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영화에는 세 가지 변곡점이 있다
[오마이뉴스 김선호 기자]
|
|
| ▲ 영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의 한 장면 |
| ⓒ 전원사 |
최근 십 년 동안 떠오른 장르가 있다. 이른바 '일상물'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 장르는 제목으로도 알 수 있듯 '일상'에 관한 것을 다룬다. 전체적인 이야기가 없고, 작은 이야기가 소소하게 이어지는 것이 특징이다. 갈등이 없고, 있어도 금세 봉합된다. 이러한 설명만 들어보면 재미가 없을 것 같은데, 사람들이 좋아한다.
일상물이라는 단어 자체는 일본 애니메이션계에서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 개념은 영화사 초기부터 있었다. 최초의 영화는 기록의 역할에 충실했고, 고정된 카메라는 사람들의 일상을 담아냈다. 일례로 뤼미에르 형제의 <리옹의 뤼미에르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1895)을 보면 공장 입구에서 퇴근하는 노동자들의 모습만 있다. 흑백에 좋지 않은 화질을 가진 그 영상은 마치 CCTV의 일부를 보는 듯 느껴진다. 당연히 재미가 없었고, 조르주 멜리어스를 필두로 '이야기'를 가진 영화가 하나둘 만들어졌다. 그렇게 영화는 사람들이 '일상'에서 찾지 못하는 것들, 달나라 여행이나 서부개척의 꿈을 안고 부풀어 오르게 되었다.
|
|
| ▲ 영화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의 한 장면 |
| ⓒ 전원사 |
|
|
| ▲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한 장면 |
| ⓒ 전원사 |
이러한 일상물의 유행을 설명하기에 알맞은 감독이 있다. 아마도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일상물'은 홍상수 영화일 것이다. 홍상수 영화는 '기승전결이 명확하지 않고, 여러 에피소드가 모여 하나의 영화를 구성, 영화마다 비슷하지만 사소하게 다른 인물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일상물이다. 그렇지만 홍상수 영화는 순한 맛이다. 홍상수 영화가 한결 같이 우리의 삶에 냉소를 보내고 있다는 점에서 '매운 맛'을 떠올릴 사람이 있을 텐데, 그렇지 않다. 홍상수 영화는 우리의 삶을 거울처럼 보여주고 있기에 '순한 맛'이다. 그 거울 속에서 '뜨끔'한 기분을 느끼면 그때야 '매운 맛'이 된다.
초기 영화에서 그의 인물들은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간다. 하지만 그 목표를 보고도 외면해버리거나, 조심스럽지 못해 파괴해버리고 만다. 데뷔작을 제외한 초기 영화 하나를 꼽자면 <생활의 발견>(2002)이 있다. 그런데 그 영화의 영어 제목은 '회전문을 기억하는 순간'이다. 아마 당신은 한글 제목과 영어 제목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물음을 던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영화에서 주인공 경수는 두 번이나 회전문을 마주한다.
<생활의 발견>을 보고 나면 관객은 '회전문'에 대해 집착할 수밖에 없다. 회전문이 시각적으로 보이니 경수와 뭔가 관련이 있는 게 틀림없다고 여기게 된다. 물론 영화는 자체적으로 하나의 답을 내놓긴 한다. 영화의 일곱 번째 소제목이 바로 '경수가 회전문의 뱀을 떠올리다'이다. 뱀과 회전문의 조합에서 우로보로스를 (뱀 머리가 꼬리를 물어 윤회를 상징)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경수는 같은 자리를 맴돌고 나아가지 못하는 걸까?
|
|
| ▲ 영화 <북촌방향>의 한 장면 |
| ⓒ 전원사 |
<생활의 발견>은 그런 영화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 경수는 아무런 생각 없이 어딘가로 떠나버린다. 계속해서 바뀌는 장소, 하지만 경수는 바뀌지 않는다. 경수는 낯선 여자와 사랑에 빠져 섹스를 했고, 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면서 '괴물은 되지 맙시다'라며 영화 초반에 주워들은 말을 영화 내내 훈계랍시고 늘어놓는다. 경수는 어딘가로 나아가고 싶은 의지가 있고, 그것을 통해 변화하고 싶은 것처럼 보인다. 이때, 그 의지는 경수의 중심을 이루는 축이다. 그리고 회전문처럼 중심축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영영 제자리를 맴돌기만 한다. <생활의 발견>에 마침표를 찍지 않는 한, 경수는 영원히 회전문을 돌 것이다.
홍상수 초기 영화에는 (비유상으로) 그 회전문이 나오고, 인물들은 문의 중심축을 발견하려 한다. 신기하게도 그것이 '결핍'이 아님에도 인물들은 그것을 애타게 찾아 헤맨다. 이미 가진 것을 더 가지고 싶어 손을 내밀다가, 엉뚱한 곳을 만져 화를 입기도 한다(<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재밌는 점은 홍상수의 세계가 이러한 일상성을 줄곧 가져간다는 점이다. 줄곧 가져가는데, 아주 미묘하게 변화한다.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말이다.
홍상수 중기 영화
|
|
| ▲ 영화 <오! 수정>의 한 장면 |
| ⓒ 전원사 |
주인공 성준은 북촌에 사는 선배 영호를 만나려 한다. 하지만 만나지 못하고 방황한다. 그사이에 어떤 무리를 만나 같이 술을 마시다가 도망쳐 나온다. 그리고 술김에 과거에 사귀었던 (우리로선) 여성을 만나 약간의 대화를 나눈다. 이때, 여성과의 대화가 무척 인상 깊다. 성준은 그 여성에게 사랑했던 사이로 남고 싶어 하는 듯하지만, 연락하지 말라며 연락처도 주지 않는다. 그런데, 연락처를 주지도 않으면서 자신에게 연락하라는 듯한 뉘앙스를 준다. 여성은 기다리겠다며 애타게 매달린다.
영화 전체를 보면 성준은 이러한 행동을 여태까지 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으로 보인다. <생활의 발견>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하지만 진행의 방향이 다르다. <생활의 발견>이 맞닿을 수 없던 회전문의 중심을 향하던 영화라면, <북촌방향>은 회전문 밖으로 빠져나오려 해도 금세 되돌아가고 만다. 성준이 연락처를 주지 않은 채 여성과 헤어지는 것은, 아무래도 '누군가의 마지막'으로 기억되고 싶은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
|
| ▲ 영화 <자유의 언덕>의 한 장면 |
| ⓒ 전원사 |
<북촌방향>은 이야기의 시간이 특정 지어지지 않는다. 영화의 전체적인 시퀀스는, 어느 장면을 잘라 어느 장면에 붙여도 얼추 들어맞게 되어 있다. 마치 우리 기억을 헤집어 놓는 것처럼 뒤죽박죽이다. 이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본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삶이기 때문"이라는 뻔한 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 성준은 술자리에서 오랜만에 만난 과거의 누군가와 싸우는데, 사실은 자기 잘못이다.
적어도 영화 속에서 그렇게 묘사되고 있다. 어쩌면 그것이 성준의 잘못만이 아닐 수도 있지만, 성준 자신이 과거에 그랬음을 잊고 있었다는 사실만이 남아있다. 잊었기에 그에게 화를 냈고, 뒤늦게 진실을 알았고, 앞으로의 누군가에게도 그럴 것이다. 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있음에도 늘 새롭고 짜릿함을 느끼는 게, <북촌방향>이 우리에게 주는 일상성의 여지다. 그 속에 후회나 통탄은 없다.
홍상수 말기 영화
|
|
| ▲ 영화 <그 후>의 한 장면 |
| ⓒ 전원사 |
사실 홍상수 영화 전체가 홍상수의 자서전이라고 부를 만큼 자전적이지만, <밤의 해변에서 홀로>는 여배우를 단독으로 내세운 첫 번째 영화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동안 여성이 조연이거나, 주연으로 나와도 단독 주연이 아니던 홍상수 세계다. 우스갯소리로 '사랑을 알게 된 홍상수가 드디어 여성을 이해하게 됐다'라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을 지경이다.
이것은 영화 외적인 이야기이지만, 영화가 그만큼 우리에게 와닿을 수 있도록 한다. 홍상수의 '일상'이 영화의 '일상'을 대변하게 되면, 그건 더는 영화라고 부를 수가 없게 된다. 가슴 속에 이야기를 품고 살아가는 주인공 영희는, 단지 영화 속의 등장인물에 불과하지 않다.
|
|
| ▲ 영화 <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한 장면 |
| ⓒ 전원사 |
그게 이 영화를 홍상수 영화의 변곡점이라 부를만한 이유다. 이전까지 홍상수 영화 속 일상,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던 인물이 가지는 모순은, 합리화될 수 없는 것이었다. 자기 잘못을 잊고 실수를 반복하고, 그 실수가 타인에게도 관찰되던 <북촌방향>은 분명 논리적으로 잘잘못을 따져 세우기 어렵다. 그것에 모순이라는 이름조차 붙이지 않고, 삶의 일부로 품던 홍상수 영화다.
모순에 '회전문'이라는 이름을 붙여 그것을 파훼하려던 <생활의 발견>은, 끝내 모순점을 찾지 못하고 '괴물은 되지 맙시다'라는 말만 반복한다. 그 영화에서 괴물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괴물이 괴물에게 '괴물은 되지 말자'고 말하는 게 아니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딘지 모를 괴물에게 소리치는 것뿐이다.
하지만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영희는 그 모순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간다. 그 모순조차 우리의 삶에 섞일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지인의 사망이나 폭락한 비트코인과 같은 상실감을 안고 가는 우리의 모습처럼, 영희는 무척 고독해 보인다.
해외에서 관찰되지 않지만 한국에 들어온 순간 영희 옆에 달라붙은 그 '새까만 남성'의 존재는, 그녀에게 달라붙는 편견이거나 시선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곧 일상을 탈피해도 보이지 않는 무언가, 근본적으로 존재하는 모순의 존재를 상정하는 것이다.
|
|
| ▲ 영화 <생활의 발견>의 한 장면 |
| ⓒ 전원사 |
홍상수 영화는 그래서 불편하다. 우리의 통각을 자꾸만 자극한다. 누군가로부터 가르침을 받는다는 건 몹시 불편하다. 우리는 이미 '주체'가 아니던가. 지금 우리의 사회는 서로의 '세계'를 존중해주자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런데 그 존중이 서로에 대한 무관심으로 바뀌었다. 일상물의 도래가 시사하는 것은 바로 그 부분이다. 가족으로 대표되는 공동체에서, 개인은 서로와 꿈을 나누고 소비했다. 하지만 하나의 꿈이라는 건, 생각의 획일화를 뜻하므로 결국 해체될 수밖에 없었다. 사회의 발전과 함께 개인은 자신만의 꿈을 품게 되었고, 그때 공동체의 꿈은 각종 영상 매체로 흘러들어가 '미디어'가 되었다. 그 말인 즉슨, 개인이 꿈꾸어야 미디어도 꿈을 꾼다는 뜻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MB·안철수 구박하는 '문 대통령'.. 유튜브가 뒤집어지다
- 6명 사망한 용산참사, 겪은 사람들의 증언 엇갈리는 이유
- 불시청 선언까지 나온 <리턴>, 왜 욕하면서도 보는 걸까
- 영화 <1987> 700만 돌파.. 출연배우들 재치만점 인증샷
- 매번 틀리는 기상예보, 이 기상캐스터 무지 특이하시네
- 집에서 돈 안 들이고 '음반 발매', 당신도 할 수 있습니다
- <염력>은 초능력 영화 아니다? 연상호 감독의 진짜 의도
- '박항서의 기적' 왜 한국에선 발휘하지 못했을까
- 우간다 축구 봤어? 평범한 대학생이 현지서 경험한 기적
- 선수가 맞으며 운동하는 시대는 끝나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