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창기 수능 영어 '빈칸 추론' 문제는 이렇게 쉽게 나왔다고요?

신정섭 2025. 11. 24.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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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계층간 교육격차 심화시키는 수능 영어는 전면적 개혁이 필요하다

[신정섭 기자]

 202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일인 13일 오전 서울 광진구 광남고등학교에서 수험생들이 시험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 처음 도입된 지 32년의 세월이 흘렀다. 제1회 1994학년도 수능은 1년에 두 번 치렀고, 2014~2016학년도 수험생은 A/B 수준별로 나뉜 문제지 중 하나를 선택해 풀기도 했다. 수능은 2년에 한 번 정도로 크고 작은 변화를 겪었고 '물수능/불수능' 논란이 끊이지 않았으나, 대체로 해가 갈수록 어려워지는 경향을 보였다.

수능의 난이도는 학교 교육과정, 대학입시 제도, 사교육 의존도, EBS 연계율, 평가 방식(상대평가/절대평가) 등에 따라 달라지므로 섣불리 '적정' 여부를 단정하기 어렵다. 다만, 입시 전문가 및 현장 교사들의 의견을 종합해 볼 때 시간이 흐르면서 수능의 난도가 전반적으로 상승 곡선을 그렸다는 사실 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학교 교육만으로는 대비하기 어렵다는 게 중론일 정도다.

특히, 영어영역은 초창기 1994학년도 문항과 32년 후에 시행된 2026학년도 문항을 비교할 때 피부로 느껴질 만큼 눈에 띄게 난도가 높아진 게 사실이다. 고등학교에서 수능 영어를 25년 넘게 가르쳐온 교사로서, 옛날 수능과 요즘 수능의 난이도 차이가 어느 정도인지 '빈칸 추론'(cloze test) 문항의 비교분석을 통해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지난 32년간의 문항을 모두 살펴보았으나, 지면 관계상 1994(1차), 2009, 2014, 2026학년도 수능의 한 단어 빈칸 추론 문항만 소개한다.
1994학년도 제1차 수학능력시험 외국어영역 24번 문항
Some people feel that reading "for pleasure"(anything not directly connected to a job or immediately practical) is a waste of time. Spending hours with a book, they think, is unproductive dreaming. For example, when asked about their reading, some businessmen often reply, "I keep up with the professional literature, but I don't have time for books." Their tone implies that anyone with time to read books is somehow ( ___________ ).

① a teacher ② a secretary ③ an idler ④ an editor ⑤ a businessman
수능 원년인 1994학년도(1차) 영어 24번 문항이다. 낱말 수가 70개에 불과하고, 어휘 수준도 매우 평이하며, 어느 정도 영어 능력을 갖춘 학생이라면 다 읽고 이해하는 데 30초 정도면 충분해 보인다. 예상컨대, 이 정도면 중학생도 풀 수 있을 거라고 말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그로부터 15년의 세월이 흐른 뒤인 2009학년도 영어 24번 문제를 살펴보자.
2009학년도 수학능력시험 외국어영역 24번 문항
While the fine art object is valued because it is unique, it is also valued because it can be reproduced for ( ___________ ). For example, Van Gogh's paintings have been reproduced endlessly on posters, postcards, coffee mugs, and T-shirts. Ordinary consumers can own a copy of the highly valued originals. Therefore, the value of the original results not only from its uniqueness but from its being the source from which reproductions are made. The manufacturers who produce art reproductions and the consumers who purchase and display them give value to the work of art by making it available to many people as an item of popular culture.
① art education ② artists' imagination ③ cultural diversity
④ scholarly research ⑤ popular consumption
빈칸에 들어갈 말이 두 단어이고, 낱말 수가 107개로 지문이 다소 길어지긴 하였으나, 주제가 친숙하고 빈칸에 들어갈 적절한 말을 짐작하는 데 필요한 단서(clue)가 여기저기 존재하므로, (9등급 상대평가 기준) 상위 23% 안에 드는 3등급 정도의 실력을 갖춘 학생이라면 1분 남짓의 시간을 들여 무난하게 정답을 찾을 수 있어 보인다.
2014 수준별 수능이 1차 변곡점
조금씩 상승한 영어영역 난도는 A/B 수준별로 나뉘어 치러진 2014학년도 수능에서 1차 변곡점을 맞이했다. 상위권 대학 대다수가 높은 수준의 B형 응시를 의무화하면서 사달이 났다. A형, B형간 난이도 차이를 분명히 두어야 했고, B형 모집단 크기가 전체의 67% 정도로 줄어들어 상위권 변별이 필요했던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B형의 난도를 최대로 높였다.
2014학년도 수학능력시험 영어 B형 36번 문항
F. Scott Fitzgerald thought that the test of first-rate intelligence was the ability to hold two opposed ideas in mind at the same time and still function. The eons shaped our brains in the ( A ) direction. Confirmation bias is a term for the way the mind systematically avoids confronting contradiction. It does this by overvaluing evidence that confirms what we already think or feel and undervaluing or simply disregarding evidence that refutes it. Testimony from members of the Crow tribe about the destruction of their culture provides an extreme and tragic example of this. A man named Plenty Coups reported that "when the buffalo went away, the hearts of my people fell to the ground and they could not lift them up again. After this nothing happened." He was not alone in describing the depth of despair as the end of history. "Nothing happened after that," another Crow warrior said. "We just lived." The emotion was so strong that the brain ( B ) evidence of the continued existence of normal, everyday life that might have eased it.
① opposite …… retained ② opposite …… rejected ③ wrong …… validated
④ same …… falsified ⑤ same …… overlooked
24번이 아닌 36번 문항과 비교하는 이유는 문항 배치 순서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두 단어 추론으로 바뀌었고, 낱말 수가 178개로 확 늘어났으며, 몇 번을 읽어도 이해하기 어려운 난해한 내용이었다. 고등학교 교육과정 수준을 넘어선 문제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수능 영어는 문항당 평균 1분 30초 이내에 풀어야 하는데, 그렇게 짧은 시간에는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지적이 많았다.
수준별 수능은 '중위권 수험생 부담 완화'라는 목표를 내건 정책이었으나 선택과목에 따른 유불리, 수험생 혼란 등의 문제가 제기돼 시행 3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심지어 영어영역은 2014학년도 수능 딱 한 번 시행하고 이듬해 곧바로 폐지되었다. 탁상행정이라는 거센 비판이 쏟아진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절대평가인 2018 수능이 2차 변곡점?
 202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사흘 앞둔 10일 세종시의 한 인쇄공장에서 관계자들이 수능 문제지와 답안지를 전국 시도 교육청으로 배부하기 위해 차량으로 옮기고 있다. 교육부는 2026학년도 수능이 오는 13일 전국 85개 시험지구 1천310개 시험장에서 일제히 치러진다고 밝혔다. 2025.11.10
ⓒ 공동취재사진
한 번 높아진 수능 영어의 난도는 좀처럼 낮아지지 않았다. 교육부 스스로 "(영어)상대평가가 무한경쟁을 초래하여 교육과정의 범위와 수준을 넘는 과잉학습이 유발되는 문제가 있었다"라는 사실을 인정하며 "학교 교육과정을 정상화하고 사교육 부담을 줄이기 위해 절대평가로 전환한다"라고 밝혔으나, 절대평가로 바뀐 2018 수능 이후에도 영어 난도는 상당히 어려운 수준을 유지했다.

원점수 90점 이상 1등급 비율이 절대평가 첫해인 2018 수능(10.0%)과 3년 후인 2021 수능(12.7%) 두 번을 제외하고는 4.7~7.8%로 10% 미만이었다. 큰 틀에서 보면 9등급 상대평가 시절과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게다가, 올해 2026 수능은 1등급 비율이 역대 최저인 4% 안팎일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왔다.

수능 영어영역 난이도는 절대평가 전환으로 쉬워질 것이라는 기대에 한참 못 미쳤고, 2014 수준별 수능의 정점에서 아래로 꺾이지 않아 사실상 '2차 변곡점'으로 기능하지 못한 결과로 이어졌다. 아래 2026 수능 한 단어 빈칸 추론 문항(31번)을 보면 금세 알 수 있다. 이렇게 긴 글을 1분 30초 안에 읽고 빈칸에 들어갈 말을 추론해야 한다니. 수험생에겐 너무 잔인한 평가 문항이 아닐 수 없다.
2026학년도 수학능력시험 영어 31번 문항
The early grain trade firms were active in both surplus-producing and food deficit regions, and these firms made it their business to know the state of supply and demand in both. Because this information was the key to their ( ___________ ), these firms worked in relative secrecy, frequently built on family ties, trust, and loyalty. In addition, these firms were able to benefit from the rise of commodity exchanges and commodities futures markets that emerged in the mid-1800s. Agricultural markets are naturally unstable, due to changes in harvest size that result from variable weather patterns and other factors. Locking-in prices by buying and selling grain for future delivery helped these firms to minimize such risks. It made sense for the grain trading companies to manage their risks within a single firm that was operating in more than one country, rather than operating as independent national companies trading with each other. Their access to information in multiple markets enabled them to easily cover the risks associated with agricultural commodity trade.
① profitability ② unification ③ innovation ④ reputation ⑤ morality
학술적 연구도 이를 뒷받침 한다. 엄혜랑(고려대학교) 교수는 2022년에 발표한 '절대 평가제 도입 이후 수능 영어 독해지문의 난이도 분석' 논문에서 "절대평가 도입 이후 어휘 복잡성(lexical complexity) 및 통사적 복잡성(syntactic complexity) 측면에서 큰 변화가 없이 보인다"라고 썼다. 이에 앞서 2021년에 중앙대학교 김가현(박사과정 수료)은 김지영 교수와의 공동 연구 논문 '절대평가 도입 전·후 수학능력시험 영어 읽기 지문의 어휘 분석 비교'를 통해 "절대평가 도입 이후 3년간의 영어 읽기 지문의 텍스트가 도입 이전보다 난이도가 높아졌다"라고 주장했다.
'어려운 수능 → 사교육 심화' 고리 끊어야

물론, 대학수학능력시험은 어느 정도 변별력을 갖추어야 한다. 평가 문항이 너무 쉬우면 상위권 변별이 안 돼 줄 세우기를 특징으로 한 한국의 대학입시에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를 넘어서는 고난도 문항은 학교 교육과정을 왜곡하고 사교육을 팽창시킨다.

더군다나 수능 영어영역은 절대평가다. 원점수 90점 이상 1등급 비율이 10%는 되어야 한다. 또한 연도별 난이도가 그 수준으로 일정하게 유지되어야 검사 도구의 동등성이 보장된다.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넘어서는 고난도 문항은 불가피하게 사교육을 불러오고, 사교육이 팽창하면 수능 문제도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어려운 수능 → 사교육 심화 → 어려운 수능' 이런 악순환 고리가 생겨난다.

2023년 3월 국민의힘 김병욱 의원이 한국장학재단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분석해 발표한 바에 따르면, 2021년도 SKY(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신입생 장학금 신청자 중 절반(49.8%) 정도가 소득분위 9∼10구간 학생이었다. 올해 8월 국가인권위원회는 "이른바 '7세 고시', 즉 초등학교 입학 전 유명 영어학원에 들어가기 위해 치르는 시험은 아동 인권침해에 해당한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자녀를 상위권 대학에 보내려면 수능 영어는 중학교 때 이미 끝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온 지도 오래되었다.

결론적으로, 현재와 같은 고난도 수능 영어는 전면적인 개혁이 필요하다. 입시 지옥의 대물림 구조를 끊어내지 못하면 서울대를 10개 만들어봐야 소용없다. 너무 어려운 수능은 '부모 찬스'를 쓸 수 있는 기득권층에게 유리하고, (영화 <설국열차>에 빗대자면) 그들이 기차의 앞쪽 칸을 차지하도록 길을 열어 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가교육위원회, 교육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어깨가 무겁다. 대통령도 교육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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