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 사진 속으로..종로 계동에서 즐기는 문화 산책

2021. 7. 21.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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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계동은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북촌의 한 동네로 그동안은 한옥이 많은 골목길, 드라마 촬영지를 찾아온 한류 관광객이 많은 곳 정도로 알고 있었다. 코로나19로 해외 관광객이 줄어든 요즘, 뮤지엄헤드, 조선민화갤러리, 심보의 취향 등 유독 계동발 문화 소식이 늘어나고 있다. ‘도대체 계동에 뭐가 생겼기에?’ 하는 궁금증이 생겨서 길을 나섰다.

제생원터, 관상감 관천대 등 조선 시대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계동

지하철 3호선 안국역 3번 출구를 나왔다. 현대건설, 창덕궁, 계동으로 향하는 출구다. 몇 걸음 걷자 현대건설 사옥 귀퉁이에 ‘제생원터濟生院址’라는 표지석이 눈에 띈다. ‘제생원’은 조선 초기 서민 의료 기관으로 극빈자 치료와 미아 보호를 맡던 곳이었고, 조선 말엽에는 이 자리가 계동궁桂洞宮으로 고종의 사촌형 이재원李載元의 집이었다고 쓰여 있다. 현대건설 사옥 안쪽에는 마치 첨성대처럼 생긴 석조물이 있는데, 세종 때 하늘의 별을 살펴보기 위해 만든 천문 관측 기구인 관상감觀象監 관천대觀天臺로, 조선 초기에 천문과 지리 등을 맡았던 서운관書雲觀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계동사거리에는 조선 시대 외교에 관한 문서를 담당하던 승문원承文院이었다는 석판도 남아 있고, 계동 38번지에는 조선말 왕실 업무와 왕족, 귀족과 작품爵品에 관한 사무를 맡아 보던 의빈원儀賓院도 있었다 하니 계동은 조선 시대에 정말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초입부터 역사적 흔적이 훅훅 눈에 들어오는 걸 보니 북촌은 북촌이다. 원래 북촌은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있어 궁 출입이 잦은 왕족과 양반 관료들이 주로 살았고, 중요한 행정 기관이 많았다. 풍수지리적으로 최상지인 경복궁과 창덕궁 옆이고, 경사지라서 배수도 잘되고, 남향이라 겨울엔 따뜻하고, 남산이 눈앞에 보이니 당시 권력층이 모여 살았을 것이다.

한옥을 카페로 리뉴얼해서 핫플레이스가 된 ‘카페 어니언’
계동마님댁을 개조한 ‘북촌문화센터’, 소아과 병원 자리가 와인 바로 바뀌었다.
명망가들이 사는 곳이었다더니 현대건설 사옥 바로 옆에도 큼직한 한옥이 한 채 있다. 지금은 계동의 핫플레이스 중 하나인 한옥 카페 ‘어니언’이 들어앉은 집이다. 전통 한옥의 구조를 살리고, 가운데 마당에 흰 자갈을 깔아 대청마루에서 마당의 돌을 보며 힐링할 수 있는 공간으로, 연일 젊은 층의 발길이 이어진다. 대한제국 시대에 을사늑약에 끝까지 저항한 의정부 참정 한규설의 손자 한학수 선생이 살던 가옥이며, 지금은 카페 어니언을 중심으로 작은 꽃집, 양복점 등이 담을 이루고 있다. 저택의 일자형 행랑채 입구가 일제히 바깥쪽으로 돌아앉은 모양새다. 계동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카페 어니언에서 부드러운 커피 한 잔과 시그니처 메뉴인 팡도르 빵 하나를 먹고 시작해 보자.

중앙고 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북촌문화센터’가 나온다. 대한제국 시대에 탁지부(현재 기획재정부) 재무관을 지낸 민형기 가문의 집인데, 요즘은 그 며느리 이규숙 님의 별칭인 ‘계동마님댁’으로 더 유명한 한옥이다. 1921년에 대궐 목수가 지은 전통 주택으로, 2002년부터는 북촌의 의미와 전통문화를 알리기 위한 북촌문화센터로 운영되고 있다. 홍보 전시관에서 북촌에 관한 정보를 알아보고, 관광을 위한 정보와 지도 등을 얻을 수 있다. 규방 공예나 문인화 등의 전통 문화 강좌도 정기적으로 열린다.

계동길과 창덕궁1길이 만나는 사거리 왼쪽에는 고색창연한 붉은 벽돌 건물이 있다. 1963년부터 2017년까지 최소아과의원이 있어 동네 어린이들의 건강을 챙겼는데, 원장님이 돌아가신 후 지금은 ‘이 ’이라는 카페 겸 와인 바가 되었다. 해질녘 고즈넉한 계동 언덕길을 내다보며 한 잔 하기 좋은 곳이다.

‌북촌 주민들이 기증한 1000여 권의 책을 비치한 서재 겸 휴식처 ‘북촌마을서재’
계동사거리 언덕길과 계동길 입구. 자전거에 연결해서 관광객을 태우고 돌아다니는 인력거도 만날 수 있다.
이 사거리부터 중앙고 입구까지 차 두 대가 겨우 비껴갈 만한 폭의 골목길이 바로 계동길이다. 전통 한옥 지역이라 고도 제한 때문에 높은 건물이 없어 날씨 좋은 날은 길 끝의 중앙고 건물까지 골목이 한눈에 보인다. 계동부동산부터 계동피자, 계동커피, 계동미용실 등 ‘계동’을 단 간판부터 세련된 스타일의 작은 가게들이 나란히 이어져 있다.

계동피자 맞은편 카페 공드리와 두루 사잇길로 들어가면 ‘북촌한옥지원센터’와 ‘북촌마을서재’가 나온다. 북촌한옥지원센터는 한옥의 개보수 또는 신축 관련해 상담과 지원을 목적으로 2015년에 개관했으며 한옥에 관한 다양한 지식과 정보를 제공해 준다. 바로 옆에는 ‘반송재독서루’ 현판이 붙은 북촌마을서재가 있다. 한옥·인문학·에세이·어린이 도서 등 북촌 주민들이 기증한 1000여 권의 도서가 비치되어 있어 누구든 편하게 들러서 독서를 즐길 수 있다. 공간을 대여해서 책 모임을 하거나 문화 행사를 열기도 한다고. 계동길 나들이에 잠시 한옥에서 느긋한 자세로 앉아 쉴 수 있는 보석 같은 공간이다. 자전거로 운행하는 인력거를 타고 계동 일대를 돌아보며 설명을 듣는 것도 재미있는 체험이다.

▶목욕탕 주변 문화 공간들

계동길에 들어서면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가게마다 붙어 있는 대형 흑백 사진이다. TV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럭’에서 츤데레 사장님으로 나왔던 현대전기 사장님의 전신 사진을 시작으로 계동피자, 정애쿠키, 왕짱구식당, 앤모자, 계동커피 등 가게마다 사장님들의 전신 사진이 붙어 있다. 이는 계동길 중간에 자리한 물나무사진관의 김현식 사진가가 2018년에 계동길의 사장님들을 모델로 찍고 인화한 40여 점의 사진들을 가게마다 붙여 계동길을 전시장으로 만들었던 ‘정박의 기억: 계동2018’ 전시 결과물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

계동 상인들의 모습을 흑백 전신 사진으로 가게 앞에 전시한 계동길 풍경
계동길의 인물 사진을 촬영한 김현식 사진가가 운영하는 정통 흑백 사진관 ‘물나무사진관’
예전 중앙탕 자리. 십여 년 이상 조선 민화를 수집한 이세영 대표가 ‘조선민화갤러리’로 바꾸어 민화를 전시 중이다.
김현식 사진가는 2010년에 계동에 사진관을 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동네 사람들을 위한 오래된 서점, 약국, 철물점 등이 사라지고, 관광객을 위한 카페와 기념품점이 늘어나는 걸 보고, 계동의 편안하고 소박한 분위기와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남기고 싶었던 그는 동네 상인들의 사진을 찍기로 마음먹고 일 년에 걸쳐 그분들을 설득하고 관찰해 촬영을 진행했다고. 어느새 십여 년이 지나서 사진들이 바래기도 하고 사장님이 바뀌기도 해서 지금은 반도 안 남았지만, 계동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풍경이 되었고, 여전히 이 사진을 구경하러 계동에 오는 이들도 있을 정도로 21세기의 계동을 세상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 작업을 진행한 김현식 사진가의 ‘물나무사진관’은 레트로 트렌드와 맞물려 정통 흑백 사진을 찍는 사진관으로 널리 알려졌다. 한국적 초상 사진을 구현하기 위해 흑백 필름으로 찍고 수작업으로 제작하는 은염(젤라틴 실버 프린트)이나 한지에 옻칠 처리해서 마무리하는 ‘한지 사진’을 만든다. 가족사진, 결혼사진, 우정 사진까지 ‘오늘의 나, 우리’를 기억할 수 있는 인상적 사진을 찍을 수 있다. 가수 아이유가 뮤직 드라마를 찍은 곳으로 그녀의 흑백 사진이 걸려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고, 건물 외벽을 뒤덮은 능소화가 활짝 핀 여름에는 계동의 포토 스폿으로도 유명하다.

물나무사진관이 있는 건물은 1960년대부터 계동 주민들의 대중목욕탕인 ‘중앙탕’으로 애용되다가 2015년에 ‘젠틀몬스터’의 쇼룸으로 변신해서 공간 브랜딩 성공 사례로 세간의 화제를 모았다. 지난해 말, ‘조선민화갤러리’로 다시 문을 연 이곳에서는 디자이너 출신의 이세영 대표가 지난 10여 년간 남다른 안목으로 모아 온 민화가 주제별로 전시되고 있다. 세간에 돌아다니는 민화들과는 상태로 보나 구성으로 보나 탁월하게 차이가 나는 수준급 민화들이다. 기존 목욕탕의 구조를 그대로 살리면서 ‘나비’ ‘모란’ 등 주제별로 전시를 이어 가고 있다. 또한 동시대 민화 작가들의 기획전과 대관 전시도 열어 계동에 제대로 된 민화의 전통을 잇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는 중이다.

골목 맞은편에는 ‘배렴가옥’이 있다. 1920년대에 청전 이상범의 화숙에서 공부한 화가 배렴의 집으로, 살던 이의 뜻을 이어 지금도 정기적으로 예술적 감성을 담은 미술 전시가 열리는 전통 한옥이다. 1926년에 지었으며 ‘ㄱ’자의 사랑채와 안채가 서로 마주보는 ‘튼 ㅁ’자형을 하고 있으나 입구가 각기 달라 공간이 독립적이어서 전통 한옥 연구가들에게 좋은 사례가 된다.

배렴가옥과 담을 함께한 한옥에서는 ‘베르너 팬톤을 초상하다 Vol.2’가 전시 중이다. 건축 스튜디오 ‘고약한 심보’의 변재홍 대표가 운영하는 디자이너 가구와 조명 전시 공간인 ‘심보의 취향’이다. 한국의 전통 가옥 안에서 자신이 까다롭게 고르고 고른 가구와 오브제들을 선보이고, 판매도 한다. 그의 가구에 대한 고집스러운 애정과 안목 덕분에 작은 한옥 공간 안에서 만나는 베르너 팬톤과 허먼 밀러, 루이스 폴센은 다른 어느 곳에서 만나는 것보다 더 근사하게 보인다.

화가 배렴의 ‘배렴가옥’은 전통 한옥 구조의 전시장으로 운영 중이다. 베르너 팬톤의 가구와 작품을 전시 중인 ‘심보의 취향’
. ‌고깃집에서 갤러리로 변신한 ‘뮤지엄헤드’. 전면의 콘크리트 벽이 인상적이다. 뮤지엄 2층에는 티 카페 ‘델픽’이 있다.
‌계동 일대에 근대 도시형 한옥을 집중 보급해 한옥의 명백을 잇게 한 정세권에 관한 자료를 전시 중인 ‘북촌한옥역사관’
물나무사진관의 뒤편에는 지난 12월에 ‘뮤지엄헤드’가 문을 열었다. 원래 고깃집이던 건물을 ‘사무소 효자동’의 서승모 건축가가 맡아 리모델링한 갤러리다. ‘미술에 광적인 사람’이란 뜻의 뮤지엄헤드는 건물 앞을 반 이상 가린 콘크리트 벽으로 새로운 개념의 전시 공간을 제안하고, 차별과 불평등 없는 조화로운 창작 공간을 꿈꾸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면서 화제가 되었다. 2층에는 뮤지엄헤드의 유수진 대표가 론칭한 프리미엄 티 브랜드 델픽을 맛볼 수 있는 ‘티카페 델픽’이 있다. 델픽 티를 공예가들의 차 도구에 내주는 세련된 프리젠테이션에 젊은 층의 호응이 뜨겁다.

계동길을 따라 중앙고등학교 쪽으로 더 올라가면 근대 도시형 한옥의 역사를 볼 수 있는 ‘북촌한옥역사관’이 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북촌에 진입하는 걸 막기 위해 전통 한옥을 여러 필지로 쪼개 소형 한옥으로 만들어 조선 사람들이 북촌에 터를 잡을 수 있게 한 이가 바로 정세권(건양사 대표)이다. 당시 계동 지역에 있던 한옥의 상황과 함께 그의 활약상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어 근대 한옥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알 수 있다.

북촌한옥역사관 주변으로 좁은 골목길을 꼬불꼬불 걸으면 중앙고가 나온다. 그 입구에는 아직도 배우 배용준의 사진이 크게 붙은 문방구가 있고, 그 앞으로 게스트 하우스들과 함께 나전과 옻칠공방, 소반공방, 목공예공방, 전통혼례보공방 등 크고 작은 공방들을 만나게 된다. 미리 예약을 하면 원데이 클래스를 통해 작은 소품을 만드는 전통 공예 체험을 할 수 있다.

글과 사진 신혜연(헤이컴 대표, 콘텐츠 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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