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서부의 광활한 도로가 나를 불렀다. 인생에 몇 없는 소중한 기회는 굴러왔을 때 잡아야 한다
"미국에서 고장 3일은 너무 아까워!"한국에서 15시간, 비행기를 두 번이나 타고 날아간 미국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돌아오는 일정이 너무 아쉬웠다. 벤틀리 애리조나 출장(지난 1월호에 관련 이야기를 실었다) 이후 남은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지 머리를 굴렸다. '그래, 미 서부 로드트립을 계획하자!' 이번 출장을 담당한 벤틀리코리아 홍보담당자에게 비행 일정을 조율할 수 있을지 조심스레 물어봤다. "재미있는 계획이네요!" 그녀는 흔쾌히 수락했고, 그렇게 나는 자유시간 8일을 따냈다. 직업 정신은 못 버린다고 했나. 휴가를 내고 마냥 놀다 오긴 아쉬워 <탑기어> 독자들에게 소개할 로드트립을 계획했다. 물론 100% 개인 취향으로….
출국에 앞서 해야 할 일은 크게 세 가지다. 경로 파악, 숙소 선정, 그리고 렌터카 예약. 먼저 여행경로를 살폈다. 미국 지도는 아무리 봐도 적응이 어렵다. 지도로 볼 때는 손가락 한마디만 한 구간이 실제로는 한반도 끝에서 끝보다 멀다. 지도 축척쯤은 가볍게 무시하고 경로를 쓱쓱 짜기 시작했다. ‘먼저 피닉스를 출발해 세도나를 다시 들르는 거야(플라잉스퍼 시승 코스 중 하나다). 그리고 조금 올라가면(나중에 알았는데 여기서 조금은 5시간 거리다) 유타주를 ‘찍먹’할 수 있어. 나오는 비행편이 샌프란시스코니까 라스베이거스와 로스앤젤레스, 산호세를 가로질러 향하자!’
이렇게 짠 경로는 약 2000km였다. 일주일 동안 달릴 거리니까 무리는 아니다. 대략적인 이동 시간을 계산해 숙소 위치를 정했다. 처음엔 진짜 ‘모텔(모텔의 어원은 자동차 여행자를 위한 숙소, 모터리스트 호텔이다)’, 미국 영화에 나오는 허름한 숙소를 이용할까 생각했다. 다만, 몇 가지 문제가 마음에 걸렸다. 1) 출국할 때 머무는 곳을 증명하지 못하면 난감할 수 있다 2) 빈방이 없으면 어쩌지? 3) 막상 도착한 모텔이 생각보다 무서운 곳일 수도…. 결국 미리 숙소를 예약하기로 마음먹었고, 에어비앤비를 이용해 깨끗하고 저렴한 곳을 선정했다.
마지막으로 로드트립의 주인공 렌터카. 보통 장기 여행은 주행거리가 길고 짐도 많아 SUV를 선호한다. 하지만 작고 낮은 차를 좋아하는 내게 SUV는 그다지 반갑지 않다. 전기차? 충전소 찾는 일과 주행거리 스트레스, 불안감이 머릿속을 스친다. 결국 포드 머스탱 컨버터블을 골랐다. 미국에 갔으니 미국차를 타보자는 이상한 신념과 오픈카로 장거리 여행을 즐길 기회가 많지 않아 여러모로 매력적인 선택지였다. 렌터카 업체 홈페이지에 안내는 따로 없었으나 아마도 엔트리 4기통 모델일 터다(그리고 예상이 맞았다). 기름통을 게걸스럽게 비울 V8 엔진의 먹성을 상상하니 4기통 모델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피닉스에 도착해 호화로운 벤틀리 출장 일정을 무사히 마쳤다. 목요일 이른 아침부터 벤틀리가 내어준 벤테이가를 타고 피닉스 공항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6만km 가까이 달린 6세대 부분변경 머스탱 렌터카를 수령했다. 차 키를 쥔 기분이 오묘하다.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수 천km를 어디든 자유롭게 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내 뇌는 도파민으로 가득 찼다.
차를 몰고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대형마트 세이프웨이(남은 여정 동안 생필품 보급을 위해 세이프웨이, 월마트, 트레이더 조, 타겟 등을 꾸준히 찾았다). 가장 미국다운 첫 끼를 위해 블루베리 머핀과 불량 과자, 초코바, 스타벅스 커피, 생필품, 생수를 잔뜩 산 다음 머스탱 뒷자리에 던졌다. 나는 2도어 2+2 자동차의 2열 시트를 사랑한다. 평소엔 나만의 작은 짐칸으로 쓰다가, 유사시엔 사람도 태울 수 있으니까. 시트가 아예 없는 2인승 모델보다 훨씬 낫다.
피닉스 시내를 달리며 미국 운전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고 단번에 느꼈다. 낯선 동네, 낯선 도로인데도 교통 흐름을 따라 달리면 우리나라와 운전 방법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대부분 교차로 좌회전은 비보호 신호고, 빨간색 정지 표지판에선 무조건 정지해야 한다는 원칙만 명심하면 쉽다. 수백만 그루 선인장을 뒤로한 채 드넓은 사막을 유유자적 3시간 동안 달려 세도나에 도착했다. 출장 일정을 소화하느라 제대로 감상하지 못했던 광활한 대지와 붉은 바위를 다시금 넋 놓고 바라본다. 여유롭고 편안한 상태야말로 홀로 즐기는 로드트립의 백미다. 세도나 명물 파란 맥도날드에 들러 빅맥 밀(미국에선 세트 메뉴를 ‘밀’이라 부른다) 한 끼를 해치운 뒤 또 다시 발길을 나섰다.
다음 목표인 유타주 빅워터로 향하는 길. 유명 관광지는 아닌데, 미국 4개 주(애리조나, 유타, 네바다, 캘리포니아)에 발을 담글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북쪽으로 향했다. 가는 길엔 영화에서나 보던 긴 도로가 나타났다. 끝없는 지평선을 따라 쭉 뻗은 길을 달릴 땐 ‘내가 정말로 미국에 오긴 왔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여기서 운전을 좋아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성향이 갈린다. 차는 이동수단일 뿐이고, 이동시간이 아까운 사람이라면 좀이 쑤실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처럼 오직 운전을 위해 태어난 사람은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과 식생을 감상하며 드라이브를 즐긴다. 1970~ 1980년대 미국 락 음악을 배경으로 깔면 금상첨화다.
수시로 변하는 배경을 감상하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넘어간다. 하늘은 옅은 파랑, 보랏빛으로 변하더니 이내 강렬한 노을을 발산하며 밤을 맞이한다. 오색찬란 이불을 내려놓은 하늘은 이내 무수히 쏟아지는 별들로 가득 찼다. 별이 너무도 많은 나머지 북두칠성과 오리온자리처럼 익숙한 별자리조차 찾기 힘들다. 맨눈으로 보이는 선명한 은하수는 우주의 깊이만큼 기억에 강렬히 남았다. 유타는 하늘이 곧 휴양지였다.
태양은 해질녘의 역순으로 하늘을 물들이며 활기차게 떠올랐다. 다음 행선지는 컴퓨터 바탕화면으로 유명한 앤텔로프 캐년. 수백 만년 세월 동안 거센 급류가 나바호 사암 바위틈에 스며들어 물결처럼 깎아낸 환상의 협곡이다. 근처 홀스슈 밴드에서는 수십m 절벽을 내려다보며 또 한번 자연의 경이로움을 감상했다. 이곳에서 은근히 시간을 많이 소비해 서둘러 다음 장소를 떠났다.
유타에서 LA로 향하는 경로 한 가운데 라스베이거스가 자리한다. 5시간 이상 운전하는 긴 여정인 만큼, 이때는 틈만 나면 주유소와 마트를 들렀다. 사막을 가로지를 때는 기름 게이지가 절반 밑으로 떨어지면 슬슬 불안하다. 얼마나 가야 주유소가 나올 지 알 수 없기 때문. 장거리를 달릴 땐 연료 탱크를 항상 가득 채우는 편이 낫다.
우연히도, 내 미국 체류 기간이 F1 라스베이거스 그랑프리와 겹쳤다. 관광객이라면 짜증 날 만한 상황이지만(스트리트 서킷 특성상 주요 관광지 대부분을 통제한다), F1 마니아에겐 지나칠 수 없는 방앗간이었다. 즉흥 계획이 많은 로드트립 상 시간 맞추기가 까다로워 티켓은 구입하지 않았다. 실제로 내가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한 날은 퀄리파잉이 열린 토요일 밤 8시. 값비싼 티켓을 샀다면 반쪽짜리 예선을 감상했을 터다. 밤 9시, 숙소에 차를 주차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해 시내로 접근했다. 라스베이거스의 밤은 예로부터 화려했다. 여기에 서킷 조명과 스폰서 광고판, MSG 스피어(매디슨 스퀘어가든 컴퍼니가 3조원을 들여 만든 초대형 원형 건축물로, 외벽 전체를 16K 화질 미디어 파사드로 둘렀다)의 엄청난 아우라가 더해져 비현실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삼엄한 경비 탓에 티켓이 없는 사람은 서킷 안쪽과 F1 경주차를 두 눈으로 보긴 어렵다. 방법이 없을까? 문득 서킷 옆 높이 솟은 대관람차 ‘하이 롤러’가 눈에 들어왔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신용카드가 있으신가요?” 하이 롤러 직원이 대뜸 내게 말을 걸었다. 처음엔 신용카드 회원에게만 티켓을 파는 줄 알았다. “아멕스 카드가 있으면 하이 롤러가 공짜랍니다.” 평소 쓰지 않아 지갑 한구석에 처박혀있던 오랜 신용카드가 구세주처럼 밝게 빛났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이 롤러는 텅 빈 상태였다. 30명은 족히 탈 법한 거대한 관람차를 홀로 대관한 채 라스베이거스의 하늘로 솟아올랐다. 눈 아래 펼쳐진 라스베이거스 시내와 도심 서킷을 따라 빛나는 조명, 호화 호텔과 거대한 스피어…. F1 스트리트 서킷을 편히 감상하도록 우주가 나를 도왔다고밖엔 표현할 방법이 없다. 관람차가 정상에 오를 때쯤 막 Q3가 시작했다. 저 멀리 스파크를 튀며 달리는 루이스 해밀턴의 경주차를 알아보기엔 충분한 거리였다.
꿈의 도시에서 꿈 같은 밤을 보낸 후 로스앤젤레스로 발길을 향했다. 가는 길엔 조슈아 트리 국립공원을 잠시 들렀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일랜드 밴드 ‘U2’의 명반 가 생각나서였다. 독특한 형상의 조슈아 나무가 가득하다. 꼬불꼬불 독특한 가지가 어우러진 풍경은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에 있다고 착각할 법하다. 컨버터블의 진가도 드러났다. 따스한 햇볕과 드넓은 대지, 선선한 날씨에 천장을 접고 달릴 용자가 있을까? 사실, 이전에도 틈만 나면 천장을 여닫기 바빴다. 아무렇게나 셔터를 열면 작품이 나오는 풍경에 질투마저 느꼈다.
조슈아 트리에서 2시간을 더 달려 LA에 도착했다. 우연찮게도 내가 방문한 기간에 LA 오토쇼가 열렸다. 부스 구성이나 체험 행사 등은 우리나라 모터쇼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도 한국에서 만나기 힘든 브랜드와 차종이 많다는 사실이 여러모로 흥미롭다. 테슬라 부스를 방문하니 사이버트럭이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시승해볼래요?” 차 옆을 서성이던 내게 테슬라 직원이 말을 걸었다. “운전면허가 있다면 바로 시승을 도와줄게요.”
밖으로 나가자 사이버트럭 6대가 줄지어 서 있다. 시승 코스나 시간은 매우 짧았지만, 사이버트럭을 직접 몰아봤다고 자랑할 만큼은 달렸다. 간단한 소감은…. 승차감이 이게 최선인가? 언젠가 정식으로 시승차를 받아 테스트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시간 가는 줄 모른 채 반나절이 지났다. 남은 시간은 할리우드 거리와(명성만큼 흥미롭진 않았다), 베벌리힐스, 영화 <라라랜드> 촬영지로 유명한 그리피스 천문대를 둘러보며 LA와 작별했다.
최종 목적지인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길. LA 서쪽 말리부와 산타바바라 등 유명 휴양지를 지났다. 이 구간은 정말 지루하다. 풍경이 시시각각 변하는 애리조나와 달리, 우리나라와 비슷한 바닷가 풍경이 쭉 이어진다. 게다가 630km, 6시간 거리를 달려야 한다. 하물며 이번 여행에서 유일하게 날씨 운까지 따르지 않았다. 지루함과 싸우며 나아갔다. 다행히도 렌터카 머스탱은 오랜 시간 달리며 별다른 말썽을 부리지 않았다. 연비는 1L에 12~14km를 꾸준히 냈다.
우여곡절 끝에 마주한 금문교가 어찌나 반갑던지 고향에 온 기분이었다. 다행히도 샌프란시스코 날씨는 캘리포니아 그 자체였다. 맑고 청명한 하늘을 배경으로 영화 <더 록>으로 유명한 언덕길과 트램, 꼬불길 롬바르드 스트리트가 영화 세트처럼 펼쳐졌다. 시네필이여, 할리우드 대신 샌프란시스코로 오라….
이렇게 7박 8일간 미 서부 로드트립이 끝났다. 트립컴퓨터상으로 2836km, 42시간을 운전했다. 운전을 좋아하고 자동차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꼭 한 번쯤 경험했으면 싶다. 개인적으로 로스앤젤레스나 샌프란시스코보다는 애리조나와 유타의 이국적인 풍경이 더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아, 외로움을 참지 못한다면 반드시 친구를 데려가자.
★ 로드트립 꿀팁
○ 반드시 한국 면허증 실물을 챙겨야 한다. 현지에선 국제면허증보다는 한국 면허증을 먼저 본다
○ 렌터카 수령과 반납을 다른 곳으로 정하자. 먼 길을 돌아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가기엔 너무 멀고 지루하다
○ 사막을 건널 땐 반드시 기름을 가득 채우자. 전화도 터지지 않는 사막 한복판에서 기름이 떨어지면 정말 난감하다
○ 미국은 휘발유가 기본이다. 경유는 아예 팔지 않는 주유소가 많다
★ 여행에 쓴 돈
○ 숙소 1박 15만원×7박=105만원
○ 렌터카 머스탱 컨버터블 680달러(보험료 포함, 100만원)
○ 주유비 1갤런에 4.6달러(6780원), 60갤런(225L) 소모=276달러(40만원)
○ 식대 하루 약 5만원×7박=35만원(※개인차가 큼)
글·사진 권지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