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일이 지인 능욕에서 시작됐다면 믿겠어요?
4년 전 ‘지인 능욕’으로 자행된 딥페이크 성착취물 피해자가 4년 뒤 자신의 성폭력 피해를 세상에 알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당사자 동의를 얻어 지난 5일 ‘딥페이크 성폭력 박멸을 위한 긴급토론회’에 그가 보내온 발언문 전문을 게재합니다. <편집자말>
[오마이뉴스 기자]
스무 살이 되던 해, 입춘은 지났지만 아직 코끝이 시리던 어느 날이었어요. 여느 스무 살들과 별반 다를 것 없이 자유를 즐기며 지내던 저는 한 DM(다이렉트 메시지)을 받았습니다.
"이 링크에 OO님 사진이 올라가 있는 것 같아요."
링크를 타고 들어가 보니 그곳에는 정말 제 사진들과 함께 온갖 모욕적인 글이 적혀 있었어요. 제 이름, 나이, 거주지, 신체 사이즈와 더불어 남자만 보면 질질 싼다는 등의 말도 안 되는 성희롱적 발언과, '좋아요' 몇백 개 이상 달성 시 SNS(사회관계망서비스) 주소를 뿌리겠다는 예고까지. 이 당시까지만 해도 몰랐어요. 너무나도 당연했던 저의 자유가 이날 이후로 영영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걸요.
경찰에게 처음 들은 말 "증거를 찾아오세요"
처음에는 무시하려고 했어요. 이런 일을 깊게 생각하기에 저는 너무 어렸거든요. 그러나 거듭해서 무언가 세상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링크 안에는 저 이외에도 수천 명의 피해자가 있었거든요. 딥페이크를 통해 정액과 본인의 얼굴이 합성되거나, 나체와 본인 얼굴이 합성된 사진이 업로드되는 등 이해하기 어려운 피해 사례도 있었지만, 미성년 피해자 수가 압도적으로 높았어요. 물론 저도 갓 스무 살이 된 시점이었기에 많이 어렸지만 저보다 더 어린 친구들이 받을 상처가 걱정됐어요. 우리가 앞으로 살아갈 세상에 이와 같은 일이 두 번 다시 발생하면 안 될 것 같았어요.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목소리를 내기로.
친언니가 저를 도와준 덕분에 '지인 능욕' 피해자 연대에 가입하고, 다양한 방송사 인터뷰를 하고, 범죄 관련 방송에 출연하는 등 정말 다방면으로 노력했어요. 그렇게 저희는 '#작은물결이_모여_큰_ 파도가_되기를'이라는 해시태그를 사용하며 N번방에 묻혀 수면 속으로 사라지던 지인 능욕에 대해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N번방도 큰 사건이었지만, 지인능욕 피해자들의 목소리 또한 묻히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함께 주목받아야 하는 사건임이 분명했으니까요.
경찰에 사건을 접수한 날, 가장 처음 들은 말은 "증거를 찾아오세요"였습니다. 지인 능욕 범죄의 특성상 제 지인의 소행일 것이라는 관점을 배제할 수 없었거든요. 제 지인들을 스스로 의심하고 그들에게서 증거를 찾아오라는 말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어요. 범인을 잡아달라고 경찰서에 왔는데, 저보고 직접 증거를 찾아오라니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워하던 그때, 추적단 불꽃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저에게는 다시 떠올리기도 힘든 시간들이 이어졌어요. 모르는 이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제게 DM으로 온갖 폭언과 협박성 사진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나체 사진과 제 얼굴을 합성해 보내고, 어린 제 동생에게도 협박을 시작했죠. '너는 평생 트루먼쇼 인생을 살게 될 거야.' '평생 돌아다닐 네 사진을 보며 나중에 네 동생이 커서 딸 칠 거야.'
스무 살이었던 제가 겪기에는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죠. 트위터에서는 저의 중계방까지 생겼어요. 제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모든 일상이 담겨 있었죠. 지인 능욕과 더불어 스토킹까지 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불꽃님들께 전달하고 우리는 합동 수사를 시작했어요. 세종에서 강원청까지 오가며 범인을 잡으려 애썼습니다. 물론 세종청에서도 수사는 계속되고 있었어요. 다양한 곳에서 정말 많은 분들이 지인 능욕을 뿌리 뽑고자 갖은 노력을 했습니다.
세상이 무너지는 전화 "수사 종결"
그러던 중, 저는 수사에 진전이 없어 수사가 종결되었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어요. 온라인 범죄이고, 해외 사이트로 접속할 경우 추적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몇 달간 이 사건에만 몰두했는데 아무런 성과도 없이 범인을 잡을 수 없다니요. 오직 그것만 보고 몇 달을 살아왔는걸요. 그렇게 저는 스무 살의 어린 나이에 정신과 약을 털어먹고 의식을 잃은 상태로 응급실에 실려 가게 됩니다. 이 모든 일들이 지인 능욕으로부터 시작됐다고 한다면 믿으실까요? 범죄를 행한 그들은 피해를 당한 제가 이렇게까지 힘들어질 거라고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요?
누군가는 그저 디지털 성범죄라고 말합니다. 맞아요. 실제로 제 신체에 물리적 위해가 가해진 적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범죄가 아니게 되는 건 아니잖아요. 상처를 안 받는 건 아니잖아요. 범죄와 피해 사실에 대해 경중을 나눌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거 하나만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똑같이 아팠고,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을 안고 살아가야 하며, 그 누구도 잘못이 없다는 사실이요. 오히려 지인 능욕은 가해자가 누구인지도 확인하기 어렵고, 말 그대로 지인일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여 주변 그 누구도 믿지 못하는 상황에 다다르게 되는
범죄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며 그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다는 사실이 얼마나 불행한지, 겪어보지 않으면 몰라요. 끝없는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는 출구를 찾아 영영 헤매는 기분입니다. 그렇게 수없이 힘들고 어두운 밤을 보내왔어요.
한 걸음 나아가려고 노력하는 분들 감사합니다
그러던 중 저는 운이 좋게도, 추적단 불꽃과 더불어 도와주신 분들 덕분에 한 명의 가해자를 잡았습니다. 그럼에도 아직 잡지 못한 가해자가 더 많아요. 저 이외에도 아직 가해자를 잡지 못한 피해자가 수두룩합니다. 사건이 발생한 지 4년이 지난 지금도 저는 여전히 그 기억들 속에 삽니다. 계절마다 모든 기억이 남아 있어요. 코끝이 시려지는 계절이 다가오면 사건을 처음 맞닥뜨렸던 겨울이 생각나요. 살짝 더워지는 여름이 다가오면 강원청에 오가며 사건에 대해 분석하고 범인을 잡으려 노력했던 시간이 생각나고요. 선선해지며 하늘이 파래지는 가을이 오면 생일인데도 집 밖에 나가지 못하고 집에서 울고 있던 제 모습이 생각나요. 저의 사계절은 여전히 그렇게 물들어져 있습니다.
다른 피해자들도 마찬가지일 테죠. 저는 저와 같은 청춘들의 사계절이 아름답게 물들길 바랍니다. 온라인 범죄의 특성상 잡기 어렵다는 실태는 뼈저리게 느꼈기에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예방할 수는 있겠죠. 더 이상 피해자가 목소리를 내야 하는 세상이 오지 않길 바랍니다. 경찰의 미온적 태도가 변화하길 바랍니다. 피해자들은 피해 사실을 안고 살아가기만 해도 충분히 버겁거든요. 디지털 성범죄의 박멸이 하루빨리 찾아와 저와 같은 피해자들이 더는 생기지 않길 바라요. 봄에는 꽃구경을 가고, 여름에는 물놀이를 하고, 가을에는 낙엽을 바라보고, 겨울에는 눈사람을 만들며 그저 그렇게 살아가길 바라요.
끔찍한 계절이 반복되지 않도록,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바뀌어야 합니다. 디지털 성범죄, 딥페이크 성폭력은 결코 묵인되어서는 안 되는 명백한 성범죄이며,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닙니다. 가해자의 변명보다 피해자의 아픔에 공감해 주세요. 오늘도 한 걸음 나아가는 대한민국을 위해 노력해 주시는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작은 물결들이 모여 큰 파도가 되어 돌아오는 그날을 기다립니다.
오늘 제가 고이 적어 보낸 작은 물결이 훗날 디지털 성폭력 박멸이라는 파도로 돌아오길 바라보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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