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호러 장인이 레즈비언 로망포르노 찍은 이유? (인터뷰)
일본 호러 장인 나카다 히데오 감독
32년 전 닛카츠 로망포르노에 매료
동경대 박차고 나와 영화계 입문

몇 마디 대사 없이도 자연스레 에로틱한 긴장감이 감돈다. 어두운 공방에서 한 줄기 햇살에 드러난 두 여성의 시선 교환이 은밀하고도 아름답게 그려진다. 이는 오는 8월 17일 개봉하는 로망포르노 ‘화이트 릴리’ 한 장면. 이 영화가 ‘링’(1998)으로 전 세계에 악령 사다코 열풍을 일으켰던 일본 호러 장인 나카다 히데오(56) 감독의 생애 첫 퀴어 영화란 걸 알고 나면 호기심은 배가된다.

‘링’ 이후로도 ‘검은 물 밑에서’(2002), 한국 할리우드에서 연출한 ‘링2’(2005), ‘데스노트-L:새로운 시작’(2008) 등 호러 장르 한 우물을 파온 나카다 감독. 사실 그는 ‘덕업일치’를 이룬 대표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는데, 32년 전 동경대 공대에 다니던 그가 돌연 영화계에 입문한 계기가 바로 로망포르노였다.
로망포르노(Roman Porno)는 일본 굴지의 영화사 닛카츠 스튜디오가 1970~1980년대 불황을 딛고 황금기를 구가한 극장용 성인영화를 말한다. 그러나 그냥 ‘야한 영화’만은 아니었다.

나카다 감독 역시 로망포르노에 대한 동경심으로 1985년 니카츠 스튜디오에 입사했다. 그가 그해 조연출로 참여한 첫 영화가 바로 로망포르노 거장 코누마 마사루 감독의 ‘상자 안의 여자’였다. (그는 다큐멘터리 ‘새디스틱 마조히스틱’(2000)에서 스승으로 모셨던 코누마 감독의 작품 세계를 다뤘는데, 이 영화는 2005년 제6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소개됐다.)
1980년대 후반 AV(Adult Video)의 등장과 검열의 압박으로 로망포르노는 자취를 감췄다. 매니아들의 뇌리에만 남아있던 이 장르가 지난해 돌연 재조명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닛카츠 스튜디오가 로망포르노 탄생 45주년 기념 리부트 프로젝트를 선언한 것. 소노 시온, 유키사다 이사오부터 시오타 아키히코, 시라이시 카즈야, 시라이시 가즈야 그리고 나카타 히데오 등 일본 대표 중견 감독 5인이 각기 다른 개성과 주제의 로망포르노를 선보였다.
시대가 바뀐 만큼 변화가 필요했다. 닛카츠 스튜디오는 감독들에게 영화에 대한 ‘전권’을 맡기며 딱 한 가지를 주문했다. 남성들의 전유물로 소비됐던 기존 로망포르노에 여성들의 시선과 감성을 투영해달라고 한 것. 흔히 ‘백합물’이라 일컬어진 레즈비언 멜로를 작정하고 ‘화이트 릴리’란 제목에 담은 나카다 감독의 영화는 이번 ‘로포리 프로젝트’의 정수라 할 만하다. 그리고 그에게 여성은 결코 낯선 화두가 아니었다.
“일본남자들이 자기 자신이 아닌 누군가 다른 사람을 목숨 걸고 지킨다는 설정이 너무 비현실적일 것 같아서.” 나카다 감독이 영화 ‘링’에서 스즈키 코지의 원작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의 성별을 여자로 바꾸며 들려준 이유다. 그의 연출로 ‘링’은 워킹맘인 주인공이 저주받은 비디오테이프를 본 어린 아들을 구하기 위해 강한 모성애로 공포에 맞서는 이야기가 됐다. “장르와 상관없이 강한 여성상”은 늘 나카다 감독의 관심사였다.
‘화이트 릴리’는 모종의 사연으로 술과 섹스에 빠져 사는 중년의 유명 도예가 토키코와, 그와 함께 살며 토키코를 보살피는 젊은 제자 하루카의 애증의 관계를 그린다. 젊은 남성 사토루(마치 쇼우마)가 공방 조수로 새로 합류하고, 토키코의 비뚤어진 욕망은 걷잡을 수 없는 파국을 낳는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보면, 두 여성이 서로의 영혼을 구해내는 이야기다. 비극적인 처지 속에 발버둥 치며 서서히 변화하는 그들의 관계는 이들이 둘이서, 혹은 다른 누군가와 나누는 섹스신의 형태를 통해 암시된다.
“남녀의 러브신은 굉장히 단순하다. 반면, 여성들끼리의 사랑이나 애정신은 복합적인 면이 있다. 낮은 파도에서 시작해 중간, 높은 파도까지 감정의 단계를 어떻게 밟아 나가며 표현할지 고민했다. 러브신은 액션신에 가깝다고 생각하는데, 몸의 위치, 손의 쓰임 등을 촬영 전 몇 번이고 연습했다. 실제 현장에서 배우의 움직임을 체크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리허설을 거쳤다.”(나카다 히데오 감독) “여성들의 긴 머리에 공포를 느낀다. 젖은 채로 늘어뜨려 있거나, 뭉텅이로 빠져있는 머리카락을 보면 무섭다.” 2011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그가 털어놓은 고백이다. 풀어헤친 긴 머리에 얼굴을 파묻고 스멀스멀 덮쳐오던 ‘링’의 원혼 사다코 캐릭터는 그러니까, 감독 스스로의 공포를 극대화해 투영한 결과. “감독이기 전에 관객의 입장에서 촬영 현장에 임한다”는 게 그에겐 결코 빈말이 아니다. ‘화이트 릴리’에서도 ‘관객’으로서 나카다 감독을 가장 사로잡은 장면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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