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길의 영화읽기]'넘버3' 조필의 마약왕 도전기

이종길 2018. 12. 23.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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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마약왕' 스틸 컷

※ 이 기사에는 영화 스포일러가 될 만한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영화 '마약왕'은 철저하게 송강호가 연기하는 이두삼만 조명한다. 나머지 배역에는 관심이 없다. 이두삼의 아내 성숙경(김소진) 정도를 제외하면 소모품에 불과하다. 배두나가 그리는 김정아는 요정 마담 출신 로비스트. 이두삼이 던지는 추파에 시큰둥하다. "내일 언제쯤 시간 되십니까?" "내일 바쁜데." 벤츠 SL350 카브리올레로 유혹해도 개의치 않는다. "돈만 많은 거 딱 질색인데." 드라이브를 한 차례 즐기고 둘은 연인이 된다. 김정아가 마음을 여는 계기는 설명하지 않는다. 이두삼의 행위에서도 가늠할 수 없다. 그녀와 처음 인사를 나눌 때부터 자신감이 넘쳤다. 김정아는 요정 출신으로서의 면모로, 로비스트로서의 활동도 나타나지 않는다. 모두 구사장(최덕문)의 설명으로 대체된다. 조정석이 연기하는 김인구도 다르지 않다. 이두삼을 쫓는 검사. '범죄와의 전쟁 : 나쁜놈들 전성시대(2011년)' 속 조범석(곽도원)이나 '내부자들(2015년)'의 우장훈(조승우)과 흡사하지만 왜 마약수사에 집착하는지 등의 이유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두삼을 반드시 잡겠다는 집념마저 간소화돼 갈등이 고조되는 순간에도 긴장을 유발하지 못한다.

영화 '마약왕' 스틸 컷

마약왕은 조연들에 대한 묘사도 형편없다. 이두삼과 함께 마약사업을 하는 최진필(이희준)은 비중 있게 묘사되다가 일순간 사라진다. 서상훈(이성민)과 김반장(유재명)은 비리를 저지르는 공무원을 가리키는데 그치며, 구사장은 이두삼과 김정아의 연결고리 역할만 하고 자취를 감춘다. 마약을 제조하는 백교수(김홍파)는 몰래 노하우를 습득한 이두삼이 돈을 건네자 그대로 퇴장한다. 강렬한 첫 등장을 고려하면 모두 아쉬운 매듭이다. 이두삼은 백교수를 인상적으로 소개한다. "필로폰을 이 땅에 뿌리내리신 단군 할아버지 같은 분이시다." 수식어에 어울리는 존재감은 부여되지 않는다. 이두삼의 도약을 위한 발구름판에 불과하다. 그래서 마약을 제조하는 모습만 그려지고 가차없이 잘려나간다. 일부 배역들은 나오는 목적마저 흐릿하다. 중앙정보부 서열 3위로 소개되는 함실장(최귀화)이 대표적이다. 이두삼의 사업 활로만 넓혀주고 퇴장한다. 갈등을 빚는 장면 등은 그려지지 않는다. 이두삼은 앞서 중앙정보부 소유의 배를 타고 밀수하다가 적발돼 징역살이한다. 국가정보원이 세월호의 실소유주라는 의혹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 그러나 함실장이 단선적으로 그려져 그 이상의 무언가는 기대할 수 없다.

영화 '마약왕' 스틸 컷

얕은 인물 관계 위에서 송강호는 '넘버3(1997년)'의 조필로 회귀해 원맨쇼를 한다. 드라마를 혼자 이끌 뿐 아니라 코미디도 도맡는다. 자연스러운 대화나 특별한 상황에서 비롯된 재미와는 거리가 멀다. 대부분이 과잉되거나 비현실적인 연기로 도배돼 있다. "(흥분한 어조로)내 너를, 육영수 여사 알지? 육영수! 내가 그렇게 만들어 줄 거다. 어이."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내 인생은 바람이 8할이고, 뽕은 교수가 8할 아닙니까?" "메이드 인 코리아! (발음을 심하게 굴리며)메이드 인 코리아?" "(아내에게 스카프를 매주며)문익점 선생님도 목화씨 갖고 올 때 신고 안 했다. 어이구야! 사람이 달라 보인다 아이가." "금이나 뽕이나 제 손에 들어왔다 하면 다 돈이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정색하며)살이 쪘나. 왜 이렇게 답답하냐?" "(목소리를 깔고)김구 선생 어머니가 옥바라지 어떻게 했는지 알지? 이제 우리 집안은 너한테 달렸다." 오로지 재미를 전하려고 코미디를 남발하는 경우도 빈번하게 나타난다. 이두삼이 떼돈을 벌고 아주머니들 앞에서 허세를 부리는 신이 그러하다. 아내 성숙경의 절대음감이라는 소개에 노래를 부른다. "도오. 레에. 미이. 파아" 근래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도 멀리하는 단순한 개그. 실속 없이 기세를 드러내는 장면이 여러 차례 나오는 점을 감안하면 불필요하다.

영화 '스카페이스' 스틸 컷

송강호는 '택시운전사' 등에서도 전반부에 화학조미료나 다름없는 개그를 한다. 관객에게 친숙하게 다가가 후반부의 비극을 극대화하는데 일가견이 있다. 하지만 이두삼과 같은 배역의 묘사에서는 통할 수 없다. 마약을 제조하고 유통하는 범죄자로, 1970년대 고도성장이 낳은 괴물을 표방하기 때문이다. 애초 관객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요소가 적다. 우민호 감독은 풀어내기 어려운 전개 위에서 흥망성쇠를 보여주기에 급급하다. 유신시대와 이두삼의 욕망 사이에서 시종일관 갈팡질팡한다. 특히 이두삼과 국정원·검찰·경찰의 관계를 끈끈하게 엮지 못해 말하려고 하는 바조차 뚜렷하게 제시하지 못한다. 더그 라이만 감독의 '아메리칸 메이드(2017년)'와 크게 대조된다. 이 영화에서 민항기 1급 조종사 배리 씰(톰 크루즈)은 CIA 요원 몬티 쉐퍼(도널 글리슨) 덕에 떼돈을 번다. 그러나 첩자 노릇을 요구받으면서 쫓기는 신세로 전락한다. 정부의 고도성장 속에 탄생한 괴물의 비참한 말로라고 할만하다. 이두삼도 정부의 도움을 받아 큰돈을 거머쥔다. 하지만 그 관계는 빠른 편집과 함께 간소하게 나타난다. 분량으로 따져도 깡패, 경찰 등의 힘을 빌려 승승장구하는 시퀀스의 1/4 수준. 후반에 이르러서는 이해관계가 전혀 없는 김인구에게만 위협을 받는다. 그래서 별다른 긴장을 유발하지 못한 채 표류하고 만다. "이 나라는 내가 다 먹여 살렸다 아이가"라는 대사가 노숙자의 공허한 푸념처럼 들리는 이유다. "저 건물도, 저 다리도 죄다 내 손으로 만들었다니까."

영화 '마약왕' 스틸 컷

마약왕은 '스카페이스(1983년)'를 차용한 흔적이 짙다. 이두삼의 집무실만 눈여겨봐도 알 수 있다. 고급스러운 조명과 대리석, CCTV, 각종 총기류들이 위치만 다르게 배열됐다. 이두삼이 조카인 이두환에게서 등을 돌리는 내용도 토니 몬타나(알 파치노)가 오른팔 격인 매니 리베라(스티븐 바우어)를 포기하는 설정을 떠올리게 한다. 모두 돈과 명예에 눈이 먼 비정한 사내를 가리킨다. 그런데 후자는 그 깊이가 매우 얕다. 친형제는커녕 단순한 직장 선후배에 가까운 까닭이다. 일본 고베에서 야쿠자 서수곤(나광훈)의 목숨을 함께 구하는 장면에서조차 이두삼에게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은 두 남자의 관계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 리베라는 몬타나의 고민에 귀를 기울이는 유일한 동생이다. 끝까지 잘못된 길로 가지 말라고 충언한다. 그래서 비참한 죽음이 비극적인 결말의 전주곡으로 전달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우민호 감독은 이런 설정을 비틀어 배치했으나 그 깊이에는 다가가지 못한다. CCTV를 열다섯 개나 설치하고도 그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두삼은 경찰이 들이닥치기 전까지 불안에 휩싸이는 모습을 한 차례도 보이지 않는다. 몬타나의 저택을 그저 기계적으로 재현하는데 머물고 만 셈이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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