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축구의 시작, AC 밀란과 아리고 사키의 운명적 만남

서창환 2016. 11. 3.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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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서창환 기자]

 아리고 사키 감독과 AC 밀란 선수들
ⓒ 위키피디아
1970년대 이탈리아 세리에 A 주도권은 AC 밀란이 쥐고 있었다. '골든 보이' 지아니 리베라를 필두로 화려한 스쿼드를 앞세워 수많은 우승을 일구며 전성기를 보냈다. 그러나 AC 밀란은 10번째 스쿠데토인 1978-1979시즌 우승 이후 최악의 상황에 빠지게 된다.

AC 밀란은 에이스 리베라의 은퇴 후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승부조작 스캔들에 연루돼 1980-1981 시즌 세리에 B로 강등 당했다. 원체 갖고 있던 힘이 강해 세리에 B 우승 후 다음해 1부 리그로 복귀했으나 한 번 떨어진 기세는 쉬이 오르지 않았다. 

1982-1983 시즌 AC 밀란은 어이없게도 세리에 A 복귀 후 다시 한 번 세리에 B로 떨어졌다. 이후 1987년까지 약 9년 동안 우승 트로피를 만지지 못했다. 이 시기가 AC 밀란의 최대 암흑기였다.

신발 판매원 출신 감독을 영입하다

 아리고 사키 감독
ⓒ AC 밀란 공식 인스타그램
나긴 부진의 늪에 빠진 AC 밀란에게 반전의 계기가 찾아왔다. 1987년, 이탈리아 총리를 지낸 바 있는 미디어 재벌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팀을 인수해 자금 운용에 숨통이 틔었다. 베를루스코니는 마르코 반 바스텐과 루드 굴리트 같은 스타 플레이어를 영입해 스쿼드를 살찌웠다. 훌륭한 선수들이 하나 둘 모이면서 이들을 이끌 지휘자에 대한 관심도 올라갔다. 주인공은 현역 선수 경험이 전무한 아리고 사키 감독이었다.

당시 사키 감독은 파르마를 지휘하며 프로 무대에 이름을 알린지 2년 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1986-1987 코파 이탈리아에서 AC 밀란을 1-0으로 격파하는 이변을 연출해 감독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1987년 2월, AC 밀란 보드진은 사키 감독의 뛰어난 전술적 혜안을 높이 사 그를 감독직에 임명했다. 

사키 감독이 처음 로쏘네리의 수장이 됐을 때 언론은 "팀의 명성에 걸맞은 않은 지도자"라며 그를 비판했다. 그러자 사키 감독은 "기수(騎手)가 되기 위해서 말이 될 필요는 없다"는 명언을 남기며 우려를 순식간에 잠재웠다. 신발 판매원으로 일하며 축구를 공부한 사키 감독의 신데렐라 스토리가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9년 만의 리그 우승 그리고 오렌지 삼총사
 프랑크 레이카르트, 마르코 반 바스텐, 루드 굴리트
ⓒ AC 밀란 공식 홈페이지
구단주 베를루스코니의 선택은 적중했다. 사키 감독은 AC 밀란에 부임한 1987-1988 시즌 리그 우승을 달성해 9년 동안 우승하지 못한 한을 풀었다. 그러나 아직까진 사키 감독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경기력이었다. 당시 리그 우승을 이룬 주요 멤버로는 루드 굴리트, 마르코 반 바스텐(이상 FW), 프랑코 바레시, 마우로 타소티(이상 DF)가 있었다. 공격과 수비라인은 흠잡을 데가 없지만 중원 압박을 중시한 사키 감독의 콤팩트 축구를 실현할 선수가 부재했다.

이에 사키 감독은 다음 시즌을 대비해 아약스에서 맹활약 했던 프랑크 레이카르트를 영입한다. 이로써 AC 밀란은 그 유명한 오렌지 삼총사(반 바스텐, 루드 굴리트, 레이카르트)를 보유하게 됐고 사키이즘(Sacchism)을 선보일 준비를 마친다.

사키이즘(Sacchism)을 완성시키다

레이카르트까지 합류하자 AC 밀란은 거침없이 전진했다. 리그 우승은 이루지 못했으나 대신 유럽 무대를 호령하며 사키이즘의 등장을 만천하에 알렸다. 로쏘네리 군단은 1988-1989 시즌 유러피언컵(UEFA 챔피언스리그 옛 명칭)에서 아홉 경기를 치르면서 한 경기도 패하지 않고 우승을 차지했다. 

특히, 레알 마드리드와 치른 4강 2차전 5-0 승리와 슈테아우아와 벌인 결승전 4-0 완승은 사키이즘의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준 경기였다. 이어 다음 시즌에도 디펜딩 챔피언의 위용을 뽐내며 결승전에서 벤피카를 꺾고 유러피언컵 2연패를 이뤘다. 사키 감독이 일군 2연패는 지금까지 마지막 UCL 연속 우승 기록으로 남아있다. 

사키 감독은 다른 팀들이 쓰지 않던 전술을 구사해 세계 축구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전까지 생소했던 압박, 지역방어, 오프사이드 트랩 같은 수비 전술을 구사해 '공간'의 중요성을 보여줬다. 삼선의 간격을 30m 이내로 유지해 촘촘한 공·수 대형을 만드는 게 사키이즘의 핵심이었다. 촘촘해진 삼선은 최대한 라인을 전진해 볼 흐름을 가급적 높은 지점부터 장악했다. 높아진 수비라인으로 인해 배후 공간이 열린 단점은 오프사이드 트랩으로 상쇄했다. 

사키가 구사한 콤팩트 축구의 강력함을 보여주는 예를 하나 들겠다. AC 밀란이 9년 동안 리그에서 무관 신세를 면치 못하는 동안 세리에 A는 디에고 마라도나를 앞세운 나폴리가 지배하고 있었다. 이전까지 성행한 맨투맨 수비로 마라도나를 막기란 불가능했다. 

사키 감독은 그 해결책으로 공간을 활용한 수비 전술을 구사해 나폴리와의 경기에서 마라도나를 묶는 데 성공했다. 공간을 활용한 그의 콤팩트 축구는 AC 밀란이 다시 세리에 A와 유럽 무대 강자로 부상할 수 있게 만든 결정적 전술이었다.
 
사키이즘은 지금도 유효하다

유러피언컵 2연패 이후 사키 감독은 1991년 이탈리아 대표팀을 맡기 위해 로쏘네리 군단을 떠났다. 명장의 갑작스런 퇴장에 걱정스런 시선들이 둘러쌌으나 후임으로 임명된 카펠로 감독은 사키 감독의 유산을 활용해 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켰다.

전임 감독의 철학을 계승, 발전시킨 카펠로 감독의 AC 밀란은 전례 없는 58경기 연속 무패 행진을 세우며 무적의 팀으로 거듭났다. 

콤팩트 축구를 창조한 사키 감독은 물러났으나 수많은 감독들이 그의 전술을 연구해 발전시켰다. 현재 리버풀을 이끄는 위르겐 클롭 감독의 '게겐 프레싱' 역시 콤팩트 축구를 지향하는 사키이즘의 연장선상이라 할 수 있다. 상대팀에게 볼을 뺏길 경우 모든 선수들이 달려드는 강력한 압박은 사키 감독의 그것과 많이 닮았다.

80년대 후반 이탈리아와 유럽을 호령하며 현대 축구의 근간을 만든 사키 감독. 이제는 일선에서 물러났으나 여전히 그의 정신은 필드 위에 살아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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