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소영의 컬처 스토리] '의심하는 토마'가 필요한 이유

문소영 2017. 2. 6.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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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에서 의심 많고 증거를 눈앞에 들이대야 믿는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다우팅 토머스(Doubting Thomas)’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토머스는 그리스도교의 12사도 중 하나인 성 토마(도마)를 가리킨다. 성인이 어쩌다가 의심꾼의 대명사가 됐을까? 신약의 ‘요한의 복음서’에 나오는 이야기 때문이다.

토마는 다른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을 때 그 자리에 없었다. 나중에 그들의 목격담을 전해 듣고는 이렇게 말했다.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로마 병사가 창으로 찌른 상처]에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여드레 후 토마를 비롯한 제자들이 다시 어느 집에 모였을 때 문이 잠겨 있는데도 예수가 나타나 그들 가운데 섰다. 그리고는 자신의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 상처에 손가락을 넣어보라고 토마에게 말했다. 그제서야 토마는 믿었고, 예수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하고 말했다.

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화가들이 놓쳤을 리 없다. 많은 그림 중에 16세기 이탈리아 바로크 미술의 거장인 카라바조의 작품이 특히 인상적이다.
성 토마의 불신(1601~1602), 카라바조(1571~1610) 작.
토마는 갑자기 출현한 그리스도가 두려운 나머지 그와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는 상황. 하지만, 그래도 확인은 해봐야겠다는 고집스러운 의지로 눈을 부릅뜨고 이마에 주름을 잔뜩 잡은 채 손가락을 내밀고 있다. 예수는 자상하게 그의 손을 잡아 옆구리 상처로 이끌고, 다른 제자들도 호기심을 감추지 못한 채 열중해서 들여다보고 있다. 사실적인 인물 묘사, 배경의 생략을 통한 집중, 명암대비 기법인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에 의한 극적인 긴장감 등 카라바조 특유의 미학이 빛나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토마의 불신을 비난하는 이야기일까? 실제로 그런 맥락에서 인용되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해석도 있다. 내가 십대 때 성당 미사에서 들은 어떤 신부님의 강론이 그랬다.

“그리스도는 토마를 많이 아꼈습니다. 왜 그를 위해 일부러 다시 나타났겠어요? 성경의 다른 구절을 보면 토마는 예수께 충실했고 그러면서 탐구심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말씀이 이해 안 갈 때 다른 제자들이 대충 가만히 있어도 토마는 꼭 질문을 했어요. 맹신하는 것보다 토마처럼 의심하고 질문하는 게 오히려 좋은 믿음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다만 그게 과하면 본인이 피곤하고 괴롭지요. 그래도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나는 그 강론을 들은 후부터 토마 이야기를 좋아하게 됐다. 믿음이 특히 중요한 종교의 영역에서도 이런데, 세속의 영역에서는 의심하고 질문하는 자세가 더더욱 필요하지 않을까?

요즘 국내외적으로 소셜미디어에 가짜 뉴스가 범람하고 각자 자기 정치적 입맛에 맞는 뉴스만 봐서 문제라고 한다. 사실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이미 태고부터 인간은 진리를 믿고 싶은 게 아니라 믿고 싶은 게 진리인 성향이 있었다. 고대 중국의 백과사전 겸 철학서 ‘회남자(淮南子)’에도 이런 말이 있지 않던가. “옳음을 구한다는 자는 사실 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맞는 것을 구하는 것이고, 그름을 제거한다는 자는 사실 잘못된 것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거슬리는 것을 제거하려는 것이다.”

문제는 첨단 미디어의 발달이 역설적으로 이런 왜곡을 부추긴다는 것이다. 페이스북의 경우, 사용자가 그간 관심 갖고 ‘좋아요’한 것과 같은 주제의 글이 뉴스피드에 우선적으로 뜨니, 사용자는 입맛에 맞는 뉴스와 의견만 주로 보게 된다. 다른 소셜미디어에서도 마음이 맞는 친구들이 링크한 뉴스만 보다 보니, 끼리끼리 모여 같은 생각이 메아리 치는 ‘반향실(Echo chamber)’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메아리를 즐기면서 진위에 대한 관심은 덮어두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이번 미국 대선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한 술 더 떠 최근 미국 백악관 관료들은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 인파가 역대 최대였다”라고 명백하게 틀린 발언을 한 후 그게 "대안적 사실 (Alternative facts)"이라고 주장해서 많은 사람들을 어이없게 했다. 이런 ‘대안적 사실’은 ‘반향실’에서 증폭되고 힘을 키운다. 그리고 이것은 트럼프 지지자들만의 문제도 아니다.

그러한 ‘반향실’을 깨고 나올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의심하는 토마’다. 토마는 자신이 목숨을 바쳐 따르던 스승에게도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아마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모든 철학과 과학은 그런 회의(skepticism)에서 발전했다. 17세기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의 그 유명한 말 “코기토 에르고 숨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도 ‘방법론적 회의’에서 나왔다. 그는 원점으로 돌아가서 모든 감각과 지식을 의심했고, 그럼에도 의심할 수 없는 것이 ‘그러한 의심을 하는, 즉 사유를 하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여기에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의 제1원칙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니 이 말을 비틀어 “나는 의심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하면 어떨까. ‘반향실’과 ‘대안적 사실’이 판치며 맹목적 적대가 가중되고 그것을 이용해 사익을 취하는 세력이 늘어나는 시대, 인간임을 지키는 것은 의심하는 것, 내 안의 ‘의심하는 토마’를 일깨우는 것이다.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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