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나는 오늘 북유럽 디자인을 산다

주머니 얇아도 이제는 탐낼 수 있다

가성비 따지는 새 소비 패턴 파고들어
젊은 세대는 물론 3040 주부들도 열광
북유럽 디자인 제품 10여 년 전 첫 등장
당시엔 고가 위주라 접근 쉽지 않아
“이제는 값보다 세련된 디자인에
디자인을 잘 모르는 사람도 한번쯤 들어봤음직한 ‘스칸디나비아 디자인’. 말 그대로 노르웨이·덴마크·스웨덴·핀란드 등 북유럽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위치해 비슷한 문화·역사적 배경을 공유한 나라의 디자인을 일컫는다. 자연친화적인 색감, 그리고 단순함을 내세운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이 국내에 소개된 지 10년도 더 넘게 흘렀지만 최근 다시 키워드로 떠오르고 있다. 물론 달라진 게 있다. 과거에는 유명 디자이너의 가구 등 장인 정신을 내세운 고가품 중심이었다면 이제는 누구든 언제나 살 만한 값 싼 생활 소품으로 영역을 넓혔다는 점이다. 2014년 경기도 광명에 문을 연 ‘이케아’를 시작으로, 지난달 국내에 첫 선을 보인 덴마크 브랜드 ‘플라잉 타이거 코펜하겐’이 이런 흐름에 불을 지피고 있다. 이른바 ‘어포더블 스칸디나비아 스타일(Affordable candinabia Style, 적당한 가격의 스칸디나비아 스타일)’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빨강·노랑·초록 색깔 입힌 독특한 건전지

서울 소공동 롯데 영플라자 1층의 타이거 매장에 발을 딛자마자 매장 직원들의 우렁찬 복창이 들려온다. 생활용품 편집숍인데도 마치 유명 맛집처럼 손님들이 줄 서서 기다릴 정도로 인기다.
사실 타이거의 인기는 일찌감치 예견됐다. 국내 입성 소식이 인스타그램·페이스북 등 SNS를 통해 입소문이 난 덕인지 소공동뿐 아니라 하루 뒤 문을 연 현대백화점 판교점 모두 오픈 첫 날 그야말로 발디딜 틈도 없이 북새통을 이뤘다. 업체 측은 “첫날에만 9000여 명이 다녀갔다”며 “젊은 층은 물론 트렌드에 민감한 3040 주부들이 주고객층”이라고 말했다.
이곳의 무기는 물론 스칸디나비아 감성의 색다른 디자인이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디자인 수준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이라고 할 수 있다. 한번 쓰고 버리는 건전지에도 빨강·노랑·초록 디자인을 입히고, 빨대 중간엔 수염 장식을 달아놓았다. 아무리 디자인이 아기자기하게 예뻐도 값이 비싸다면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지만 이곳 제품은 대략 5000원을 넘지 않는다. 브랜드 이름을 덴마크 통화 ’10 크로네(텐 크로네, 한화 1350원)‘와 비슷한 발음(타이거)에서 따온 데서도 알 수 있듯 전체 제품의 80%가 8000원을 넘지 않는다. 매장을 찾은 강영실(26·어린이집 교사)씨는 “사소한 물건에 디자인에 신경을 많이 쓴 데다 가격 대비 품질이 훌륭해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타이거의 흥행은 2년 전 이케아를 연상시킨다. 이케아 역시 싸게 살 수 있는 예쁜 북유럽 리빙 브랜드로 국내 정식 입성 전부터 관심을 모았고, 2014년 12월 개장일 당시 매장에 들어가기 위해 1시간 넘게 줄을 선 끝에 하루에만 2만 8000여 명이 방문했을 정도로 선풍적 인기를 모았다.
10만원대 책상, 20만원대 침대 등 저렴한 가격이 매력적이긴 하지만 이게 전부는 아니다. 스칸디나비아 특유의 세련되면서도 질리지 않는 디자인이 흥행의 주요 요인이다. 개장 2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주말이면 주차대기시간만 40분이 걸릴 정도다.
홍대 카페서 먼저 경험한 스칸디나비아
북유럽 디자인이 국내에 알려지기 시작한 건 2000년 전후지만 대중들이 본격적으로 접한 시기는 2007년 즈음이다. 당시 트렌디하다던 가로수길이나 홍대 앞 카페·레스토랑은 다들 비슷비슷한 분위기였다. 선명한 컬러와 단순한 형태, 그러면서도 세련돼 보이는 의자나 테이블 한두 개는 꼭 있었기 때문이다. 정체는 아르네 야콥센의 에그 체어, 에로 아르니오의 볼 체어 등 이름난 북유럽 디자이너들의 고가 제품이었다. 물론 알고 보면 디자인만 고스란히 베낀 중국산 카피가 대다수였지만 어쨌든 간결하고 실용적인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을 많은 사람들에게 노출하는 효과가 있었다.
이후 북유럽 디자인은 점점 더 많이 눈에 띄었다. ‘에그 체어 탄생 50주년 기념전’ ‘핀율(덴마크 가구 디자이너) 전시’ 등 북유럽 디자인을 주제로 한 크고 작은 전시가 종종 열렸고, 서울 청담동 ‘10 꼬르소 꼬모’처럼 최신 트렌드를 보여주는 편집매장 곳곳에 유명 북유럽 디자이너의 오리지널 가구가 놓였다. 신라·파크하얏트·워커힐 등 특급 호텔까지 스칸디나비아풍의 미니멀리즘 인테리어를 선보이며 스칸디나비아 스타일에 힘을 실었다.
이렇게 공공장소에서 접한 숱한 제품은 보통 소비자들이 북유럽 디자인에 대한 ‘감’을 잡는 충분한 경험이 됐다.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는 “가구를 시작으로 조명과 그릇 등 북유럽 리빙 제품들이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이 비슷한 시기에 로얄 코펜하겐이나 이딸라 등 고급 북유럽 그릇·소품 브랜드가 국내에 정식 수입되기 시작했고, 서울 청담동·논현동 일대에 북유럽 디자인 제품을 취급하는 편집숍도 하나둘씩 생겨났다.
하지만 문제는 역시 가격이었다. 찰스 임스의 라운지 체어는 700만원대, 찻잔 한 세트도 20만원을 훌쩍 넘었다. 컬렉터가 아닌 이상 집을 꾸미기 위해 쉽게 지갑을 열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대중적 관심만큼 대중적 소비가 이뤄지지 못한 셈이다.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보통 사람 입장에선 ‘3대가 쓸 만큼 튼튼한 제품을 장인 정신을 갖고 만든다’는 당시 스칸디나비아 제품과의 접점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이케아가 제품 모델명을 굳이 스웨덴어로 짓는다거나, 타이거와 비슷한 시기에 국내에 들어온 중국 생활소품 브랜드 ‘미니소’가 실제로는 스칸디나비아스러운 디자인이 아님에도 굳이 북유럽 디자인이라고 홍보하는 것 모두 이런 ‘브랜드 가치’를 이용한 사례다. 계원예술대 하지훈 교수(가구디자인과) 역시 “이케아나 타이거에 사람이 몰리는 건 단순히 예뻐서라기보다 북유럽이라는 브랜드를 싸게 살 수 있기 때문”이라면서 “국경이 사라지는 글로벌 시장에서 오히려 국가 정체성이 부각되는 독특한 소비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최근의 소비 패턴과 맞아 떨어지는 측면도 있다. 서울대 전미영 교수(소비트렌드학)는 “올해의 소비 트렌드 키워드 중 하나가 바로 가성비(가격 대비 제품 만족도)”라면서 “단순히 이름만 보고 사는 과거와 달리 가격 대비 품질과 성능을 따지는 합리적 소비자가 늘어나는 것도 어포더블 스칸디나비아 스타일이 인기를 끄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값비싼 럭셔리 제품을 얼마나 휘감는냐보다 남들이 모르는 브랜드를 얼마나 알고, 얼마나 먼저 소비하느냐가 더 트렌디한 사람으로 평가되는 분위기라 합리적인 가격의 제품이 자리를 잡기가 더 쉬워졌다는 말이다.
고가와 저가 제품을 섞어 꾸미는 이른바 ‘믹스앤매치’형 쇼핑 트렌드도 한 몫 했다. SPA 브랜드인 유니클로의 티셔츠에 최고급 에르메스 스카프를 두르듯, 비싼 스칸디나비아 의자에 책장은 이케아로 사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한국트렌드연구소 김경훈 소장은 “개성이 중시되면서 저렴한 상품으로도 멋을 내는 칩 시크(Cheap-Chic) 상품이 다양해졌다”며 “얼마짜리를 사느냐보다, 어떻게 꾸미느냐가 더 중요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어포더블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이 확산되고 있지만 일부에서는 문제제기를 하기도 한다. 겉모양만 카피한 저가의 중국산 제품이 진짜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을 왜곡한다는 주장이다.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이라는 건 단순히 외양만을 일컫는 게 아니라 그 디자인의 근간인 장인 정신, 그리고 시대를 초월한 내구성까지 포함한 개념인데 정작 그런 요소가 무시되고 있다는 우려다. 하지만 북유럽 리빙 제품 편집숍 ‘덴스크’의 김효진 대표는 “가격을 떠나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이란 삶에서 꼭 필요한 것,그리고 인간에게 편안한 것을 만드는데 초점을 둔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꼭 장인이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앞서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좋은 디자인이 먼저가 아니냐”며 “그런 게 디자인의 민주주의”라고도 덧붙였다.
시끄럽고 소란스럽지만 내 삶의 선택권을 넓혀주는 민주주의, 디자인에서도 그런 걸 누릴 수 있는 시대가 왔다.
| 원스톱 쇼핑 가능한 라이프스타일 편집숍
사실 플라잉 타이거 코펜하겐 이전부터 이미 국내에서도 저렴한 가격에 개성 있는 제품을 파는 라이프스타일 편집숍은 여러 군데가 있었다. 이케아·타이거처럼 북유럽 스타일을 내세우진 않았지만 각각 독특한 디자인이 있고, 여러 품목을 갖춰 원스톱 쇼핑이 가능하다는 게 공통적이다. 주요 리빙 브랜드의 특징을 정리했다.
플라잉 타이거 코펜하겐
서울 소공동 롯데영플라자 1층과 현대백화점 판교점 두 군데가 있다(연내 가로수길·분당 AK 등 오픈 예정). 가정용품부터 전자제품까지 17가지 카테고리에 3000여 품목을 선보인다. 한 달에 한 번씩 테마가 바뀌고, 2주마다 신제품이 나온다. 패션 SPA브랜드처럼 제품 순환이 빨라 원하는 걸 발견했을 때 바로 사지 않으면 다음 번에 매장을 방문해도 다시 살 수 없을 수도 있다. 특히 유명 아티스트와의 협업 제품이나 베스트셀러는 각국 입고 물량이 한정돼 더 빨리 매진된다. 타이거는 28개국에 진출해 있는데, 숟가락·포크로 장식한 벽걸이 시계, 플라스틱 튜브 케찹통을 본딴 필통, 골드바 모양 자석 등이 베스트셀러로 꼽힌다.

이케아
2014년 12월 광명에 1호점을 냈다. 매장 내 65개의 쇼룸에서 소파부터 냄비까지 약 8600여 가지 제품을 판매하며, 다양한 홈퍼니싱(집 꾸미기) 아이디어 제안을 위해 매년 새로운 테마의 캠페인을 진행한다. 매년 새로운 제품이 일부 출시되기는 하지만 1인용 암체어 포앵(POANG)이나 책장 빌리(BILLY)등 길게는 40년 넘게 동일한 디자인을 유지하는 스테디셀러 위주로 상품이 구성되어 있다.




글=이도은·김민관 기자 smile83@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kimkr8486@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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