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이코노미 '비즈니스 레스토랑' 가이드] (12) 보트르메종 | 오감을 일깨우는 다채로운 맛의 향연

보트르메종은 프랑스어로 ‘당신의 집’이라는 뜻이다. 집에서 밥을 먹듯 편안한 마음으로 즐길 수 있는 식사를 대접하겠다는 의미가 담겼다. 압구정 로데오거리 인근에 위치한 식당에 들어서면 이름처럼 아늑한 분위기가 먼저 반긴다. 복잡한 꾸밈이나 장식 없이 화이트톤으로 정갈하게 마감된 실내 인테리어는 따뜻한 느낌을 준다. 단순하면서도 조명의 밝기나 음악 등 곳곳에서 세심하게 신경 쓴 흔적이 눈에 띈다.
보트르메종에는 메뉴판이 따로 없다. 런치(5만원)와 디너(12만원) 각각 한 가지 코스로만 진행된다. 박민재 셰프의 요리는 다양한 재료를 통해 여러 가지 맛과 식감의 복합미(美)를 추구하는 것이 특징. 시각과 미각뿐 아니라 후각, 청각 등 오감을 자극하는 요리를 선보인다.
“프렌치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 중 하나가 여러 가지 재료가 어울려 복합적인 향과 맛을 내는 것입니다. 한입 먹었는데 딱 알아차리면 음식에 대한 호기심도 안 생기고 흥미를 잃어버리죠. 프렌치는 전체 코스가 처음부터 끝까지 연결돼 있으면서 또 나뉘는데, 각각의 요리마다 독특한 향과 맛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프렌치에 대한 박민재 셰프의 지론이다.
보트르메종의 디너 코스는 프렌치의 정석을 경험할 수 있는 메뉴로 꼽힌다. 본격적인 식사 전 가장 먼저 서빙되는 세 가지 핑거푸드부터 눈길을 사로잡는다. 트러플 무스 비스킷과 카망베르치즈·망고·사과·초리소로 안을 채운 양배추롤, 베이컨 튀김으로 감싼 바나나롤은 앞으로 두 시간여 동안 이어질 파티의 시작을 알리는 팡파르 역할을 한다. 청량감 있는 샴페인 한 잔을 곁들이면 금상첨화.

첫 번째 앙트레는 그릴에 구운 홍새우다. 헤이즐넛 비스킷과 포르치니 버섯으로 만든 젤리 위에 홍새우를 올렸는데 일단 비주얼부터가 압권이다. 캐비어와 식용 허브인 한련화, 오징어 먹물로 만든 튈 등이 층층이 쌓여 눈길을 사로잡는다. 비스킷을 와사삭 부순 후 숟가락으로 모든 재료를 담아 크게 한입 넣으면 그야말로 맛의 폭풍이 휘몰아친다. 홍새우의 짭짤한 맛을 비스킷이 적절하게 중화시켜주는 동시에 은은한 포르치니 버섯향이 입안을 감싼다. 특히 홍새우 안쪽에 채워진 성게알 사바이욘 소스(계란 노른자와 화이트 와인, 식초, 버터 등을 사용해 부드러운 무스 느낌이 나도록 만든 소스)가 풍미를 극대화하면서 한번 씹을 때마다 또 다른 맛을 느끼게 만든다.

이어지는 요리는 밤 수프다. 수프에서도 박민재 셰프의 특징이 유감없이 드러난다. 그릴에 구운 전복과 킹크랩 크로켓, 구운 헤이즐넛 등을 푸짐하게 담아내 메인요리라 해도 될 정도의 모습을 자랑한다. 최상급 공주산 밤으로 낸 깊고 진한 맛은 기본. 다양한 고명을 곁들여 먹다 보면 ‘수프가 이렇게 완성도 높은 요리가 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다음 생선 요리는 팬 프라이한 농어가 준비된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럽게 조리한 것이 특징. 1%의 퍽퍽함도 찾아볼 수 없는 촉촉한 농어살이 일품이다. 농어 아래위로 가지 퓌레와 옥수수, 토마토, 애호박 등 각종 야채와 과일로 만든 상큼한 맛의 라타투이를 곁들여 심심할 수 있는 생선 요리에 신선함을 더했다.
메인 요리는 안심 스테이크. 어린 송아지뼈와 와인을 끓여 만든 소스의 깊고 진한 맛도 인상적이지만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굽기가 감탄을 자아낸다. 시어링을 통해 풍미를 극대화하고 속은 촉촉하면서도 육즙이 충분히 담겨 있어 씹을 때마다 맛이 살아난다. 가니시 하나하나에도 세심하게 신경 쓴 셰프의 손길이 느껴진다.
디저트는 박민재 셰프의 시그니처 메뉴 중 하나인 ‘바닐라 수플레’다. 수플레는 제대로 부풀리는 것도 쉽지 않지만 완성 후 쉽게 꺼지기 때문에 ‘손이 많이 가는’ 음식으로 꼽힌다.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 끝에 완성된 보트르메종의 수플레는 달면서도 달지 않은, 거부감 없는 단맛을 낸다. 바닐라 시럽이 아니라 진짜 바닐라빈을 사용하는 것이 그 비결. 바삭한 겉부분 안쪽에는 구름처럼 부드러운 속살이 숨어 있다.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은 맛에 다 먹고도 입맛을 다시게 된다.
역경 이겨내고 미쉐린 스타 셰프 자리 오른 박민재 셰프
‘프렌치는 내 운명’ 정직한 요리에 프랑스 담아내

쳇바퀴 돌듯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가던 와중에 신문에서 프랑스 최고 요리학교인 ‘르꼬르동블루’의 기사를 접하게 됐다. 벼락을 맞은 듯 프렌치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개월 만에 식당을 정리하고 프랑스로 떠났다. 서른두 살의 나이, 프랑스어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지만 프렌치는 그에게 운명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늦은 밤까지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며 3년 동안 정통 프랑스 요리를 배웠다.
2001년 귀국 후 경기도 양평에 프렌치 레스토랑을 냈다. 제대로 된 프렌치를 하는 곳이 있다고 입소문이 나면서 서울에서부터 손님이 찾아왔다. 자신감이 생겼다. 이듬해 압구정동으로 옮겨 프렌치 레스토랑 ‘르 까레’를 열었다. 욕심이 과했던 탓일까. 음식에 대한 평가는 좋았지만 무리한 확장으로 적자를 보다가 결국 문을 닫았다. 긴 슬럼프가 찾아왔다. 3년 동안 칼을 잡지 않았다.
절치부심.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2009년 청담동에 테이블 서너 개의 작은 레스토랑을 차렸다. 직원도 따로 두지 않았다. 아내와 함께 단둘이 일하면서 죽을 각오로 음식을 만들었다. 예전의 그를 기억하고 발걸음하는 손님이 하나둘 늘면서 식당은 삼청동 ‘비앙에트르’, 현재의 ‘보트르메종’으로 성장했다. 그렇게 바닥을 딛고 일어나 국내 첫 미쉐린 스타 셰프의 자리에 올랐다. 박민재 셰프에게 음식은 마음을 담는 그릇이다.
“실패해본 경험이 큰 교훈이 됐죠. 어려운 시절을 겪으면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음식을 만들어야 할지 깨닫게 됐어요. 정직하게 요리하면 먹는 사람에게 그 마음이 전해집니다. 요리는 단순히 배를 채우는 음식이 아니라 문화라고 생각해요. 제 요리를 드시는 분들이 프랑스를 느낄 수 있도록 마음을 담아 요리하겠습니다.”
[류지민 기자 ryuna@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953호 (2018.04.11~04.17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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