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창가에서 새해를 다시 쓰다 [김지은의 아트 레이더]
매경이코노미는 이번 주부터 새로운 칼럼 ‘김지은의 아트 레이더(Art Radar)’ 연재를 시작합니다. 필자인 김지은 작가는 방송인 출신으로 미술품 수집가와 나눈 대화를 엮은 책 ‘디어 컬렉터’를 통해 대중의 호응을 얻었습니다. 미술계 트렌드를 포착하고 시장의 흐름을 움직이는 핵심 동력을 소개하며 예술과 경영 인사이트를 전달합니다.

후배들이 공유해준 동선에 따라 대릉원 고분군 사이를 먼저 걸으며 경주의 시간 감각을 몸에 익힌 뒤 미술관으로 향했다. 오아르미술관의 장치는 내부에 들어서기 전부터 이미 작동했다. 건물 전면에 다섯 기의 봉분이 그대로 반사돼 데칼코마니처럼 펼쳐지니 풍경이 순식간에 두 배로 증폭됐다. 발걸음을 겨우 떼어 1층으로 들어서자 이번엔 11개의 유리 패널이 투명한 병풍처럼 바깥 풍경을 담아냈다. 커피를 주문하는 카운터 뒷면, 무심히 지나칠 법한 각도에서도 대릉원은 어김없이 되돌아왔다. 부드러운 능선의 파노라마를 만끽할 수 있는 2층을 지나 옥상으로 올랐다. 경사지붕 계단에 앉으니 대릉원은 물론 황리단길 기와지붕이 만들어내는 스펙터클한 풍경 너머로 저 멀리 난개발 흔적까지, 경주의 과거와 현재가 한 프레임에 들어온다. 도대체 이 미술관은 몇 개의 풍경을 품고 있는 것일까.
오아르미술관 최고의 소장품은 왕릉뷰임에 틀림없다. 다만 그 풍경을 위해 미술관의 생명이라 할 ‘가장 긴 벽’을 과감히 포기한 건축가 유현준 교수의 생각이 궁금했다.
“지금의 왕릉뷰가 보이는 창을 모두 벽으로 막았다면 어디서나 보게 되는 평범한 화이트 큐브 미술관이 됐겠지요. 하지만 긴 벽 대신 그 자리에 1500년 된 고분의 능선을 들여오기로 결정했습니다. 전시 공간의 큰 손실을 뜻하지만, 동시에 미술관의 경계를 6세기 신라까지 확장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오직 경주라는 도시의 문맥에서만 가능한 건축이고요. 시간의 대비를 더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미술관은 최신 재료를 썼습니다. 외벽과 지붕은 매끈한 금속성 재료인 아노다이징 패널을, 창은 거울처럼 반사율이 높은 미러서스(Mirror Sus)를 사용했습니다. 건축주도 적자를 각오했다더군요.”
하지만 미술관은 개관 8개월 만에 관람객 19만명을 돌파, 흑자를 기록했고 한국건축가협회가 수여하는 2025년 ‘올해의 건축 베스트 7’에 선정됐다. 경주의 경관·높이 규정에 따라 건물 높이는 12m로 제한되고 지붕은 반드시 경사면이어야 한다.
한국건축가협회에 따르면 건축가는 이러한 제한을 ‘창의적으로 해석해 종이접기처럼 꺾인 이중 박공지붕을 만들고, 전시와 동선을 풍부하게 변주’했으며 ‘경주의 역사적 풍경과 현대적 건축 언어를 정교하게 결합한 작품’을 탄생시켰다. 아름다운 결말이다. 그러나 이 과감한 선택은 건축가의 미학만으로 가능했을 리 없다. 상업적 효율을 따졌다면 결코 나올 수 없는 결단을 내린 건축주 김문호 관장은 경주 사람이었다.
“경주에서 태어나 어릴 때는 왕릉에서 뒹굴며 놀았고 중고등학교도 이곳에서 나왔습니다. 일본에서 광고 전문 인쇄 회사를 경영하던 시절 우연히 조선 백자 다완 한 점을 만났는데 타국에서 보는 그 모습이 어찌나 애틋하던지요. 그렇게 시작된 수집이 현대미술까지 확장되면서 600여점이 됐고 작품을 수장고에서 꺼내 고향분들과 꼭 나누고 싶었습니다. 사실, 미술관을 랜드마크로 만들고 싶은 욕심도 있었지만 경주의 ‘정서적 고요함’을 해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화려한 외관보다는 자연과 빛을 내부로 끌어들이고, 관람객이 오롯이 작품과 공간에 집중할 수 있도록 ‘절제된 미학’을 선택한 것이 가장 고됐지만 잘한 결정이었습니다.”

경주 과거와 현재를 한 프레임에
그가 오랜 일본 비즈니스 경험에서 얻은 가장 큰 자산은 ‘보이지 않는 곳까지 챙기는 디테일’과 ‘오모테나시(진심 어린 환대)’ 정신이다. 관람 동선의 사소한 불편함부터 휴게 공간의 의자 각도, 조명의 조도, 직원들의 응대 태도 등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 철저한 관리와 배려의 철학을 녹여냈다. 단지 전시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나가는 순간까지의 ‘총체적 경험’을 설계해 관람객이 최고의 경험을 가져가게 만드는 곳이 그가 생각하는 미술관이다. 기획 총괄 양은진 학예실장 역시 미술관의 전시 방향을 뚜렷이 제시한다.
“지나치게 난해하거나 폐쇄적인 전시보다, 동시대 예술의 흐름을 비교적 분명한 언어로 풀어내는 데 비중을 두고자 합니다. 현대미술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소개하되, 관람객이 자신의 삶과 경험을 투영할 수 있도록 구성해 미술 애호가뿐 아니라 처음 미술관을 찾는 이들도 오래 머물 수 있는 전시로 만들려고 해요. 고분군을 마주한 공간 자체로 강력한 감정적 울림을 주기 때문에, 전시는 풍경과 ‘경쟁’하기보다 ‘조응’해야 하고요.”
건축가, 관장, 학예실장 3인이 가장 오래 머물고 싶은 장소로 꼽은 2층 둥근 방석 위에 자리를 잡아본다. 평범한 미술관은 벽을 늘렸겠지만 오아르미술관은 벽을 없애 재무제표에도 없는 자산, 세계 유일무이의 왕릉뷰를 담아냈다. 몸의 각도를 살짝 돌릴 때마다 장면이 바뀐다. 소장품 기획전 ‘잠시 더 행복하다’의 현대 작품들과 고분군의 쌍능선을 따로 또 같이 눈에 담아본다. 마치 내가 거대한 시침이 되어 삶의 시간을 선택하는 느낌이다. 생생한 삶과 거대한 죽음 사이에서, 분기 실적표로 쪼개 보낸 지난해와 연간 성과 계획으로 분주한 새해가 교차한다. 천년을 호흡하는 오아르미술관 창가에서, 시간의 단기 전략에 갇힌 채 숫자와 성과에 매몰됐던 지난날들이 스친다. 문득 질문이 바뀐다. 무엇을 이룰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시간의 폭’ 안에 내 삶을, 그리고 우리 기업을 놓을 것인가다. 2026년의 결심은 하나다. 시간의 폭을 바꾸는 일.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43호 (2026.01.14~01.20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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