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구정 로데오 화려한 부활..MZ세대 '핵인싸'들의 놀이터
도산공원에서 약 100여m 걸어가면 나오는 압구정 카페 골목 입구. 이제는 압구정 로데오거리의 상징이 된 전통주 전문점 백곰막걸리 앞은 평일 이른 저녁인데도 긴 자동차 행렬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주차장에 차를 대려는 사람들과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려는 차량이 뒤엉켜 그야말로 북새통이다.
혼잡한 도로 한쪽은 들뜬 표정의 20~30대들로 북적인다. 벌써 대기줄이 늘어선 식당도 곳곳에 눈에 띈다. 다소 후덥지근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눈이 마주치는 행인들한테서는 마스크 속에서도 유쾌한 분위기와 청량한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
코로나19 여파가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상황이지만, 압구정 로데오거리는 그 충격에서 한발 비껴난 듯한 모습이다. 실제로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압구정 상권의 중대형 상가 공실률은 10.3%로 전년 동기(14.7%)보다 오히려 4.4%포인트 낮아졌다. 명동과 홍대, 이태원 등 기존 핵심 상권의 상가 공실률이 코로나19 전후로 크게 높아진 것과는 대조적이다.
젊음의 메카, 압구정 로데오거리가 부활했다. 굳이 ‘부활’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압구정 로데오거리가 다른 상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변화를 거쳐왔기 때문이다.

▶1990년대 힙한 젊은이들의 성지
▷과도한 임대료에 급격하게 쇠락
압구정 로데오거리는 갤러리아 백화점 맞은편에 ㄱ자 형태의 상권으로, 패션 의류 브랜드 직영매장과 직수입 멀티숍, 개인 디자이너숍 등 100여개의 의류 상가들이 밀집해 있는 지역이다.
1990년대 압구정 로데오거리는 당대 최고의 ‘핫 플레이스’였다. 1988년 국내 맥도날드 1호 매장과 한국 최초 원두커피 전문점 ‘쟈뎅’이 들어서는 등 새로운 문화의 요람 역할을 했다. 외국 유학생들로부터 전파된 이국적 취향과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반영되면서 힙한 젊은이의 성지로 떠올랐다. 특히 길 건너에 갤러리아 백화점 명품관이 들어서고, 우측에는 청담동 명품거리가 조성되면서 멋 좀 안다는 ‘패피(패션 피플)’들의 메카가 됐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수입 의류나 고가 명품은 압구정 상권이 아니고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한국의 ‘유행 1번지’라는 수식어와 함께 트렌드를 좇는 젊은이들이 끊임없이 밀려들었다. 이들을 겨냥한 고급 카페와 레스토랑도 차례로 문을 열었다.
잘나가던 압구정 로데오거리는 그러나 2000년대 중반 이후 급격하게 쇠락하기 시작했다. 너무 비싼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고 기존에 있던 가게들이 속속 빠져나가면서 상권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공실을 찾아보기 힘들었던 상가 건물에는 임차인을 구한다는 플래카드가 나붙었고, 불야성을 이루던 거리는 해가 지면 사람을 구경하기 힘들 정도로 썰렁해졌다.
인근에 ‘가로수길’이라는 새로운 상권이 등장한 것도 압구정 로데오거리 쇠퇴를 불러왔다. 한류 열풍과 의료관광으로 중국인 관광객들이 몰리는 가로수길에 뜨는 매장과 인기 프랜차이즈 업체들이 대거 진출하면서 젊은 세대 수요를 빨아들였다.
여기에 경리단길, 서촌, 성수동 등 신흥 소비 상권까지 급부상했다. 이에 따라 압구정 로데오거리만의 특색 있는 의류 매장과 멀티숍들도 하나둘 문을 닫으면서 굳이 찾아갈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상권이 됐다.
2012년 10월 분당선 압구정로데오역이 생기면서 부활 기대감이 커지기도 했지만, 침체된 상권을 살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투자자도 외면했다. 2013년 1건까지 떨어진 리테일 상가 거래는 이후에도 한 자릿수를 면치 못했다. 2010년 이후 2016년까지 매년 거래량이 1~4건 수준에 그쳤다. 압구정 로데오거리는 젠트리피케이션(세입자 내몰림)의 대표적인 사례가 됐다.

▶착한 임대료 운동으로 부활
▷외식업이 상권 주도하면서 업종 다양화
반전의 계기는 건물주들로부터 시작됐다.
2010년대 중반 압구정 로데오거리는 상가 5곳 중 1곳은 공실일 만큼 상황이 어려웠다. 이에 2017년 임대인 10여명이 모여 자발적으로 임대료를 30~50% 낮추는 ‘착한 임대료 운동’에 나섰다. 웬만한 강북 지역 메인 상권 점포보다 임대료가 더 낮다는 소문이 돌면서 오랫동안 공실로 방치돼 있던 점포들이 속속 채워지기 시작했다. 공실률이 줄었고 자치구 차원에서도 다양한 이벤트를 펼치면서 자연스럽게 거리가 활기를 되찾았다.
박종록 압구정 로데오 발전위원장은 “1년씩 상가를 비워두는 것보다는 합리적인 임대료를 제시해 상권을 살리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 착한 임대료 운동을 벌였다. 임대료가 낮아지자 근처의 도산공원 상권과의 시너지도 발생하면서 상권이 살아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코로나19를 거치면서 압구정 로데오거리는 과거의 명성을 되찾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활 포인트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우선 상권 포트폴리오의 다양화가 이뤄졌다. 임대료 인하와 함께 압구정 로데오거리에 급격하게 많아진 가게가 바로 음식점이다.
압구정 로데오거리가 한창 잘나갈 때는 건물주들이 의류나 잡화 판매점 같은 업종을 선호해 음식점이 들어오는 것은 반기지 않았다.
하지만 공실이 많아지면서 임차인 구하기가 어려워지자 건물주들은 콧대를 낮추고 적극적으로 음식점 임대를 받기 시작했다.
때마침 도산공원 일대와 청담동의 비싼 임대료에 고민하던 유명 셰프들이 압구정 로데오거리를 대안으로 선택하면서 자연스럽게 맛집 거리가 형성됐다. ‘젊은 감성’의 가게가 하나둘 생겨나자 20~30대 젊은 소비층 유입이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과거에는 의류점과 소매점 위주의 상권이었다면 현재는 외식업이 압구정 로데오거리 상권을 주도하고 있다.
의류 매장의 경우 유동인구가 중요하지만 음식점은 입소문을 타면 단골이 생겨 유동인구 영향을 상대적으로 덜 받는 특징이 있는 만큼 침체됐던 상권을 되살리기에 특효약이었던 셈이다.
압구정 로데오거리 부흥의 일등 공신으로 여겨지는 백곰막걸리의 이승훈 대표는 “2016년 매장을 낼 장소를 구하기 위해 이쪽 상권을 돌아다니다 보니까, 공실은 많았는데 이자카야부터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등 지금으로 치면 미슐랭 원스타, 투스타를 받을 만한 가게 수십 개가 곳곳에 숨어 있었다. 겉보기에는 황폐하지만 기회가 있다고 보고 승부를 걸었는데 이게 적중했다. 지금은 백곰막걸리 인근에만 술집이 10개가 넘어 대표적인 술집 거리가 됐다”고 말했다.

▷해외 유학생들의 새로운 놀이터로 각광
주력 소비층으로 떠오른 MZ세대 취향을 저격하는 ‘앵커 스토어(특정 상권을 대표하거나 대형 상가의 핵심이 되는 유명 점포)’가 압구정 로데오거리에 잇따라 문을 연 것도 거리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압구정 로데오거리의 장점 중 하나는 이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매장들이 많다는 것이다.
지난 4월 구르메F&B코리아가 압구정 로데오거리에 ‘메종 드 구르메’ 플래그십 스토어를 선보인 것을 비롯해 네덜란드 캐리어 브랜드 ‘수잇수잇’은 압구정점이 유일한 오프라인 단독 매장이다.
프리미엄 요가복 브랜드 ‘룰루레몬’도 아시아에서 가장 큰 매장을 압구정 로데오거리에서 운영 중이다. 이 밖에 덴마크 오디오 브랜드 ‘뱅앤올룹슨’, 스포츠 브랜드 ‘언더아머’ 등 압구정 로데오거리에서 플래그십 스토어를 운영하는 브랜드가 적잖다.
압구정 로데오거리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패션 편집숍도 매력 포인트다. ‘카시나 프리미엄’ ‘피나클’ ‘쇼퍼홀릭’ 등 1세대 편집숍이 압구정 로데오거리를 유행 1번지로 만들었듯, 여전히 독특한 콘셉트의 편집숍들이 끊임없이 생겨나면서 MZ세대의 발길을 잡아끌고 있다.
코로나19를 계기로 귀국한 해외 유학생들이 압구정 로데오거리로 몰려들면서 상권 활성화에 불을 지폈다는 재밌는 분석도 나온다.
코로나19 확산 초기 유학생들이 주로 모여 놀았던 이태원이 직격탄을 맞으면서 압구정 로데오거리가 대안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과거 압구정 로데오거리가 ‘오렌지족’의 성지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약 30년을 뛰어넘어 명맥이 이어진 셈이다.
뉴욕 브루클린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브런치 카페 고트델리, 영국의 빈티지한 감성을 듬뿍 담은 카페 겸 펍 ‘쿠데타’, 미국식 수제버거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선데이버거클럽’ 등 외국 감성을 느낄 수 있는 외식업장이 인기를 끄는 것이 같은 맥락이다.
마지막으로 지자체의 적극적인 협조가 든든한 지원군 역할을 했다.
강남구청은 지난해 5월부터 압구정 로데오거리의 과거 명성을 되찾고 특색 있는 보행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야간 경관 개선 사업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연말에는 거리 입구에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를 설치하고, 가로수마다 은하수 모형의 조명과 거리를 대표하는 조형물을 설치해 방문객들의 눈을 즐겁게 했다. 특히 압구정 로데오거리를 관광 명소로 활성화하기 위해 샹들리에 디자인의 미디어파사드와 안전한 보행을 돕는 보안등을 구간별로 24곳에 설치했다. 거리 공연도 매년 주최하고 있다.

▷주춤하던 꼬마빌딩 거래도 활발
압구정 로데오거리의 부활은 통계로도 나타난다.
한국부동산원 소규모 상가 공실률 통계에 따르면 2019년 말 6%였던 압구정 상권 공실률은 2020년 2분기부터 올 1분기까지 0%를 유지하고 있다. 코로나19 여파로 서울 소규모 상가 평균 공실률이 2019년 말 5.5%에서 지난해 말 최고 7.1%까지 높아졌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서울 소규모 상가 평균 공실률은 올 1분기 6.4%로 다시 낮아졌지만 비어 있는 소규모 상가가 아예 없는 압구정 상권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상대적으로 공실률이 높은 중대형 상가도 압구정 상권에서는 상황이 괜찮았다. 지난해 2분기만 해도 공실률이 16%를 웃돌았지만 이후 3분기 13.1%, 4분기 12.8%, 올 1분기 11.5%로 꾸준히 감소했다. 같은 기간 서울 광화문(7.2% → 23%), 명동(8.4% → 38.4%), 논현역(12.5% → 19%)은 물론 서울 평균(12% → 13%) 중대형 상가 공실률이 일제히 급등한 것과 대조적이다.
상권 침체기인 2017~2018년 압구정 로데오 주요 상권 월세는 권리금 없이 3.3㎡당 15만원 안팎까지도 떨어졌다. 2017년 이전 1500만원 하던 1층 상가 월세는 2017년 이후 750만원까지 낮아지기도 했다. 물론 최근에는 압구정로데오 상권이 다시 붐비기 시작하니 임대료 시세는 다시 3.3㎡ 30만~40만원대까지 높아져 있는 상태다.
일대 공인중개 업계에 따르면 압구정 로데오 메인 거리는 권리금 없이 월세가 3.3㎡당 35만~45만원 선에 형성돼 있다. 도산공원 쪽도 메인 도로는 3.3㎡당 30만~40만원대 중반, 골목은 3.3㎡에 15만~20만원, 비싼 곳도 30만원 선 수준이다. 일례로 33.1㎡(10평) 남짓한 1층(일부 2층) 한 음식점의 경우 최근 보증금 5000만원, 월 275만원에 임대 매물로 나왔는데, 기존 임차인이 권리금을 받길 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압구정 로데오 인근 A공인중개사사무소 관계자는 “여전히 많은 점포가 권리금을 안 받거나, 받아도 5000만원 안팎으로 강남권 치고 비교적 소액(?)에 시세가 형성돼 있다”고 전했다.
임대 시장이 활성화되기 시작하니 외면받던 빌딩 몸값도 높아졌다. 압구정로데오역 인근 선릉로 이면도로에 있는 한 빌딩(대지 371㎡, 건물면적 1139㎡)은 올 초 192억원에 주인이 바뀌었다. 대지 기준 3.3㎡당 1억7000만원이 넘는 금액에 매매가 이뤄진 것이다. 대로변에 위치해 입지가 더 나은 또 다른 빌딩(대지 606㎡, 건물면적 2528㎡)은 지난 5월 450억원에 계약서를 썼다. 3.3㎡당 2억4500만원가량에 거래된 셈이다.
이 밖에도 압구정 로데오거리 상권 일대에서는 지상 2~4층짜리 꼬마빌딩이 올 들어 70억원대 후반~90억원대 후반에 팔리는 등 잇따라 손바뀜이 이뤄졌다. 지난해에도 압구정 로데오거리 인근에서 크고 작은 빌딩이 8채나 사고팔렸다. 올 들어 가로수길 빌딩 매매가 전무한 것과 상반된다.

▷임대료 ↑…젠트리피케이션 주의해야
가까스로 부활한 압구정 로데오 상권이 계속 활황을 이어갈 수 있을까.
압구정 로데오 상권은 주변에 가구 수만 1만이 넘는 압구정 아파트 지구를 끼고 있어 배후 수요가 풍부하다는 장점이 있다.
다만 이런 장점을 십분 활용하려면 술집이나 20·30대 젊은 취향 옷가게 같은 ‘젊은 층 위주의 유흥 상권’보다는 배후 수요를 직접 겨냥한 업종이 고루 생겨나는 것이 상권이 오래 유지되는 데 유리하다는 분석이다.
박대원 상가정보연구소장은 “예컨대 고급 의류·잡화 편집숍과 명품 브랜드숍, 카페, 레스토랑 등이 있어야 동네 주민 수요를 겨냥하기 좋다”고 설명했다.
최근 들어 구현대, 한양 등 압구정 아파트들이 속속 재건축 조합을 설립한 것도 압구정 로데오거리 상권에는 호재로 작용할 만한 대목이다. 현재 압구정동에서는 중층 아파트 24개 단지들(1만466가구)을 6개 지구단위계획구역으로 나눠 재건축 사업을 추진 중인데 최근 4구역이 6개 구역 가운데 처음으로 조합설립을 인가받으면서 재건축 사업에 속도를 내는 분위기다.
아파트가 재건축되면 기존보다 거주 인구가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압구정 지역 집값 시세를 감안하면 구매력이 상당한 배후 수요가 상당히 확보되는 셈이다. 돈을 쓸 여력이 되는 1만여가구 이상 배후 수요를 둔 상권이 국내에는 많지 않다. 오동협 빌딩로드 대표는 “압구정 아파트지구 재건축을 보고 장기적 관점에서 인근 상권에 투자하려는 자산가도 꽤 된다”고 설명했다.
다만 최근 압구정 로데오 상권 임대료가 상승세를 보이다 보니 한쪽에서는 다시 젠트리피케이션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대형 자본이 유입되고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을 겪으며 상권 특색을 잃어간 가로수길처럼, 압구정 로데오 상권 역시 임대료가 오르는 과정에서 이런 현상이 또 한 번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조현택 상가정보연구소 연구원은 “최근 내수 경기가 침체된 데다 이커머스 시장이 확대되면서 오프라인 골목 상권 매력이 예전 같지 않다”며 “상권 특색을 유지하지 않으면 상권 호황이 오래 유지되기는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건물주와 지자체가 함께 합리적인 수준의 임대료가 어느 수준인지, 또 해당 지역의 상권을 살릴 수 있는 특화된 콘텐츠가 무엇인지 등을 고민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류지민 기자 ryuna@mk.co.kr 정다운 기자 jeongdw@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16호 (2021.07.07~2021.07.13일자)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매경이코노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