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수개 이야기는 설화일까, 사실일까?

이완우 2021. 8. 23.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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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을 확인할 자료와 근거 충분치 않지만.. 오수개는 '사랑, 용감, 영리함'의 표상이 돼야

[이완우 기자]

▲ 원동산 의견 동상 오수 원동산에 느티나무가 무성하다. 의견비와 의견 동상이 있다.
ⓒ 이완우
 
전북 임실군 오수는 천백 년 전의 설화가 전해오는 유서 깊은 지역이다. 지명 '오수(獒樹)'는 '큰개 오'와 '나무 수'의 합성어인데, '개 무덤' 앞에 비목(碑木)으로 세워둔 지팡이가 싹이 터서 자란 큰 느티나무 이름에서 유래한다.

오수에는 오수개 동상이 5곳에 있다. 8월 20일에 오수개 동상들을 둘러보며 오수개 설화를 찾아 천백 년의 시간 여행을 떠나 보았다. 철도역인 오수역에 내리면 광장에 오수개가 주인 김개인과 함께 서 있다. 오수로 진입하는 전주 남원 간 17번 옛 국도변 오암리에, 지사면 영천리의 오수개 주인 김개인 생가터에, 오수개 설화의 발상지로 추정되는 오수 천변 의견공원에, 오수 전통시장의 중심인 원동산 공원에 있는 오수개의 동상을 다 둘러보는 데 두 시간이면 충분하다.

오수 원동산의 의견비는 전라북도 민속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동산은 예로부터 오수 시장터의 중심이었다. 오수 시장터는 일제 침략기에 임실군, 남원군, 장수군, 순창군 등 인근 4개 군 지역 8개 면의 거점이 되는 장터로 많은 사람이 모여 항일 의식을 고취하고 항일 의지를 행동으로 실천하는 장소였다. 이 원동산에 1939년에 의견비를 설치했다. 이 비석은 높이 218cm, 상단 폭 98cm, 하단 폭이 96cm로 제법 큰 규모다. 비석 앞면 아래쪽에 개의 형상으로 보이는 자연 무늬가 있어 신기하다.

오수개 설화의 발상지는 원동산에서 북동쪽으로 800m 거리의 오수천 부근인 상리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1920년대 말에 전라선 철도 공사 중에 천변에 묻혀있던 의견비가 발견되었다. 원동산으로 이 오수 의견비를 옮겨와 설치한 데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항일 정신과 의지를 약화하려는 일제의 의도가 반영되었다고 한다. 원동산에서 100m 거리 가까이에는 1940년에 건립된 높이 12m의 오수 망루가 있다. 이 망루가 전국에 남아 있는 망루 중에 가장 높은데, 오수 시장터에 모인 사람들의 동향을 감시하려는 것이 첫째 목적이었다.

오수개 이야기는 설화적 허구일까?
 
▲ 오수의 의견 동상들 오수에 진입하는 철도역과 도로 어귀에, 김개인 생가터와 의견공원에 의견 동상이 있다.
ⓒ 이완우
 
천백 년 전 신라 시대에 청웅현에 주인의 사랑을 받던 개 한 마리가 어느 봄날 주인 김개인을 따라 나들이를 나섰다. 귀갓길에 김개인이 술에 취해 천변 풀밭에서 잠들었는데, 마침 들불이 번져와 김개인이 위급하게 되었다. 개는 옆 개울에서 몸에 물에 적셔 풀밭의 불을 끄는 행동을 반복하여 주인을 구하고 생명을 마쳤다. 김개인이 개의 무덤을 짓고 지팡이를 무덤 앞에 세워두었다. 이 지팡이가 싹이 터서 무성한 나무가 되었다. 오수개 설화의 개요다.

오수개 설화는 의리를 지켜 보은한 의견 설화로 성격이 규정된다. 이 설화가 고려 무신정권 시기 1230년대 최자의 보한집에 채록되었다. 최자는 고려 무신정권에서 우대받은 문인이었다. 당시 무신정권은 대몽항쟁기의 전란 중 민심을 수습하고 질서를 확보하며, 백성들이 무신정권에 충성할 것을 희망하였다. 보한집에 채록된 오수개 설화의 내용은 무신정권의 이러한 희망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강화도에서 최초의 금속 활자본 상정고금예문을 편찬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중국에 이 지역의 오수개 설화와 비교 가능한 서사 구조를 가진 천육백 년 전의 양생 설화가 있다. 진(晉) 나라 때 광릉(廣陵) 사람 양생이 개를 한 마리 길렀다. 어느 날, 개가 양생과 나들이 나섰다. 주인이 취해 풀밭에서 잠이 들었다. 들불이 일어나 양생에게 번져왔다. 개는 개울에 뛰어들어 물을 적셔서 불을 끄고 양생을 구했다.

얼마 후 양생이 길을 가다 깊은 우물에 빠졌다. 개가 짖어대고 마침 행인이 왔다. 행인은 구해주면 개를 달라고 했다. 양생이 머뭇거리자 개가 우물 속의 주인을 보았다. 양생은 개의 마음을 알고 개를 행인에게 주겠다고 했다. 행인이 양생을 우물에서 꺼내주고 개를 데리고 갔다. 개는 며칠 후에 양생에게 다시 돌아왔다.

원동산의 의견비는 비석의 규모가 제법 크다. 언제 조성되었는지는 비석 뒷면 글씨의 풍화 마모가 심해 판독은 쉽지 않지만, 비석 뒷면의 탁본을 보면 참여자 수십여 명의 이름이 보인다. 이 비석 건립에 상당한 정성과 노력이 필요했을 것으로 보아 오수개 이야기가 사실에 바탕을 두었을 개연성을 본다.
 
▲ 원동산 입구 원동산은 오수 전통시장에 있다. 오수 전통시장은 인근 4개 군 8개 면의 거점이었다.
ⓒ 이완우
▲ 원동산 의견비 앞면 문양 원동산 의견비 앞면에는 개의 형상이 비석의 암석 표면에 자연 문양으로 있어 신기하다.
ⓒ 이완우
 
이 지역이 백제 시기는 거사물현이었고 신라의 청웅현이 되었다. 신라는 7세기에 9주 5소경의 행정구역과 9서당 10정의 군사제도를 마련했다. 현재 전라북도에서 '전주'는 도청 소재지로 도시 이름이다. 그러나 신라 시대의 '전주'는 신라 행정구역 9주의 하나인 '전주'로서, 지금의 도(道) 단위 행정구역 명칭이었다.

전주의 중심은 신라 5소경의 하나인 남원경이었다. 지방군단 10정 중의 하나인 거사물정이 이 지역 청웅현에 있었다. 거사물정의 중심은 지사면 영천리 지역으로 추정된다. 신라의 지방군단 군대가 머물렀던 이 지역에 여러 종류의 군견들이 있었을 것이고, 이 군견들과 오수개가 관련되지 않았을까?

신라의 왕족과 귀족들은 개를 애호했다. 티베트 개인 마스티프도 차마고도를 넘어 중국을 거쳐 신라의 경주에 도착하였다. 개를 의미하는 한자 '오(獒)'가 '장오(藏獒)'로서 '서장(西藏)'이 티베트이므로, 오수개가 티베트에서 온 마스티프 종이었다고 이해한다. 그런데 한자 '오(獒)'가 굳이 티베트와 관련 없이, 오수개가 우리나라의 재래종 개인데 그 행동이 훌륭하여 '개 견(犬)'이나 '개 구(狗)' 보다 존칭인 '개 오(獒)'를 쓴 것이 아니냐는 견해도 있다.

개는 늑대의 후손으로 동물은 불을 무서워하는 본능이 있다. 오수개가 물로써 불을 끄는 이치를 알고, 몸에 물을 묻혀서 진화(鎭火)의 행동을 했다는 것은 그리 자연스럽지 않다. 개가 물로써 불을 껐다면 이것은 이지적인 판단과 행동 의지를 전제로 한다. 그런데 오수개가 훈련을 받은 군견 출신이었다면, 상황 판단과 문제해결 능력, 주인을 사랑해서 헌신하는 용감한 행동과 영리한 지능이 발현되었을 가능성이 커진다. 이렇게 오수개를 '사랑, 용감, 영리함'의 성격과 행동으로 새롭게 보면 오수개의 의미가 더 살아난다.

오수개의 '의견(義犬)'이라는 칭송은 봉건 시대에 지배계층이 백성들에게 원하는 유교적 질서와 윤리관을 개라는 친근한 동물에게 투영한 듯하다. 오수개 동상 5곳을 찾아 살펴보면서, "정말 의견이 되고 싶냐?"고 물어본다. 아마 오수개는 "'사랑, 용감, 영리함'의 본능을 발휘했을 뿐이다"라고 대답할 듯하다.

오수개 이야기가 설화적 허구인지 역사적 사실인지는 아직도 자료와 근거가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오수개 설화에는 사랑하고 용감하고 지혜로운 이 땅의 주인인 우리 백성들의 품성이 드러나 있다고 본다. 수천 년 역사 속에서 나라 사랑했던 우리 백성들의 용기와 지혜 그 생동감 넘치는 활력을 오수개의 이야기에서 찾아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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