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에 '역적 3관왕' 이완용의 집이 있다

유영호 2016. 8. 7.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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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동천을 따라 서촌을 걷다 31] 생을 마감한 옥인동 가옥

[오마이뉴스 글:유영호, 편집:김대홍]

'역적 3관왕' 이완용

최근 서울 사대문 안에선 북촌에 이어 서촌이 떠오르는 관광지다. 이에 종로구청에서는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을 위해 다양한 탐방장소와 내용, 그리고 그곳에 쉽게 찾아갈 수 있도록 지도를 담은 자료를 배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서점가에는 이곳 서촌에 관한 여러 소개 책자들이 쏟아지고 있는 현실이다. 그런데 거의 모든 자료와 서적들엔 이상하게 서촌에서 가장 가 볼만한 곳이라고 생각되는 이곳이 빠져 있다.

흔히 5천만, 아니 8천만 우리 민족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매국노 이완용의 가옥이 바로 그 장소이다. 그저 그의 집이 있었던 터가 아니라 조선총독부 바로 옆에 신축하여 살다가 숨을 거둔 그런 곳이다.

참고로 을사오적 등 수많은 매국노들이 있었지만 유독 이완용을 최고의 매국노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 3관왕을 차지한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표>

을사오적 제2차 한일협약(을사조약)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
정미칠적 제3차 한일협약(한일신협약) 이완용, 송병준, 이병무, 고영희, 조중응, 이재곤, 임선준
경술국적 한일병합조약 이완용, 윤덕영, 민병석, 고영희, 박제순, 조중응, 이병무, 조민희
※ 참고로 제1차 한일협약은 1904년 러일전쟁 진행 중 체결된 것으로 정식명칭은 '한일 외국인 고문 용빙에 관한 협정서'이다.

 이완용이 1913년 새로 지어 1926년 사망할 때까지 거주한 종로구 옥인동 가옥
ⓒ 유영호
먼저 이완용은 언제부터 이곳으로 이사와 살았는지 알아보자. 그의 집은 본래 서울역 인근의 약현(현 중림동)에 위치했다. 하지만, 헤이그 밀사사건(1907)를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킨 뒤 '정미7조약'까지 체결하는 데 앞장 섰기 때문에 그에 대한 조선인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그리하여 결국 그의 집은 방화되고 조상의 신주까지 불태워졌다. 이완용은 신변의 위협을 느꼈다. 그 뒤 일본인 거주지인 왜성대구락부나 장교동, 저동, 인사동 등을 전전했다. 뿐만 아니라 현 중구 저동에 살던 1909년에는 인근 종현성당(현 명동성당)에서 벨기에 총영사가 주최한 행사에 참석했다가 이재명 의사에 의해 살해당할 뻔한 위기까지 겪었다.

 1909년 12월 23일 낮 12시에 이재명 의사에 의해 칼에 찔려 대한의원에 입원했다는 1909년 12월 24일자 황성신문 보도기사
ⓒ 위키백과
이런 불안한 신세로 여러 해를 보내다 한일병합이 이뤄지고 새 집을 지어 1913년 12월 이곳 옥인동으로 이사했다. 이에 대해 이완용의 전기 <일당기사(一堂記事)>(1927)에는 "조선조와 서양조를 혼용하고, 내사(안채)는 조선 구식에 약간 개량을 더하고 외사(바깥채)는 순양식으로 한 2층짜리 건물"이라고 집 구조가 기술돼 있다.

구체적으로 옥인동 2번지(646평), 19번지(2817평), 18번지(280평) 등 3필지로 총 3700평 규모이다.(<오래된서울>(동하, 2013) 참조) 1913년 신축 당시와 그의 장례식 때 신문에 보도된 아래 사진과 비교해보면 같은 건물임을 확인할 수 있다.

 경성시가도(1927)에 나타난 종로구 옥인동의 이완용 가옥
ⓒ 유영호
 이완용의 옥인동 가옥 신축 기사(1909년 12월 6일자 매일신보)
ⓒ 매일신보
 이완용 장례식 기사(1926년 2월 13일자 매일신보)에 나타난 이완용가옥
ⓒ 매일신보
당시 조선은 일제의 식민지가 돼버렸고, 그에 대한 공로로 이완용은 총독부로부터 백작이란 귀족 작위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 거금의 은사금을 받고 일선에서 물러난 채 이곳에서 여유있게 생활했던 것이다.

세상의 힘이 어떻게 변하는지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지 그는 영특했다. 심지어 사망 전 아들에게 "내가 보니까 앞으로 미국이 득세할 것 같으니 너는 친미파가 되거라"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였다.

그에게 이미 조국이란 없었던 것이다. 또 그는 남편을 잃은 큰며느리와 사통한다는 소문에 내내 시달렸으며, 그가 죽기 직전에는 함께 살던 조카 이영구가 암살을 기도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하지만 그에게도 죽음이란 피할 수 없는 것. 그는 1926년 2월 숨졌고, 바로 이 집에서 장례식을 치렀다. 이완용의 죽음에 대하여 당시 <동아일보>는 "무슨 낫츠로(낯으로) 이 길을 떠나가나"라는 제목의 1면 사설을 게재했다. 이 글은 이완용을 "팔지 못할 것을 팔아서 누리지 못할 것을 누린 자"라고 규정했다. 시대의 명문을 남긴 셈이다.

하지만 이 기사는 당장 총독부에 걸려 당일 자 신문 전체 발매금지 처분을 당하고 만다. 이에 <동아일보>는 해당 사설을 삭제하고 호외로 저항하였다.

 동아일보에 실린 이완용 부음기사(1926.2.13)
ⓒ 동아일보
 이완용 부음기사로 인해 총독부에 의하여 발매금지 처분을 받고 해당 기사를 삭제한 채 호외로 뿌린 동아일보
ⓒ 동아일보
이완용 사후 이 집은 둘째 아들 항구와 장손 병길에게 상속됐지만, 해방 후 미군정은 적산으로 징발해 군속들에게 나눠줬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여러 필지로 분할됐다.

현재 그 분할된 필지 위에 옥인교회, 아름다운재단, 길담서원, 국민은행 청운동지점 등 수많은 시설 및 주택이 올라섰다. 이러면서 이완용 가옥의 안채는 철거되고 없지만 가장 주요한 건물이었던 바깥채는 옥인동 19-10과 19-13번지에 당시의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

'친일파박물관'의 설립을 기대한다, 바로 이곳에

문화유산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며 그것이 후대에 전하는 의미도 다양하다. 우리에게 문화유산이란 자랑스러운 것만 있는 게 아니다. 치욕의 역사도 그대로 보존해 다시는 그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교육해야 할 것이다. 독일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일본의 '히로시마 원폭 돔' 등 그 예를 들지 않더라도 충분히 공감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나는 이곳 이완용 가옥이 사라지기를 원치 않는다. 매국의 흔적을 낱낱이 밝혀내고 그것이 역사에 기록돼 영원히 후대에 전해진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 그래서 나는 이곳 이완용 가옥이 일명 '친일파박물관'으로 재탄생되기를 바란다.

현재 이곳은 민간인 소유로 돼 있다. 하지만, 문화재청이나 서울시에서 이를 수용할 수 있겠다. 그 구체적인 방식을 선택하는 건 정부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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