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동훈의 그랜드 투어] (8) 프리덤 트레일(Freedom Trail)과 새뮤얼 애덤스 | 보스턴 차 사건 주도..혁명가이자 애국자

2018. 4. 2.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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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하나의 나라가 아니다. ‘United States of America’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 50개의 주(州·State)가 연합해 하나의 국가를 이루고 있다.

국가의 근간이 되는 ‘주’가 처음부터 50개나 됐던 것도 아니다. 1776년 미국이 독립을 선언했을 때, 주의 수는 13개였다. 정확하게는 동부 해안가를 따라 구성된 13개의 고만고만한 영국 식민지들의 집합에 불과했다. 식민지들은 17세기 초반부터 다양한 방법을 통해, 다양한 집단에 의해, 다양한 목적 아래 개척되고 발전했다. 플리머스를 시작으로 매사추세츠를 비롯한 뉴잉글랜드가 형성된 것도 이 즈음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뉴잉글랜드 발전의 주도권은 플리머스에서 보스턴으로 넘어갔다. 이 도시는 상공업자, 자영농민, 어부, 선원들의 터전이었다. 자연스럽게 자유와 자치가 보스턴의 기본 가치가 됐다. 그 전통이 이어져 보스턴은 미국의 독립과 건국을 주도했고 열렬한 노예제도 폐지 운동의 중심이었으며 오늘날까지도 가장 미국적인 가치의 수호자로 남아 있다. 보스턴 시민들은 자신들의 자부심과 소명의식, 역사와 가치에 대한 기여와 헌신을 잊지 않기 위해 보스턴 시 곳곳을 연결하는 하나의 길을 만들었다. 프리덤 트레일(Freedom Trail)이다.

프리덤 트레일은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공공 정원인 보스턴 코먼(Boston Common)에서 시작해 찰스타운에 위치한 벙커 힐(Bunker Hill)까지 이어진다. 미국의 독립혁명과 관련된 주요 장소들이 포함돼 있다. 길이는 4㎞. 화창한 봄날이나 선선한 가을날 산책 삼아 걷기에 적당하다. 그 길 위에 자유를 향한 투쟁의 역사가, 자유를 최우선으로 삼는 미국적 가치가 새겨져 있다.

보스턴의 상징과도 같은 프리덤 트레일 표시동판. 이 동판들을 따라가면 미국 독립혁명과 관련된 주요 장소를 방문할 수 있다.
프리덤 트레일을 따라 걷다 보면 몇몇 인물의 동상을 만날 수 있다.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1790년)과 폴 리비어(Paul Revere, 1734~1818년)처럼 당연하게도 미국의 독립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이들이다. 프랭클린은 ‘첫 번째 아메리카인’이라 불리는 대표적인 국부(國父)다. 리비어는 독립혁명의 첫 번째 무력 충돌인 렉싱턴-콩코드 전투에서 보스턴의 민병대가 대영제국의 군대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는 데 기여한 애국지사다.

그런데 아주 예외적으로 한 인물은 프리덤 트레일 위에 자신의 동상이 두 개나 있다. 그의 이름은 새뮤얼 애덤스(Samuel Adams, 1722~1803년).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이며, 혁명가인 동시에 애국자다. 그의 동상은 페뉴얼 홀(Faneuil Hall)과 보스턴 티 파티(Boston Tea Party) 현장 앞에 서 있다. 페뉴얼 홀은 옛 보스턴의 대표적인 공공건물로 아직까지 시장으로 활용된다.

보스턴 티 파티(차 사건, 1773년)는 미국 독립혁명을 촉발한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두 곳 모두 미국의 자유와 혁명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이처럼 중요한 곳에 자신의 동상을 남긴 새뮤얼 애덤스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는 1722년 보스턴의 유복한 양조업자 아들로 태어났다. 하버드를 졸업한 뒤 신문사를 설립했지만 신문사는 경영난에 허덕였다. 사업 분야에 소질이 없었던 탓이다. 시정부의 행정 업무에도 참여했지만 행정 능력도 그저 그랬다.

애덤스의 재능과 열정에 꼭 맞는 분야는 따로 있었다. 바로 정치였다. 그는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고 무엇보다 토론하기를 즐겨했다. 그의 정치철학은 하버드대 졸업 논문에서도 잘 나타난다. ‘만약 그 외의 수단으로 국가를 보전할 길이 없다면 국왕에 반항하는 행동은 합법적인가?’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논문에서 애덤스는 ‘그렇다’고 결론 내렸다. 이때가 18세기라는 점을 상기해보면 영국 국왕 입장에서 도발적이라기보다는 반역적이었다.

이런 정치철학을 가진 애덤스에게 7년 전쟁(1756~1763년, 북미 대륙의 패권을 두고 영국과 프랑스가 싸운 전쟁) 이후에 미국 식민지에서 전개되는 상황은 심각했다. 북미 대륙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된 영국은 식민지인들의 자유를 억압했다. 모국이라 여겼던 영국이 식민지의 자유와 번영을 억압하는 전제자로 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버지가 거래 은행에 대한 영국 정부의 간섭으로 파산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봐야 했던 애덤스는 영국 정부에 대해 뿌리 깊은 반감을 갖고 있었다. 그의 막연했던 반감은 자신의 공부와 현재의 상황 전개에 의해 ‘확신’으로 변해갔다.

새뮤얼 애덤스가 애타게 기다리던 계기는 1773년 봄에 찾아왔다. 영국 정부가 파산 지경에 처한 동인도회사를 지원하기 위해 이 회사가 식민지 시장에서 중개인을 배제하고 소비자에게 직접 판매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영국 정부의 이 같은 조치는 동인도회사와 경쟁 관계에 있던 미국 상인들을 격분시켰다. 차 가격은 떨어지겠지만 미국 상인들은 파산할 것이 뻔했다.

‘자유의 요람’이라 불리는 페뉴얼 홀은 지금도 보스턴 시민들에게 사랑받는 공공건물이다. 홀 앞에는 혁명지사였던 새뮤얼 애덤스의 동상이 당당하게 서 있다.
보스턴 시민을 비롯한 수많은 식민지인 사이에 동인도회사의 차(茶)에 대한 분노가 고조되는 가운데 차를 가득 실은 동인도회사 배들이 보스턴 항구에 입항했다. 애덤스가 기다리던 때가 온 것이다. 1773년 12월 16일 애덤스가 이끌던 저항단체 ‘자유의 아들들’의 단원 일부가 인디언 복장을 하고 보스턴 부두에 정박 중이던 동인도회사 소유의 ‘다트머스호’에 난입했다. 그들은 배에 실려 있던 차를 몽땅 바다에 던져버렸다. 주사위가 던져진 것이다. 보스턴 티 파티에 대한 영국 정부의 반응은 강경했다. 보스턴 항구에 대한 봉쇄, 자치의 금지, 군대의 주둔 등이 포함됐다. 새뮤얼 애덤스가 주장해왔던 영국의 전제정치가 드디어 식민지 전체를 대상으로 마각을 드러낸 것이다.

뒤늦게나마 식민지인들은 대영제국 정부의 본질을 알아챘다. 그동안 파편처럼 흩어져 있던 13개 식민지는 대륙회의를 열어 함께 행동하기로 결의했다. 영국은 군대를 추가로 파병했다. 미국의 독립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이 전쟁에서 조지 워싱턴이 이끄는 식민지 대륙군은 천신만고 끝에 프랑스 도움을 받아 승리를 거뒀다. 영국은 1783년 파리강화회의를 통해 미국의 독립을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새뮤얼 애덤스는 매사추세츠주를 대표해 대륙회의에 참가했고, 미국의 독립선언문에 서명했다. 1794년부터는 매사추세츠주의 주지사로 활약했다.

새뮤얼 애덤스는 누구보다 미국의 독립혁명에 헌신했던 지사(志士)였다. 그에게 정치는 일상이었고 독립은 목표였으며 자유는 모든 것이었다. 그의 동상 중 하나가 서 있는 페뉴얼 홀은 퀸시 마켓(Quincy Market)과 이어져 있다. 보스턴에서 가장 자유롭고 활기찬 곳, 관광객에게도 그런 분위기와 푸드코트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즐겁게 음악을 연주하거나 남녀노소가 함께 어울린다. 다양한 복장과 피부색이 자연스럽다. 보스턴과 미국은 어떻게 오늘날과 같이 번성하고 강력하며 자유로운 곳이 될 수 있었을까? 누군가가 그런 사회를 위해 전제정치에 맞서 싸웠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을 별로 본 적 없는 나로서는 낯선 동시에 부러운 곳이다.

송동훈 칼럼은 이번 회로 마칩니다. 성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송동훈 문명탐험가·㈜송동훈 대표이사]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951호·별책부록 (2018.03.28~04.03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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