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가씨를 만난 건 경주에서였다.
나는 도착한지얼마 안 된 뜨내기 관광객. 내가 도착한 곳은 허름한 모텔과 새 모텔이 사이좋게 나눠 앉은 동네였다.
허름한 모텔이 내 거쳐 였고 그 아래 작은 마을이 있었다.
마을가장자리엔 작은 텃밭들이 햇빛이 비치면 해맑게 웃는 그런 모습이었다.
그러나 보통 가까운 곳에 있는저수지 때문에 안개가 올라오면 온갖 사물이 물기를 머금어 슬픈 소리를 내지르며 가라앉았다.
나는그런 모텔에 자리 잡고 하루를 보냈다. 주인도 지어진 지 정확히 모르는 모텔인데,
그렇게 달력에 그 많은 날의 하루를 내가 표시했다.
창문과 복도, 벽지와 집기들이 세월을 입어 때를 탔고 참 예쁘게 늙어 있었다.
자다가깨면 아마 근엄하게 미소 지어 주실 할머니가 생각났다. 오래된 냄새가 풍겨왔다.
아니면 먼지 냄새일까, 낯선 방에서 깊은 잠이 들면 나이가 들어가는 나도 하나가 될 수 있을까 생각했다.
문뜩 타자에 대한 향수가 몰려왔다. 홀로 있기 위한 여행에서 그리움을 더 느꼈다.
이 순간을 버리고그리움을 손잡아 사람을 향해 떠나면 고독하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도 원하지도 않았다. 아무것과 아무나 연결되지 않은 장소를 원한 것은 나 자신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씻을 수 없는 피로감과 장래에 대한 압박감을 느끼고 있던 시절이었다.
내 뜻과는 다르게 전달해지는말과 시끄럽게 울리는 자동차와 핸드폰의 소리들 불쑥 찾아와 아무 말이나 던지는 방문객.
어디서나 분주한일들의 땅… 그 괴로움을 피해 단 하루라도 나를 고이 담아 보관하지 않으면 내 속의 것들이 도시의 소음처럼흩어져 없어질 것만 같아서 나를 격리시키고 싶었다.
이곳에 도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낯선 곳에혼자 있으니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다.
잔뜩 챙겨간 책을 아침저녁 네 다섯 시간 읽어도 시간이 남아있었다.
충분히 시간을 사용할수 있었고 내가 함부로 보내 버린 말과 생각을 그리고 정리해버렸던 일을 다시 생각할 수 있었다.
새벽이면나는 모텔 앞에 세워진 주인장의 자전거를 빌려 타고 저수지에 나갔다.
해가 솟아오르는 직전의 시간 주위엔모든 것들이 테두리에 쌓여 단정하게 보였다.
칠 흙 같은 암흑이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사물의 모습은 산속의 무서움보다 무엇을 담고 있을까 호기심을 더 일으켰다.
해가 떠오름과 동시에 저수지의 안개가 솟아오르면
폐에 물이 차는 것처럼 답답하기도 했지만 세상에 완벽히 숨을 수 있는 곳은 이곳뿐이라는 안도감을동시에 주기도 했다.
누군가 같이 오고 싶어 하는 곳은 아니겠지 싶으면서도
같이 올 누군가 있다면 어떨까 생각되면 마음이 물끄럼해지기도 했다.
시간이흐르자 이곳에서 맞이하는 일요일엔 한낮에도 저수지에 나갔다.
일요일엔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가족단위로 오는 사람들, 홀로 오는 사람
각각의 여러 사람들은 각자의 이야기와 추억을 풀어놓고 있었다.
물고기를 잡는 것이 목적이아니라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 목적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그곳에 물끄러미 서서 일요일 오후를 보냈다. 사람들을 피해온 곳에서 사람을 그리워할 때 그 마음을 달랠 수 있는 그런 일요일 오후를 보냈다.
떠나야 그리워지는 이치를 느꼈다.
어느 일요일의 해 저물녘에 저수지먼 곳에 있는 작은 섬에 나가보고 싶었다.
작은 배들이 저수지 낚시터에 나가고 싶은 사람들을 싣고 나갔다 들어오곤 했으나 그 시각에 낚시터가 아닌 좀 더 안쪽으로 더 들어가야 하는 곳 섬에 나가보고 싶어 하는 이는 나뿐이었다.
배 주인은 돈을 많이 내라 했다. 이곳에선 돈을 쓸 일이 없기 때문에 나는 돈을 조금만 가지고 나와 그럴 수가 없었다.
동전까지 다 털어도 한참 모자랐다. 카드는 안 받는지 우스갯소리로 물었을 때 내게 다가온 게 그녀였다.
그녀는 끌고 오던 자전거를 세워놓고 함께 배를 타자고 했다. 그러면 돈을 반절 씩만 내면 되는 거였다.
그이와 내가 돈을 모아서 배 주인에게 주자 통통거리며 배가 출발했다.
그녀는저기에 앉고 나는 여기에 앉아 물살을 가르며 펼쳐지는 풍경을 쳐다보았다.
저수지에 있는 그곳은 삼각지라고 하기엔 컸고 사실 섬이라고 부르기엔 턱없이 작았다.
저수지의 물내음이 코를 휙휙 풍기고 지나갔다.
각각 다른 곳을 바라보고있던 나와 그녀는 어느 순간 저수지를 물들이는 노오란 지는 노을빛에 둘 다 감탄사를 짧게 내뱉다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물끄러미 수줍게 웃었다.
웃는 아가씨의 얼굴과 마주하는 순간 내 가슴이 설레었다. 그 순간봄이 온 듯싶었다.
피부는 밝고 우유빛깔 같았으며 머리카락은 풍성했고 목선이 한 폭의 수묵화처럼 단아했다.
자연스럽게 손을 잡아보고 싶은 친근감이 들었다. 사람에게 관심이가니 좋아지게 되고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 야속하기도 했다. 그런데 밝게 웃던 그녀의 눈에 갑자기 눈물이고였다.
나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외면했으나 우리가 서로 숨기기에는 너무 가까이 있었다.
울어도될까요?
나는당황해서 고개를 과장되게 끄덕였다.
그녀는 목놓아 울었다. 울려고 배에 탔나 싶었다. 그녀의 울음소리가고요한 공간에 파문을 일으키듯 퍼져 나갔다.
배가 나아가는 소리, 간혹가다 새가 우는소리 사이사이로 그녀의 울음소리가 섞여 들어갔다.
울고 있는 그녀는 동이 트기 시작했을 때 온갖 사물을 물기를 머금어 가라앉아 그리움을 소리치는 물 안개와 같았다.
나도 이유 모를 그녀의 슬픔에 한껏 취했다.
배가 다시 섬 주변을 돌아서 우리가 출발한 저수지 둑으로 돌아올 때까지 나는 숨죽여 우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배에서 내렸을 때 어두워진 저수지엔 아무도없었다.
나와 그녀는 서로 자전거를 끌고 같이 걸었다.
서울에서 충동적으로 내려왔으며 그날까지 이틀 동안 걷기와 자전거 빌려 타기를 반복하며 경주를 돌아다니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자신도 경비를 제대로 챙겨 떠나오지 않아 배에서 돈 때문에 쩔쩔매는 나를 보고 동질감을 느꼈다고 했다.
여행경비 문제로 바로 오늘 서울로 갈까 하룻밤 자고 갈까 고민 중이라고 했다.
나는 그녀가 마을에 사는 주민인줄 알았지만 그러기엔 뭔가 세련된 느낌이 있기도 한 것이 맞다 싶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 그녀는 결심한 듯 그날은 내가 있는 동네에서 묵을 생각이라며 마땅한 숙소를 물었다.
나는 그제야 전주에서 왔으며 벌써 오래 여기에서 묵고 있으니 허름하긴 하지만 모텔 근처에 있는 백반 집에서 밥을 사면 내방에서 이상한 사람 아니고 이상한 짓 안 하니 여행경비도 아낄 겸 재워주겠다고 했다.
어디서 나온 용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좀 더 같이 있고 싶다는 욕심에말을 내뱉고 나서 아차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했다.
왜울었는지 그런 거 묻지 않으면 좋지요!
묻고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냥 좀 더 서로의 시간이 같이 흐른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우리는 허름한 모텔과 동네 곳곳에 어둠이 깃드는 걸 창문 밖으로 가끔 쳐다보며 식당에 마주 앉아 밥을 먹었다.
각자의 빌린 자전거를 돌려주고 나서 낯선 마을을 한 바퀴 빙 돈 다음에 숙소로 돌아왔다.
어색한 시간이흐르고 잠결에 깨어보니 그녀가 내 쪽을 향해 얼굴을 두고 자고 있었다.
좀 더 떨어져 자고 있다고 생각했던그녀가 가까이 있어서 놀랐지만 곧장 앞에 보이는 눈코입이 반듯하고 이마가 깨끗한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나도모르게 그만 얼굴을 한번 만져보려 다가 깜짝 놀라 그만두었다.
그리움이 그녀 덕분에 그날은 자리를 떠나서였을까. 그곳에 온 후로 가장 깊은 잠을 잤다.
새벽에 깨어보니그녀는 가고 없었다.
메모 한 장 없었다. 그녀가 여기 있었다는흔적이 하나도 없었다.
여기서 보낸 매일 그랬던 것처럼 모텔의 눅눅한 먼지 냄새만 옅게 맡아졌다.
로비에 나가볼 생각으로 양말을 신고 웃옷을 입고 나가려 다가 뒤돌아보았다.
그녀가누워 있던 잠자리의 베개와 시트들이 구겨진 채 한쪽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제서야 그녀가 여기 있다가갔구나 그러면서 아직 거기에 누군가 누워 있기라도 한 듯 나는 다시 침대로 돌아가 걸터앉았다. 고요함이 퍼지고 저수지의 안개가 방안을 가득 채운 느낌을 느꼈다.
사람과 그리움에 대해 생각했다. 그 홀로된 시간을 오롯이 곱씹었다.
내 안에서 인지 내 밖에서 였는지다른 기척이 났을 때까지 나는 그렇게 앉아있었다.
그 순간에 어떤 생각도 감정도 머물지 않았다.
무언가 피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무언가 또 하고 싶은 욕망도 없이 갓 태어난 아이처럼 마음이 텅 비었다.
그리고 난 동틀 녘 안개가 되어 그리움, 외로움, 괴로움 또 알 수 없는 그 모든 것들과 하나가 되어 합쳐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더 이상 저수지에 나가지 않고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침대 밑에서 가방을 꺼내 짐을 쌌다. 그리고 쪽지를 하나 남겼다.
그리운 건 잘 보내 줬나요. 거기서 떠나요. 나도 잘 떠났으니,
연애썰 푸는 시간 같아서.
연애는 아니지만
쏠로 10년을 넘긴 명박이의 유일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