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2번 타자가 중요하다.’
근 10년 가까이 듣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2번 타자 혹은 2번 타순이 왜 중요한지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신가요?
흔히 하는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1번에 출루율이 좋은 타자가 나가서 출루를 하고 2번에 장타력이 있는 타자가 배치되어 있으면 1회부터 득점을 올릴 수가 있다. 또 강한 타자가 앞에 나오면서 투수에게 압박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야구는 1회가 전부가 아닙니다. 또 제가 투수를 안 해봐서 압박이 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때마침 그 근거가 될 수 있는 자료를 입수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2번이 왜 중요한 타순인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중요한 타순이 몇 번일지도 확인해보려고 합니다.
숫자가 좀 나오는데요. 어려울 것 하나 없습니다. 독일어 전공한 야구 캐스터도 이해하는 이야기니까요.
ESPN의 키스 로는 저서 ‘스마트 베이스볼’에서 2번 타자가 중요한 이유에 대해서 두 가지를 언급했습니다.
1. 직전 타순의 타자는 직후 타순의 타자보다 한 시즌 평균 2.5% 더 많은 타격 기회를 갖는다. 이를 환산하면 2번은 3번보다 한 시즌 18번, 4번보다 한 시즌 36번 더 타석에 들어올 수 있기 때문에 더 강한 타자에게 더 많은 타격 기회를 주어야 한다.
2. 한 팀의 경기 당 총 타석 수에 따른 승패의 5할 승률 역전 구간이 타순의 4번째 바퀴의 2번과 3번이다.
1은 쉬운 이야기입니다. 야구는 1회 1번 타자부터 시작해서 타순이 최소 3바퀴 이상 돌아서 어쨌든 앞에서 끝나는 스포츠니까 앞 타순의 타자에게 더 많은 타격 기회가 돌아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누적이 돼서 한 시즌을 놓고 보면 그 차이는 더 벌어지겠죠.
메이저리그는 팀 당 162경기가 진행이 되는데 평균 앞 타순이 한 시즌 18번 더 기회가 돌아온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KBO의 경우는 어떨까요?
KBO리그에서는 직전 타순의 타자는 직후 타순의 타자보다 평균 15.6회 더 타격 기회를 가졌습니다. KBO공식 기록업체 (주)스포츠투아이에서 훌륭한 자료를 제공해 준 김에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KBO에서는 2번 타자가 4번 타자에 비해서 평균적으로 한 시즌 29타석을 더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한 시즌 팀당 144경기로 메이저리그 보다 18경기를 적게 치르고 있는데도 한 시즌을 놓고 봤을 때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강한 타자를 2번 타순에 배치해서 더 많은 타격 기회를 주는 것은 매우 합당한 판단일 것으로 보입니다.
예를 들어 3번 타순에 주로 나왔던 KIA 김도영이 한 시즌을 꾸준히 2번으로 나왔다면 대략 15.3타석을 더 나올 수 있었습니다. 김도영은 지난 시즌 16.4타석 당 홈런 1개를 때렸기 때문에 대략 한 개 정도의 홈런이 더 가능했을 듯합니다. - 물론 1번으로 나왔을 때 홈런 수가 줄어들었던 심리적인 부분은 제외한 기록입니다.
그럼 '강한 1번'은 안되냐고요? 당연히 1번도 괜찮습니다. KT보세요. 로하스를 간혹 1번에도 쓰면서 팀과 로하스의 개인 기록(2024 타/출/장, 0.323/0.396/0.588)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됐는지를요.
위 표에 따르면 지난 시즌 KBO의 경우 1번 타순에 들어올 경우 4번 타자보다 무려 한 시즌 45타석을 더 소화할 수 있습니다. 거의 한 경기 한 팀의 전체 타석 수에 해당하는 차이죠. 만일 가장 강한 타자가 혼자서 온전히 한 경기를 더 뛴다고 생각해 보세요.
딱 두 선수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지난 2024시즌 각 팀의 RC/27(한 타자가 27개의 아웃 카운트를 당하는 동안 낼 수 있는 득점 수치) 최고 수치 타자 중 주로 4번을 쳤던 선수는 두산 김재환(7.19)과 NC 데이비슨(8.52)이었습니다. 만일 이들이 1번을 쳤다면 팀에 한 시즌 동안 약 두산은 7.19점, NC는 8.52점가량 더 도움이 됐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 여기서 고려하지 않은 것은 타자의 개인 성향입니다. 저 두 타자는 1번을 반가워하지는 않을 듯합니다.
자! 그럼 이제 키스 로가 이야기한 두 번째 근거를 이야기할 차례입니다.
경기 당 팀의 총 타석 수에 따른 승패의 5할 승률 역전 구간이 타순의 4번째 바퀴의 2번과 3번이다.
살짝 말이 어려운 것 같지만 매우 간단하고 쉬운 이야기입니다.
일단 키스 로가 저서에서 제시한 메이저리그의 팀타석수별 경기 승률입니다.
팀의 공격이 38타석 – 팀 타순의 5바퀴째의 2번 타자의 타석 – 으로 끝났을 때는 5할 승률 이하입니다. 반면 39타석 – 팀 타순의 5바퀴째의 3번 타자의 타석 – 으로 끝났을 때는 5할 승률 이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 그럼 같은 내용이 2024시즌 KBO에는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확인해 보겠습니다. 스포츠투아이의 도움으로 조금 더 표를 길게 늘일 수 있었습니다.
매우 재밌습니다. 메이저리그와 마찬가지로 정확하게 경기의 팀 38타석과 39타석에서 승률 5할의 역전 구간이 나타났습니다.그리고 39타석 이상의 타석에서 5할 승률 이하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즉, 팀의 경기당 39타석은 최소한 5할 승률 이상을 기대할 수 있는 타석수라고 볼 수 있습니다.
39번째 타석은 1번부터 9번까지로 되어있는 타순이 4바퀴를 돌고 이어지는 5바퀴째의 3번 타자의 타순입니다. 즉, 2번에서 3번으로 이어준다면 그 경기에서 50% 이상의 승률 이상을 기대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자! 그럼 여기서 멈출 수 없습니다. 스포츠투아이에서 2024시즌의 소중한 기록도 전달해 준 김에 한 걸음 더 나아가 보겠습니다. 위 표를 조금만 확장시켜 보겠습니다. 총타석수에 따른 평균 득점까지 따져보겠습니다.
앞선 표의 확장된 표를 하나 더 보시죠.
2024년 정규 시즌 총 720경기에서 승과 패가 갈린 경기는 710경기였고 그중 승리 팀의 평균 득점은 7.4점이었습니다. 반면 패배 팀의 평균 득점은 3.3점이었습니다.
즉, KBO에서 경기 승리를 위한 기대 득점은 7.4점입니다. 현실에서는 소수점 단위의 득점은 발생할 수 없으니 승리 기대 득점을 7점으로 잡겠습니다.
다시 표 3으로 돌아갑니다.
42번째 타석과 43번째 타석에서 평균득점의 차이가 크게 벌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팀이 42번째 타석에서 경기가 끝났을 때 팀은 평균 6.64점 득점을 하고, 43번째 타석에서 경기가 끝났을 때는 평균 7.29점으로 7득점 이상을 기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승리 기대 득점인 7득점을 충족시키기 위한 타석수는 43타석으로 타순의 5바퀴 째의 7번 타자입니다. 즉, 타순의 5바퀴 째에서 6번 타자가 7번 타자까지 연결해 줄 경우 승리 기대 득점을 위한 필요조건을 만들 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키스 로의 이 접근 자체가 매우 큰 오류가 있습니다. 총타석수를 따지는 데에 있어서 과정은 생략되어 있고, 마지막 타석만 집중했다는 점이 그렇죠. 평균의 함정이죠. 그래도 제가 이 접근 방법을 여러분께 소개해드린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강한 2번 타자라는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 게 벌써 수년째잖아요? 그런데 그냥 2번이 무조건 중요하고, 강한 타자가 앞에 나가는 것이 상대 투수에게 압박이 될 수 있다는 느낌적인 부분만을 여러분께 말씀을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두 번째, 스포츠투아이의 도움으로 2024시즌 KBO리그의 기록을 입수했는데 아주 공교롭게 메이저리그에서 나타난 기록과 같은 특징이 나타났습니다. 이걸 보고 혼자만 '유레카'를 외치기는 싫었습니다.
원래 야구 캐스터는 방송 없을 때 이런 거 소개하는 사람이니까요.
<SBS스포츠 정우영 캐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