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택가에 떡하니 '황국신민 맹세비', 대체 무슨 사연이?
[심규상 기자]
▲ 청양군 주택가 마당에 서 있는 皇國臣民誓詞(황국신민서사) |
ⓒ 심규상 |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뜻밖의 문구가 써 있다.
크게 가로로 '皇國臣民誓詞(황국신민서사)'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그 아래에 세로에는 일본어로 "1. 우리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입니다. 2. 우리는 마음을 합하여 천황폐하에게 충의를 다합니다. 3. 우리는 인고 단련하여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라는 내용의 맹세문이 새겨 있다. 맨 아래에는 다시 가로로 '황기(皇紀) 2600년 기념'이라고 적혀 있다.
'황기 2600년'은 1940년. 이때 일본 천황 즉위 2600년을 기념해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 청양군 주택가 마당에 서 있는 皇國臣民誓詞(황국신민서사) |
ⓒ 심규상 |
이 맹세문은 아동용과 성인용이 있다. 청양 주택가에 서 있는 맹세문은 아동용이다. 아동용 맹세문은 각 학교에 세워 신사참배 때나 조회, 학교 의식 때마다 제창하게 했다.
어느 학교 운동장 조회대 근처에 서 있던 맹세문이 어떻게 주택가 마당에 서 있는 걸까.
<오마이뉴스> 확인 결과, 이 맹세문은 충남 부여군 은산초등학교 운동장에 있던 것이었다. 돌의 내력을 잘 알고 있는 이종금(72, 삼대한약방 운영)씨를 만나 전후 사정을 들어봤다.
"부여 은산에 사는 농부가 한 명 있어요. 1980년 초께 이 농부가 하는 말이 ' 은산면 나령리 하천에 기이하게 생긴 돌이 있었는데 왜정 때 은산국민학교에서 사람을 시켜 돌을 캐다 운동장에 세워 놓았다고 해요.
그러다 해방이 되자 주민들이 왜놈들이 세운 것이라며 학교 근처 논바닥에 파묻었다는 거야. 그래서 언제 가져와 보라고 했더니 이 농부가 어느 날 돌을 캐서 소달구지에 싣고 여기 청양까지(22km) 가지고 왔어요."
▲ 청양군 주택가 마당에 서 있는 皇國臣民誓詞(황국신민서사) |
ⓒ 심규상 |
"실어온 돌을 살펴보니 '황국신민서사비'예요. 오가는 사람들이 이를 보고 꼴도 보기 싫다고 하기도 하고 그래서 한 때는 시멘트로 글씨를 메우기도 했어요."
황국신민서사비를 비싼 값에 사겠다고 나선 일본인도 있었다.
"1990년 초반인가 중반께에 일본인 몇 명이 청양에 일을 보러 왔다가 황국신민서사비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거야. 그때 돈으로 1000만 원을 줄 테니 팔라고 하는 거야. 큰 돈이었죠. 일본으로 가져가면 어떻게 사용될지 뻔한 거 아니겠어. 일본 사람에게는 절대 못 판다고 했지."
"일제가 어떤 짓을 했는지 교육자료로... 청양군, 둘 곳이 없다며 싫다고"
그는 얼마 전에는 청양군에 이 돌을 기증하겠다며 싣고 가라고 요청도 했단다. 일제의 잔재지만 없애버리기보다는 고통의 역사를 알게 하는 교육 자료로 활용했으면 하는 생각에서였다.
실제 대전 산내초등학교에서 발견된 황국신민서사비는 1997년에 한밭교육박물관으로 옮겨와 야외전시장에 눕혀 교육자료로 사용하고 있다. 대전여고에서 발견된 서사비도 학교 운동장 귀퉁이에 공원을 조성하면서 옮겨와 눕혀 교육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충남 보령시 남포면 월전리 한 농장에서 2012년 발견된 황국신민서사비는 보령문화의전당 야외주차장 옆 잔디밭에 눕혀 놨다.
"일제가 식민 지배에 순응하게 하기 위해 어떤 짓을 했는지를 알게 하는 교육자료로 활용했으면 하는 생각에서 청양군에 연락해 실어 가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청양군에서도 황국신민서사비라 갖다 둘 곳이 없다며 싫어하는 거야."
그는 지금도 황국신민서사비가 교육자료로 활용되길 바라고 있다.
▲ 청양군 주택가 마당에 서 있는 皇國臣民誓詞(황국신민서사) |
ⓒ 심규상 |
"요즘 위안부나 징용을 '자발적이었다'고 강변하는 뉴라이트 단체나 학자들 보면 기가 차요. 우리 아버지도 왜정 때 경찰이 왜 군에 지원하지 않느냐며 당장 지원하라고 강요해 청양 상감리 할머니 친척댁으로 피신을 가 있었어요. 그런데 징병에 응하지 않으면 형제 중 한 명을 대신해 끌고 간다는 거야. 할 수 없이 징병 대신 징용을 간 거예요. 남양군도로 끌려갔어요. 청양에서 41명이 갔어요.
해방되고도 2년인가 3년을 더 지나서야 오셨는데 살아온 분은 20명도 안 돼요. 아버지는 징용으로 몸이 쇠약해져서, 굉장히 오래 앓으셨어요. 당시 살았던 사람들은 다 아는 얘기를 징병, 징용 끌려가 고통받은 분들이 다 돌아가시니까 뭣도 모르는 사람들이 '자발적이었다'고 하는 거지. 참 어이가 없어 말이 안 나와요."
(* 2010년 '일제 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당시 남양 군도에 강제동원된 한인 노무자는 5000명 이상이다. 주로 비행장 건설과 사탕수수 재배에 투입됐는데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는 총알받이, 자살테러, 굶주림 등으로 징용자의 60%가 사망했다. - 기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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