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러 등 강대국의 무력 침공… 19세기 ‘올드 노멀’ 회귀
<1> 다시 전쟁의 시대, 무너진 금기

미국은 2차 대전 이후 패권 국가로 자리매김하며 ‘세계의 경찰’로 불렸다. 압도적인 군사·외교적 역량을 바탕으로 국제 분쟁에 적극 개입해 이를 억제해 왔다. 무력을 사용하더라도 민주주의 수호, 인권 보호와 같은 명분을 앞세웠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두 번째 임기 시작과 함께 미국은 급속도로 달라졌다. 분쟁을 억제하기는커녕 직접 갈등의 당사자로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베네수엘라에 군인들을 보내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을 생포해 미국 법정에 세웠고, 이란을 공습해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파나마 운하와 그린란드 합병을 위해 군사력도 사용할 수 있다고 공개적으로 압박했다.
미국과 러시아 같은 강대국이 직접 전쟁을 일으키고, 다른 나라의 국경을 넘보는 일이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됐다. 이를 규탄하는 국제사회의 목소리도 듣기 힘들어졌다. 다른 나라가 비슷한 행동을 하더라도 국제사회가 규범을 근거로 비난하기는 어려워졌다. 힘의 논리가 세상을 지배하던 19세기 제국주의 시대로 회귀했다는 평가마저 나온다.
전문가들은 국제적으로 분쟁이 증가하는 기본적인 배경에는 그동안 ‘세계 평화의 수호자’를 자임해 온 미국의 역할 변화가 깔려 있다고 진단했다. 트럼프 행정부 2기는 미국 우선주의를 더욱 노골적으로 내세우고 있다.
스웨덴 웁살라대 분쟁 데이터 프로그램(UCDP)의 숀 데이비스 연구원은 “그간 미국은 세계 질서 유지에 주력했고 그게 다른 나라들이 영토 침략 전쟁을 주저하게 만드는 억제력이었다”고 지적했다. 이어 “하지만 미국의 해외 분쟁 개입에 대한 여론이 적대적으로 변하면서 그 억제력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됐다. 미국이 힘과 자원을 분쟁 억제에 투입할 의지도 없다”고 평가했다.

2001년 시작된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2021년에야 마무리됐고, 2003년 시작된 이라크 전쟁은 2011년에 끝났다. 두 번의 장기전을 거치며 미국 내에서 전쟁에 대한 피로감이 커졌다. 특히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를 겪으며 막대한 비용을 들여 외국에서 전쟁을 벌이는 것에 내부적으로 회의적 시선이 팽배해졌다. 자유주의 성향의 미 싱크탱크 카토 연구소의 에반 생키 연구원은 “국가 이익에 대한 미국의 기존 내부적 합의가 붕괴됐다. 미국은 아직 새로운 합의점을 찾지 못했고, 당분간 이런 상황이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적극적으로 분쟁을 억제하던 미국의 역할이 변화되면서 세계적으로 분쟁 억지력 자체가 줄어든 것으로 풀이된다. 박종희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이 패권 국가의 역할을 거부하다 보니 국제사회가 일종의 ‘진공 상태’가 됐다. 그동안 움츠려 왔던 국가들에는 기회가 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국제 질서가 균열됨에 따라 그 틈에서 전쟁이 빈번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상현 세종연구소 명예연구위원도 “미국이 2차 대전 이후 패권국으로서 국제 질서라는 공공재를 공급하기 위해 노력해 왔는데 이제 스스로 패권국 지위를 내려놓으면서 질서가 다 깨지기 시작했다”고 진단했다. 이어 “국제법적 질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나라의 영토 주권에 대한 존중인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해도 말리는 나라가 없는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발 국제 정세의 변화를 더욱 가속화한 것으로 평가된다. 트럼프 대통령 특유의 예측 불가성이 그간 국제 질서를 이끌어 온 미국의 역할을 빠르게 허물고 있다는 것이다.
중동 전문가인 이희수 성공회대 석좌교수는 미국·이란 전쟁을 ‘미국 몰락의 마지막 신호탄’이라고 규정했다. 이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은 몰락해가는 제국의 아주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며 “명백한 전쟁 범죄를 일으켜도 아무도 제어할 수 없는 병든 마지막 제국의 불쌍한 발악”이라고 비판했다.
웁살라대 데이비스 연구원도 “미국은 자국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언제든 무력을 사용해 왔지만 트럼프는 방식이 다르다. 타국 지도자를 납치하거나 제거하는 것은 보통의 미국 정부라면 고려하지 않았을 카드”라고 평가했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이미 기울기 시작한 미국이 트럼프 집권 2기를 계기로 빠른 속도로 ‘국제적 권위’를 잃어버리고 있다”며 “특히 이번 이란 전쟁에서 특유의 예측 불가능성 때문에 아주 빠른 속도로 추락하고 있다. 동맹들로부터 존중을 받기 어려워졌다”고 지적했다.
트럼프라는 인물의 등장은 우연이 아니라 시대적 필연으로 읽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양욱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미국이 9·11 테러 이후 20년 동안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면서 내부적으로 피로감이 누적됐다”며 “트럼프라는 존재는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고 분석했다.

전쟁의 증가가 민주주의의 퇴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해석도 있다. 독재적 리더십의 경우 내부 견제가 약해 리더 개인의 정치·경제적 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의사결정이 더욱 쉽게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타니샤 파잘 미 미네소타대 정치학과 교수는 “독재적 리더의 주변에는 리더가 듣기 싫어하는 말을 하지 않으려는 조언자만 남게 된다”며 “전 세계적인 민주주의 퇴보와 전쟁 발생 빈도 사이에 잠재적인 연결 고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 퇴보 현상이 나타나면서 제대로 된 조언을 받는 리더라면 시작하지 않았을 전쟁에 빠져드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양욱 연구위원도 “전쟁의 위험을 경고하는 대신 ‘예스맨’들이 리더의 주변을 둘러싸기 시작하면서 전쟁이 가속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제국주의 회귀라는 평가까지 나온다. 이기호 한신대 공공평화센터장은 “군사력에 기초한 제국주의가 다시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며 “민주주의 자체가 위기를 맞은 측면이 있다. 세계적으로 민주주의라는 보편적 가치보다 ‘국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대되고 있다”고 말했다.
타자 바르키 폴 캐나다 맥길대 교수도 “트럼프 대통령의 관념은 19세기 제국주의에 가깝다”며 “세계사나 역사적 교훈에 대해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것 같다”고 비판했다.
유엔과 같은 국제 기구는 유명무실해진 지 오래다. 최근의 대규모 국제 전쟁을 주도하고 있는 러시아와 미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상임이사국 5개국에 포함된 국가들이다. 회원국을 상대로 국제법적 구속력을 가지는 결의안을 채택할 수 있는 국가임에도 스스로 전쟁의 문턱을 낮추는 데 앞장서고 있다.
오슬로 국제평화연구소(PRIO) 시리 아스 루스타드 연구원은 “유엔은 2차 대전 이후 설립된 거대한 국제 질서가 부식되고 있다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라고 강조했다. 이어 “2010년대 초에는 안보리가 실질적으로 작동했지만 이제 더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며 “모든 국가가 각자도생하는 세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워싱턴의 싱크탱크 디펜스 프라이어리티스의 제니퍼 카바나 선임연구원은 “2차 대전과 냉전 종식 이후 형성된 유엔과 다자기구들은 현 시점에서 기본적으로 무의미하다. 영향력도 없고 무기력하다”며 “미국도 러시아도 중국도 그들을 무시한다. 결코 지속될 수 없는 ‘자유주의적 환상’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양욱 연구위원도 “미국과 러시아 등 국제 질서를 무너뜨리는 권위주의 국가들이 안보리 상임이사국을 차지하는 모순적 상황”이라며 “유엔은 적극적으로 평화를 실현하는 기구가 아니라 세계 패권 국가들 사이의 전쟁을 막기 위한 소극적 평화 기구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2차 대전 이후 전쟁의 기억이 옅어지면서 인류가 다시 전쟁을 하나의 선택지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해석도 나온다.
다고 아쓰시 일본 와세다대 정치경제학술원 교수는 “일본에서도 전쟁을 직접 경험한 세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전쟁은 안 된다’는 생각이 강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며 “전쟁을 잊어버렸거나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이 너무 가볍게 전쟁을 이야기하고 단기적인 판단으로 전쟁을 선택할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기호 한신대 평화공공성센터장도 “지금의 국제 정세는 전쟁의 잔혹함을 잊은 시대”라고 평가했다. 이어 “전쟁의 공허함을 체험한 세대는 퇴장했고, 전쟁의 잔혹함에 대한 부담감은 인공지능(AI) 등의 발달로 기계에 쉽게 전가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국제사회의 평화 상태가 이례적이었을 뿐 다시 과거와 같은 ‘올드 노멀(Old Normal)’로 회귀하고 있다는 냉정한 평가도 있다.
카바나 디펜스 프라이어리티스 선임연구원은 “미국은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군사력을 사용하는 데 언제나 매우 적극적이었다”며 “냉전 종식 후 갈등이 자주 일어나지 않았던 시기가 비정상이었다. 최근 국가들의 무력 사용은 ‘뉴 노멀’이 아니라 ‘올드 노멀’로의 회귀”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미국이 구축한 규범 중심의 국제 질서 또한 자국의 글로벌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질서였을 뿐 자국 이익과 관련해 기본적으로 무력을 사용하는 미국의 역사적 전략 및 의지와 매우 일치하는 모습”이라고 말했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도 “2001년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9·11 테러 이후 자위권 차원에서 대응한 측면이 있었지만 2003년 이라크 전쟁은 지금과 별로 맥락이 다르지 않았다”면서 “지금의 상황이 새로운 상황은 아니다”고 평가했다.

<외교안보 전문가 및 학계>
△해외=다고 아쓰시 일본 와세다대 교수, 라파엘 우리베네이라 독일 하이델베르크 국제분쟁연구소(HIIK) 데이터분석과장, 레이철 민영 리 미국 스팀슨센터 연구원, 숀 데이비스 스웨덴 웁살라대 분쟁 데이터 프로그램(UCDP) 연구원, 시리 아스 루스타드 노르웨이 오슬로 국제평화연구소(PRIO) 연구교수, 에반 생키 미국 카토 연구소 연구원, 이안 브레머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 제니퍼 카바나 미국 디펜스 프라이어리티스 연구원, 제임스 김 스팀슨센터 한국프로그램 디렉터, 타니샤 파잘 미국 미네소타대 교수, 틸만 러프 호주 멜버른대 교수, 타자 바르키 폴 캐나다 맥길대 교수
△국내=박원곤 이화여대 교수, 박종희 서울대 교수, 양욱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 유달승 한국외대 교수, 이상현 세종연구소 명예연구위원, 이기호 한신대 교수·평화와공공성센터장, 이성원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이희수 성공회대 석좌교수,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 장지향 아산정책연구원 수석연구위원,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조관자 서울대 일본연구소 HK교수
<시민사회 및 국제 비영리기구>
△국제 인권·구호기구=유니세프, 피스윈즈, 휴먼라이트워치
△영국 분쟁감시 단체=에어워즈(AirWars)
△이란 인권 단체=미안(Miaan), 헨가우(Hengaw)
△일본 반핵·평화 단체=나가사키평화추진협회, 니혼히단쿄, 원수금(원자수소폭탄금지 일본국민회), 피스보트, 히로시마평화문화센터
이슈탐사팀=김판 김지훈 이강민 기자 p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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