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 감독이 그려낸 청춘의 이별, 이토록 현실적이라니
[김동근 기자]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청춘의 사랑은 뜨거운 불과 같다. 한때는 세상을 다 가진 듯 뜨겁게 타오르지만 현실의 찬바람 앞에 꺼져버린 후에는 차가운 재만 남아 아픔을 만든다. 영화 <만약에 우리>는 바로 그렇게 재가 되어버린 시간들을 조용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뜨거웠던 사랑이 현실 속에서 서서히 식어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려내며, 관객들로 하여금 각자의 가슴 속에 묻어둔 어떤 시절을 떠올리게 만든다.
영화는 2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보낸 연인, 은호(구교환)와 정원(문가영)이 현실의 벽 앞에서 어떻게 흔들리고 무너져가는지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좋아한다는 마음 하나면 충분할 줄 알았던 순수함이 경제적 문제와 불투명한 미래라는 거대한 파도에 부딪혀 깨지는 과정이 익숙해서 오히려 아프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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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만약에 우리> 장면 |
| ⓒ ㈜쇼박스 |
하지만 우리 모두가 겪어왔듯, 청춘의 한가운데에는 늘 불안이 자리하고 있다. 마치 해결하지 못한 거대한 과제가 주어진 것처럼, 두 사람의 마음 한구석은 늘 무겁다. 은호와 정원 모두 어떤 사람이 되겠다는 목표가 있지만, 그것을 상대방에게 쉽사리 꺼내놓지 못한다. 현재를 버티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는 시절이기 때문이다. 각자가 진정으로 원하는 욕망을 감추고, 괜찮은 척 웃어 보이는 그 상황 속에 스며든 불안은 서서히 그들의 견고해 보이던 사랑을 흔들기 시작한다.
영화 속 두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떨림이 유독 아름다워 보이면서도 동시에 시리도록 측은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들의 모습이 곧 젊은 시절 우리 자신의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미래를 알 수 없어 서로의 손을 꽉 잡으면서도, 내일이 오는 것이 두려워 잠 못 이루던 그 시절의 우리가 스크린을 통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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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만약에 우리> 장면 |
| ⓒ ㈜쇼박스 |
이러한 상황은 필연적으로 피로의 누적을 부르고, 깊은 무력감을 동반한다. 서로를 향해 웃어주기에도 벅찬 에너지는 결국 날카로운 소음이 되어 상대를 찌른다.
그렇게 그들은 이별을 맞이한다. 사랑은 있었지만, 함께 삶을 꾸려나갈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던 탓이다. 만약 억지로 그 관계를 붙잡고 있었다면, 서로를 갉아먹으며 미움만 남긴 채 끝났을지도 모른다. 영화는 두 사람의 이별이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저 함께 버티기엔 서로가 너무 약했던 시간, 그 불가항력적인 무력감이 만들어낸 슬픈 결말이었음을 조용히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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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만약에 우리> 장면 |
| ⓒ ㈜쇼박스 |
영화가 후회를 강요하지 않는 태도 덕분에, 우리는 굳이 첫 연인의 안부를 찾아보지 않더라도 마음 한편에서 잠시 옛 기억을 떠올리며 그들을 보내줄 수 있게 된다. 그 상대방도 그때보다는 조금 덜 불안한 어른이 되었기를, 그리고 그 시절의 나보다는 적어도 도망치지 않는 사람이 되었기를 바라는 마음. 인연은 끝났지만 우리가 함께 통과했던 그 불안했던 청춘의 터널이 완전히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음을, 영화는 묵묵히 일깨운다.
아픈 기억 위로 피어나는 색깔, 그리고 배우들
이 영화의 감정들은 배우 구교환과 문가영을 통해 완성된다. 그동안 < D.P. >나 <길복순> 등에서 기묘한 악당이나 어디로 튈지 모르는 독특한 캐릭터를 주로 연기해 온 구교환은 이번 작품에서 처음 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가 멜로라는 장르에 이렇게 잘 어울릴 줄이야. 특유의 위트와 리듬감은 살리고, 사랑 앞에서 지질해질 수밖에 없는 평범한 남자의 얼굴을 덧입혔다.
문가영 역시 인상적이다. 아역 출신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팍팍한 서울살이를 견뎌내는 정원 그 자체가 되었다. 아직 문가영이라는 배우의 진가를 모르는 이들에게 보란 듯이 증명하려는 것처럼, 그녀는 꾸밈없고 단단한 생활 연기를 보여준다. 현실의 벽에 부딪혀 무너져 내리는 그녀의 눈빛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관객으로 하여금 그녀를 응원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이 섬세한 감정선을 조율한 것은 김도영 감독이다. 전작 <82년생 김지영>에서 보여주었던, 인물을 향한 따뜻하고도 사려 깊은 시선은 이번 영화에서도 유효하다. 감독은 10년이라는 시간의 간극을 억지로 메우려 하지 않는다. 대신 흑백과 컬러의 대비, 그리고 침묵의 순간들을 통해 관객이 스스로의 기억을 꺼내어 그 빈틈을 채우도록 유도한다.
영화 <만약에 우리>는 원작 영화인 <먼훗날 우리>와 비슷하면서 조금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보여준다. 화려한 기교나 자극적인 사건 없이도 긴 여운을 남긴다. 지금 어딘가에서 현실의 무게 때문에 사랑을 망설이거나, 지나간 인연 때문에 아파하는 이들에게 이 영화를 추천한다. 당신의 불안과 무력감이 결코 당신만의 것이 아니었음을,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지나온 당신은 이제 제법 선명한 색을 띠고 있음을 이 영화가 말해줄 것이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설 때, 문득 올려다본 하늘이 조금 더 맑아 보일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와 개인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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