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큰일" 말에 3시간을..87년생 기자가 만난 '1987 기자'
첫 보도한 신성호 전 중앙일보 기자
"경찰 큰일 났어" 큰 일이구나 직감
3시간 팩트파인딩 통해 진상 파악
"기자 그만 둘 각오로 취재했다"
━ 1987년생 법조기자, ‘1987 기자’를 만나다
“시신은 어떻게 할까요?” “보따리 하나 터진 걸로 소란 떨 거 있네? 태우라우.” 1987년 6월 항쟁을 다룬 영화 ‘1987’에서 대공수사처장(김윤석)은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대학생이 사망했다는 보고를 받고 즉시 시신을 태우라고 지시한다. 잔혹한 물고문 끝에 사망한 고(故) 박종철 열사의 사인(死因)을 숨기려던 전두환 정권의 시도였다. 시신을 화장하고 나면 고문이 있었다는 사실도, 고문 과정에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도 알려지지 않을 거라 믿었던 것이다.
━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 은폐 고문치사 사건을 은폐하려던 정권의 시도는 영화 속 허구가 아니라 실제 역사다. 박군이 사망한 1월 14일 오후 7시 40분쯤. 치안본부(현 경찰청) 대공수사단 소속 경찰관 2명이 당시 최환 서울지검 공안부장을 찾아와 “오늘밤 안으로 시신을 화장할 수 있게 지휘해달라”고 요청했다. 최 부장검사는 영화 속 최 검사(하정우)의 실제 인물. 경찰 주장대로 ‘단순 쇼크사’가 아닐 것이라고 직감한 그는 “내일 정식으로 처리하자”고 두 사람을 돌려보냈다. 실제 사건의 진상을 은폐하려 한 시도는 당시 “수사관이 책상을 ‘탁’ 치며 추궁하자 갑자기 ‘억’ 하고 쓰러졌다”는 경찰의 조사 결과 발표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서울대 박종철 군 치사 사건을 재보했던 이홍규 변호사(왼쪽.당시 대검 공안 4과장)과 첫 기사를 썼던 신성호 당시 중앙일보 기자가 서울 남영동 전 대공분실 건물앞에 서 있다. [중앙포토]](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1801/08/joongang/20180108020100350ikbu.jpg)
Q : 영화를 보면 박군 사망 이야기를 듣고 찻잔을 든 손이 떨리는 장면이 나온다. A : 실제 있었던 상황을 잘 묘사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1월 15일 오전 9시 50분쯤이었다. 그 날도 검찰청 ‘마와리(まわり·기자가 출입처를 돌아다니며 기삿거리를 찾는 일을 일컫는 일본말)’를 돌던 중 이홍규 대검찰청 공안4과장 방에 들어갔는데 소파에 앉자마자 대뜸 ‘경찰, 큰일났어’라며 한숨을 내쉬더라. 그래서 나도 맞장구를 쳤지. “그러게 말입니다” 이렇게.
Q : 사건 내용을 모르고 있었지만 일단 아는척을 하면서 대화를 유도했다는 건가. A : 무슨 일 터졌습니까 하고 물어보면 오히려 입을 다물 수 있으니까 경계심을 풀 수 있게 이미 알고 있는 척을 했다. 맞장구를 치니까 그제서야 ‘그 친구 서울대생이라며?’하고 묻더라. ‘경찰’ ‘큰 일’ ‘서울대생’. 이거 뭔가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Q : 큰 사건이 벌어졌음을 직감하신 건가. A : 흥분이 됐다.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게 확실하다는 느낌을 받았으니까. 공안4과장에게서 ‘조사를 어떻게 했기에 사람이 죽는 거야. 더구나 남영동에서’라는 말을 듣고 나니 사건의 윤곽이 잡히더라. ‘남영동에서 조사받던 서울대생 한 명이 죽었다’. 그 방에서 나오자마자 화장실로 뛰어가서 문을 걸어 잠그고 취재수첩에 키워드를 정리했다. 서울대생, 조사중 사망, 남영동. 그리고 빈 방에 들어가 회사로 전화를 걸었다 영화에선 최 검사가 후배인 이홍규 과장에게 ‘기자에게 귀띔을 해주라’고 지시하는 것처럼 묘사된다. 신 교수는 “사실과 다르다”고 말했다. 이 과장이 최 검사의 실제 인물인 최환 공안부장과 인척 관계이긴 했지만 최 검사가 이 과장을 통해 사건 내용을 ‘흘린 건’ 아니란 것이다.
또 당시 취재기자가 사회부장에게 보고한 뒤 안기부 직원들을 피해 도망치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실제론 서울대생의 죽음이라는 단초만 가지고 3시간에 걸친 치열한 ‘팩트 파인딩’이 있었다는 게 최 교수의 설명이다.

Q : 영화에선 기사가 나간 뒤 기관원들이 편집국에 들이닥치고, 기사를 쓴 기자도 도망다니는 모습이 나온다. A : 영화의 재미를 위해 각색된 장면이다. 물론 실제로 기사에 대한 압박이 들어오긴 했다. 당시 문화공보부 홍보조정실에서 중앙일보에 전화해서 “이거 오보다. 당장 기사 빼라”고 욕하면서 소리를 쳤다. 우리도 “무슨 소리냐 팩트 취재하고 끝까지 확인해서 쓴 기사다. 못 뺀다”고 버텼다. 경찰도 당시 사회부장한테 전화를 걸어서 계속 기사를 빼라고 압박을 가했다. 신 교수는 당시 사회부장이 “이거 만약에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너, 나, 편집국장, 사장 줄줄이 남산이다”라며 사실 확인을 재차 요구했다”고 떠올렸다. 기사의 사실관계가 조금이라도 틀리면 남산 안기부에 끌려가 곤욕을 치를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Q : 기사가 나간 뒤 신상에 위협을 느꼈나. A : 영화에서처럼 바로 도망친 게 아니라 그날 저녁 사회부 회식이 있었다. 회식이 끝난 뒤 선배들이 집에 가지 말라고 조언했다. 집 앞에서 잡혀갈 수도 있다고. 그래서 회사 근처 여관에서 하룻밤을 보내는데 그날밤이 굉장히 길었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들더라. 신 교수는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을 특종보도한 뒤에 오히려 '신문기자를 그만둘 상황에 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엄혹했던 당시 상황을 감안하면 정권 차원의 보복이 있을 것이란 우려였다. 그는 "기자로서 부끄럽지 않게 기사를 쓰고 싶다"는 생각에 치열한 후속취재에 나설 수 있었다고 말했다.
Q : 최악의 경우 박종철 군처럼 끌려가 고문을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 같다. A : 우선 내가 신문기자를 접어야 할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이 강했다. 그 때 내가 부모님을 모시고 살았고, 애들도 둘이어서 여섯 식구의 가장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나중에 “아빠 옛날에 기자였다던데 그때 무슨 기사 쓰셨어요?”라고 물어보면 이 일을 말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감이 생기더라고. 내가 기자를 7년만에 관두는 한이 있어도 부끄럽지 않게 해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을 굳게 먹을 수 있었다. 박종철 열사의 죽음은 87년 8월생인 기자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다. 목숨을 걸고 진실을 좇았던 31년 전의 법조기자와 2018년 현재를 살아가는 법조기자와의 간극은 비단 시간으로만 따질 일이 아니었다. ‘그 날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전하던 신 교수는 “30년 전의 내가 하던 일을 그대로 하고 있는 후배 기자를 보니 그때의 떨림과 흥분이 다시 느껴진다”고 말했다.

정진우 기자 dino8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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