋해진다
문화로 인해 발생하는 대부분의 제도나 의식은 고유의 의미와 기능을 가진다. 영국의 인류학자 브로니스와프 말리노프스키(Bronislaw Malinowski, 1884-1942)의 한 연구는 문화기능주의(cultural functionalism)의 고전적인 예인데, 간략히 소개하자면 이렇다. 파푸아뉴기니 섬 동남쪽에 위치한 트로브리안드 군도(Trobriand Islands). 이 군도는 큰 원을 그리며 떨어진 여러 개의 작은 산호섬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각의 작은 섬에는 서로 다른 부족이 살고 있다. 흥미로운 전통 하나는 군도 전체를 아우르는 릴레이이다. 목걸이는 시계방향으로, 팔찌는 반시계 방향으로, 한 섬에서 다른 섬으로 조금씩 옮겨진다. 이른바 ‘쿨라(Kula) 원정’.
각 산호섬은 제법 깊은 바다와 강한 파도에 가로막혀 그들 수준의 항해 기술로 이를 헤쳐 나가는 것은 쉽지 않다. 대개 건장한 체격을 가진 남성으로 이루어진 원정대이지만, 여행 중 목숨을 잃거나 돌아오지 못하는 때도 있다. 예물이 얼마나 귀하길래 이렇게 목숨까지 걸어가면서 전달해야 할까. 신기하게도 예물의 재료는 산호섬 어디에나 널려 있는 조개껍데기이다. 그러면서도 죽음을 무릅쓴 원정이 세대를 거쳐 계속되는 데에는 중요한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우선 예물을 받아 의식을 행할 수 있는 자는 부족장 한 사람뿐이다. 무가(無價)의 사물이 실질적으로는 족장의 권위와 위계를 유지하는 장치인 셈이다. 다음은 나눔이라는 행위 자체가 가져다주는 연대감이다. 상징적인 의미뿐이지만 예물을 교환하는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친밀감과 신뢰가 움튼다. 특히 그 상징을 전달하기 위해 감내해야 했던 원정대의 험난한 여정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두 부족 간의 믿음은 깊이를 더해간다. 애틋함은 예물을 받는 쪽보다 이를 선사하기 위해 역경을 이겨낸 이들에게 더 크게 남는다. 관계에 대한 애착은 받는 이보다 주는 이에게 더 강하게 나타난다. 쿨라 원정의 마지막 기능은 감시다. 외떨어져 삶을 영위하는 각 부족민에게 외부 세계에 대한 경계심은 생존을 위한 필수 요소이다. 예측하지 못한 침입으로 부족이 절멸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쿨라 원정은 불확실성을 해소할 기회와 명분을 준다. 이웃 섬에 사는 부족의 동태를 살펴 잠재적 위기를 미리 파악하고 대비할 수 있다.
지난 추석. 필자는 타지에 두고 온 처(妻)를 대신해 추석 전날 처가를 먼저 찾는다. 연휴 전에 빳빳한 현금을 찾아두는 것을 잊은 필자는 출발 전에 계좌이체를 서두른다. 장모님께 사위의 마음을 확인해 보시라는 메시지를 에둘러 써 보낸다. 되는 대로 선물도 챙겨간다. 모름지기 명절에는 두 손에 뭐든 들려 있어야 하는 법이다. 장인어른과 제사음식에 막걸리를 몇 잔 마시고 잠자리에 든다. 항상 살갑게 대해 주시던 장인은 요새 말이 없으시다. 이역만리에 금쪽같은 딸을 두고 당신 앞에 홀로 앉아 웃고 있는 사위를 보는 것이 마뜩잖을 터이다. 이른 새벽 아버님과 함께 제사를 지낸다. 처제가 오후나 되어야 시가에서 돌아오니, 차례 때 처가에 함께 있어 드리는 것이 그나마 필자가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이다.
바로 차를 몰고 본가로 간다. 두 손은 장모님께서 싸주신 보따리로 가득하다. 계좌이체는 오후에 한다. 차례가 시작된다. 드디어 근로소득을 잃은 노인 남성이 잠깐이긴 하지만 꺼져가는 희미한 권력에 불을 밝힌다. 곶감과 산적, 나물 등 갖가지 제사음식을 어디에 놓아야 하는지, 언제 절을 합동으로 하는지, 식구 중 누구까지 감히 조상께 절을 올릴 수 있는지, 어떤 기도문을 언제 읽는지 모두 이 노인이 정하는 대로다. 인터넷에 올라온 상차림 법이나 차례 순서를 정석(定石)이라 들이밀어 보았자 소용없다. 화투에서처럼 차례 법도 집집마다 조금씩 다른데, 억울하게도 우리 집 고유의 차례 법은 오직 이 노인의 머릿속에만 존재한다. 주자학(朱子學)적 전통이 현대 한국 노인에게 남긴 작은 선물이라고 할까.
오후에는 누이들이 온다. 서울의 여느 가족처럼 물리적으로 가깝긴 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이해관계에 얽혀 있지 않는 한 자주 만나지 않는다. 추석이나 되어야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하고 서로의 안부를 확인한다. 안부 인사는 주로 외모에 대한 어색하면서도 실없는 칭찬으로 시작하지만 곧 수위가 올라간다. 배우자의 승진이나 벌이, 자식의 취학과 진로, 아파트와 주식 등에 대한 더 사적인 이야기가 걱정과 위로, 자랑과 겸손, 칭찬과 부러움의 경계를 수시로 넘나들며 이어진다. 부모자식과는 다르게 자식들 사이에는 모순이 존재한다. 같은 뱃속에서 나온 한 핏줄이건만 상대의 성취를 그저 내 일처럼 기뻐해 줄 수만은 없는, 친근함 속에 경쟁이 섞여 긴장이 계속되는 관계다. 특히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상대적인 언어로 자신을 규정하고 평가하는 성향이 강한 한국인에게 내 누이와 동생의 사회경제적 좌표를 확인하는 의식은 거의 본능적으로 이루어진다.
서로 돈봉투를 건네며 명절은 막을 내린다. 봉투 안에는 숨은 권력자의 의식을 거친, 그것만 아니면 너무도 흔해 빠진 무가의 종이 위에 숫자가 적혀 있다. 숫자가 클수록 마음도 크고, 커다란 마음이 오갈수록 기분도 좋아진다. 사실 들고 난 숫자들을 모두 더하고 빼고 나면 크게 남거나 잃는 것이 없다. 어떨 때는 이 의미 없는 의식을 왜 계속해야 하는지 의아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가족에게는 무언가를 주고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할 따름이다. 예물의 물리적 가치보다는 이것이 오가며 서로에게 느끼게 되는 마음, 애틋함, 배려, 미안함과 고마움 등 복잡다단한 감정을 공유하는 것이 이 이벤트의 주목적이다. 따라서 이러한 의례는 사회의 기본 단위인 가족의 유대감을 유지시키는 순기능을 갖는다.
트로브리안드 군도 부족민들의 쿨라 원정과 한국인의 추석. 인류의 문화가 환경적 특성에 따라 매우 다르게 보이기도 하지만, 거기서 파생되는 제도와 의식을 해체해 보면 이렇듯 인류 공통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도록 의도된 기능이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들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현재의 우리에게도 위계와 질서, 주위 사람들에 대한 지식, 공동체 내의 신뢰 구축은 여전히 중요한 가치임을 알 수 있다.
문화 보편성의 더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행동 유발이다. 명절이란 생업으로 바쁜 현대인들로 하여금 이날만은 함께 모여 차례를 준비하고 나눔을 행함으로써 조상과 가족을 기억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물론 사랑하는 마음에서 베푸는 때도 있지만, 나눔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사랑하는 마음도 자란다. 노부모의 팔순 잔치 때 눈물을 흘리거나 목이 메는 쪽은 부모보다 주로 부족한 여건에서 어렵게 행사를 준비한 자식일 때가 많다. 부모를 사랑해서 준다기보다, 주다 보니 애틋함이 깊어지는 것이다. 특히 그 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어려움과 인내가 클수록 더 그렇다. 우리의 명절과 각종 기념일은 이렇듯 행동이 친사회적 태도를 유인하도록 고안된 장치이며, 이는 범(汎)문화적 현상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한국의 문화는 이러한 사회적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기 어려운 환경이 되어가고 있다. 한국인에게 명절과 효(孝)는 기쁨과 설렘보다 부담과 고단함으로 다가오는 때가 더 많다. 부모의 입에서 ‘뭘 이렇게나 많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는 되어야 직성이 풀리는 효심 충만한 한국의 아들딸들. 하지만 효도의 방식과 수준이 꾸준히 상향 평준화되면서 견뎌야 할 부담도 더해간다. 작년에는 ‘옵션’이었던 것들이 올해는 ‘디폴트’가 되고, 충족시켜야 할 부모의 눈높이도 따라 올라간다. 부모의 탓이라 할 수 없다. 매년 허리가 휘어져라 명절을 준비한 것은 당신이다. 그 의도 역시 순수한 효심의 표출보다는 부모로부터의 인정이나 과시 등 자조(自助)적인 것일 확률이 높다.
이러한 의식(儀式)은 지속가능성이 떨어진다. 처음엔 명절이 부담스럽겠지만, 곧 그 부담스러움은 부모에게로 옮겨간다. 부담스러운 가족관계는 추석과 같은 일시성 행사로만 국한되어 분절적으로 유지되거나 아예 단절되기도 한다. 특히 ‘효도는 현금으로’라는 공식이 한국에서 이제 일반 상식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이 명제가 참이라면 ‘무전(無錢)=불효’ 역시 참이 된다. 이는 가난한 자식이 자동으로 불효자가 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넉넉지 못한 아들딸에게 효의 실천을 유예해 줌을 의미한다. ‘효도할게요’에 ‘성공하면’ 혹은 ‘돈 벌면’과 같은 조건이 붙는 경우가 바로 여기 해당된다. 부모는 이런 자식의 금의환향(錦衣還鄕)을 기대해 보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들은 원하는 만큼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결국 미안한 마음에 부모와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명절이 오더라도 이런 아들딸들의 얼굴을 보기는 점점 어려워진다.
한국의 명절이 그 순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건 가족 간에 중요한 것은 물리적 가치가 아닌 나눔의 빈도와 자발성이다. 자신의 베풂을 ‘추석이라서’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면 부모에 대한 애정이 깊어질 수 없다. 딱히 왜 그랬는지 스스로도 잘 모를 때에 비로소 베풂의 주체는 내가 되고 마음이 행동을 따라간다. 만남과 나눔은 부담이 적은 관계에서만 유지된다. ‘이번 추석 잘 버텼다’든지 ‘숙제를 하나 해치운 것 같다’는 마음이 남아 있다면, 스스로의 어깨 위에 올린 그 거추장스러운 짐짝을 이제 좀 내려놓으시라.
광운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겸 한국문화데이터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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