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운의 역사정치]"부귀를 경계하라"던 퇴계 이황은 어떻게 재산을 늘렸나
━
[유성운의 역사정치]㉗ "너희들은 하지 마라"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자력으로 학문을 하였는데, 문장(文章)이 일찍 성취되었고… 오로지 성리(性理)의 학문에 전념하다가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읽고는 그것을 좋아하여 한결같이 그 교훈대로 따랐다… 빈약(貧約)을 편안하게 여기고 담박(淡泊)을 좋아했으며 이끗이나 형세, 분분한 영화 따위는 뜬구름 보듯 하였다.” (『선조수정실록』선조 3년 12월 1일)
조선 성리학의 거두로 평가받는 퇴계 이황의 졸기(卒記)입니다. 그가 사망하자 사관(史官)이 인물평을 실록에 남긴 것을 보면 이황이 당대에 얼마나 높은 위치에 있었는지를 알 수 있죠. 졸기를 보면 이황의 생애가 대략 상상이 되지 않나요?
“빈약(가난하고 검소함)을 편안하게 여기고 분분한 영화 따위는 뜬구름 보듯 하였다”고 하니 한 겨울에도 냉랑한 방 안에서 허름한 옷차림이나마 의관을 정제한 채 경전을 읽는 딸깍발이 선비 같지는 않았을까요.
하지만 이 기록대로만 이황의 이미지를 연상했다면 오판이 됩니다. 왜냐하면 이황은 자산 규모가 꽤나 컸던 지역 유지였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본인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 부를 쌓은 사례였죠.
![천원 지폐에 삽입된 퇴계 이황의 초상 [중앙포토]](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1809/16/joongang/20180916022816863hvug.jpg)
━
조선 선비들은 재산 증식에 관심 없었다?
성리학의 영향을 받은 조선 사대부들은 이재(利財)를 쌓는 것을 죄악시했습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 구분에서도 상인을 가장 아래에 놓았던 이유입니다. 부를 쌓고 이재를 중요시하면 인간의 본성을 잃고 도리를 어지럽힌다며 상공업의 발달을 억눌렀습니다.
이황도 『성학십도』를 통해 세속의 이익에 대해 경계할 것을 주문했습니다. "부동심(不動心)에 이르러야 부귀(富貴)가 마음을 음탕하게 하지 못하고, 빈천(貧賤)이 마음을 바꾸게 하지 못하여 도가 밝아지고 덕이 세워진다."
![도산서원. 도산서원 전경. 앞쪽에 보이는 건물이 이황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치며 학문을 연마하던 도산서당이다. [중앙포토]](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1809/16/joongang/20180916022817051hiue.jpg)
그렇다면 500년 전에 살았던 이황의 재산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열쇠는 ‘분재기(分財記)’입니다. 조선 시대에 소위 ‘뼈대 있는 가문’에서는 대부분 분재기를 남겼습니다. 분재기는 자녀들에게 재산을 물려준 기록인데요. 향후 유산을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나는 일을 막기 위해서 작성됐죠.
![녹천 이유의 조부인 장영공 이회가 재산을 분배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분재기. [중앙포토]](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1809/16/joongang/20180916022817377ygms.jpg)
━
30만평의 땅을 소유한 성리학의 거두 퇴계 이황
그러면 이준의 분재기를 볼까요. 아래 표는 이수건 영남대 명예교수의 연구 자료를 토대로 이준의 분재기를 다시 정리한 것입니다.

제가 대학에서 공부했던 20년 전만 해도 조선의 토지 면적은 가늠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예를 들어 대동법에 따르면 세금으로 토지 1결(結) 당 쌀 12두(斗)를 거뒀다고 하는데 ‘1결’이 어느 정도의 크기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결’이라는 단위가 지금처럼 면적이 아니라 당시엔 곡식의 수확량이나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다르게 적용됐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것만 정확히 알아내면 바로 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까지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동안 연구들이 축적되면서 이제는 어느 정도 근접할 수 있게 됐습니다.

다음엔 노비를 보겠습니다. 이황의 손자녀들이 나누어 가진 노비는 367명(노 203명, 비 164명)인데 이 가운데 88명(노 44명, 비 44명)은 이황의 손자녀들이 결혼 때 받은 노비와 그 자식입니다. 또한 33명(노 20명, 비 13명)은 이황의 아들 이준이 처가에서 받은 것인데 이를 감안하면 이황은 대략 250~300명 안팎의 노비를 보유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여담이지만 표를 보면 다섯 자녀에 대한 재산 상속이 거의 고르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때만 하더라도 균분 상속이 큰 흐름이었습니다.)
━
"노비는 양인과 결혼 시켜라"
앞서 말했듯이 이황은 재산 증식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가 아들에게 남긴 각종 서찰을 보면 그가 재산을 모으기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특히 노비 규모를 늘리는 데 적지 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노비는 토지보다 더 가치 있는 재산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죠. 개간을 통해 전답으로 바꿀 수 있는 황무지가 곳곳에 흩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노비를 많이 갖고 있다면 토지는 늘리기가 수월했던 거죠.
이황이 아들에게 남긴 서찰을 보면 그가 자신의 노비들을 양인(良人)과 결혼시키려고 무척 애썼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황이 노비들을 양인(百姓)들과 적극적으로 맺어주려고 했던 까닭은 당시 노비와 양인 사이에 태어난 자식은 모두 노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일천즉천’(一賤卽賤〮부모 중 한 명만 천인이면 자식도 천인)이라고 합니다. 노비끼리 결혼시키는 것보다 이처럼 양천교혼(良賤交婚)을 시키면 노비를 손쉽게 늘릴 수 있었기 때문에 조선 중기의 사대부들은 노비들이 양인과 결혼하도록 유도했습니다.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퇴계 이황 [중앙포토]](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1809/16/joongang/20180916022818253jrje.jpg)
그렇다면 노비는 어느 정도의 재산 가치를 갖고 있었을까요. 이황이 죽고 10여년이 지난 1593년의 한 기록을 보면 28세 여성 노비는 목면 25필이었습니다. 당시가 임진왜란 중이라 노비의 가격이 폭락했었음을 고려하면 이황 당대에는 더 높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20~30대 장정을 구입할 경우엔 소 한 마리 외에도 목면이나 곡식을 더 얹어줘야 했습니다.
이황은 노비들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구입하기도 했는데, 간혹 강제력을 동원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연동(連同)에게 절대 방매(放賣)하지 말라고 지시해 놓았으니 너도 이에 따라 가르쳐주는 것이 좋겠다. 부득이 방매한다면 내년에 가서 네가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금은 그렇게 할 만한 형편이 아니니 어쩌겠느냐.”
연동은 이황이 소유한 영천 토지에 거주하던 노비였는데 이황은 그가 토지를 팔려고 하자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막은 다음 꼭 팔아야 한다면 이황 집안에게 팔도록 강권했던 것이죠.
![경북 안동, 퇴계 이황 고택 [중앙포토]](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1809/16/joongang/20180916022818413xdfj.jpg)
“목화 파종하는 일은 물이 불어서 분전(糞田)을 하지 못했다. 모레쯤 할 계획이다…목화는 요긴히 써야 할 곳이 있으니 먼저 딴 것을 지금 가는 사람에게 모두 부쳐 보내거라.” (『도산전서(陶山全書)』 中)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정신을 배울 수 있는 교육장이다 [중앙포토]](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1809/16/joongang/20180916022818689xyxz.jpg)
앞서 말했듯이 이황의 재산 증식은 아주 특별한 사례는 아니었습니다. 조선 중기 정계에 진출해 '도학 정치'를 주창했던 조광조 등 사림들은 대부분 지방에 이같은 물질적 기반이 있었습니다. 그 덕분에 생계에 대한 걱정을 덜고 안정적인 학문-정치 활동이 가능했던 것이죠.
![전남 화순 능주 조광조의 영정. [중앙포토]](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1809/16/joongang/20180916022818915xbvn.jpg)
━
“너희는 꼭 ‘인 서울’을 지켜라”
조선의 학자들은 가문의 위세를 지키기 위해 재산 증식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조선 후기엔 서울 거주의 중요성도 두드러집니다. 이황이 살던 16세기만 해도 지방에서 열심히 공부해 입신양명이 가능했지만 후기로 갈수록 서울 거주 여부가 출세의 관건이 됐기 때문입니다.

변변히 물려줄 토지도 없다는 점을 미안하게 여기는 그는 아들에게 학문 정진을 당부하면서 강조하는 것이 ‘인 서울’입니다. 폐족이 된 가문의 형편 때문에 당분간 과거를 볼 수 없지만 어렵더라도 서울 생활을 고수해야 하며 서울이 어렵더라도 10리 밖을 벗어나선 안 된다고 신신당부합니다.
![정약용이 전남 강진에서 유배하던 때 부인 홍혜완이 보낸 치마에 두 아들에게 교훈이 될 만한 글을 적은 서첩, '하피첩' [중앙포토]](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1809/16/joongang/20180916022819355osko.jpg)
각종 개혁적 주장을 펼친 그도 자녀의 장래와 성공을 고민하는 '아버지'였던 것이죠.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다산 유적지 내에 있는 다산 정약용 선생 동상. [전익진 기자]](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1809/16/joongang/20180916022819632jnqk.jpg)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은 서울 부동산 문제를 언급하다가 “모두 강남에 살 필요는 없다. 내가 강남에 살기에 드리는 말씀”이라고 발언해 많은 비판을 받았죠.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은 사법시험 폐지를 옹호하며 “모두가 용이 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더 중요한 것은 개천에서 붕어, 개구리, 가재로 살아도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해 빈축을 샀습니다.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 [사진 기획재정부]](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1809/16/joongang/20180916022819772augu.jpg)
![장하성 정책실장 주거하는 송파구 아시아선수촌 아파트 [변선구 기자]](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1809/16/joongang/20180916022820062fvol.jpg)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천년만 대홍수..당장 떠나라" 허리케인 플로렌스 비상
- 문재인 정부 소득주도성장론, 5개 장애물에 막혔다
- 北노동신문 "칼 든 강도 앞서 방패 어떻게 내려놓나"
- 홍준표 "고난의 여정, 때 되면 시작"..정계 복귀 신호?
- "선생님이랑 결혼할래요" 장난에..교사의 추악한 얼굴
- "중국서 550만명 본 영화, 한국선 민망할 정도 참패"
- "욕 쓰지 마라" 아빠 말에 페친 끊어버린 대학생 딸
- 판사 낭독 실수로 징역→금고..5세 딸 잃은 부모 눈물
- 이사장 수위, 총장 청소..폐교 위기 영남외대에 뭔 일
- 盧땐 80% ↑, MB땐 10% ↓..희한한 강남 집값의 역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