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간한 남자랑 결혼, 이런 마을에서 산다는 것

김준수 2015. 5. 31.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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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제17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상영작 <썸머>

[오마이뉴스 김준수 기자]

언뜻 보기에 마을의 분위기는 상당히 평화롭다. 소년들은 모여서 뛰어놀고, 여자아이들은 깔깔 웃으며 이를 지켜본다. 중년 남자는 강가에서 낚시를 하고, 발전소에서 일을 마치고 동료들과 술잔을 기울인다. 특별한 사건이 없는 시골 마을은 여느 도시보다 더 조용하고 포근한 느낌이다.

영화 <썸머>는 이처럼 네덜란드 시골의 어느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삼았다. 콜레트 보토프 감독의 이 작품은 올해로 17회를 맞이한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상영작이다. 좁은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소녀의 시선으로 담았다. 그 안에서 드러나는 많은 이야기들은 영화제의 취지에 걸맞게 생각할 지점을 던져준다.

발전소 인근 마을에서 살아가는 소녀

 영화 <썸머> 중 한 장면. 제17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된 이 영화는 발전소가 위치한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 제17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영화 <썸머>에서는 발전소에서 들려오는 소음이 마을 전체를 뒤덮는다. 기괴한 소리가 귓가를 잠식하는 듯 하지만, 정작 주민들은 크게 신경쓰지 않는 듯한 분위기다. 그곳에서 평생을 살았으므로, 이미 소음이 일상이 되었기에 인지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반핵운동가들이 마을을 방문하지만, 변화를 원하지 않는 보수적 분위기의 남성들에게 모두 쫓겨나고 만다.

관객을 긴장하게 만드는 기괴한 소리가 깔리는 와중에 펼쳐지는 사람들의 모습은 뜻밖에도 나른하다. 10대 청소년들은 자전거를 타고 줄지어 학교에 간다. 16살 소녀 안느는 오빠와 함께 자전거 대열의 앞에 선다. 주인공의 어머니는 식사를 만들며 가사노동을 하고, 아버지는 발전소에서 근무하면서 생계를 꾸려나간다.

막내 남동생은 장애를 앓아서 제대로 걷지 못한다. 오빠는 "답답하다"며 가출을 결심하지만 고작 집 마당의 헛간에 잠자리를 꾸리는 것이 고작이다. 그래도 마을에서 인기있는 아이라서 친구들이 뒤뜰로 모여든다. 발전소 인근 마을에서 살아가는 소녀는 이런 풍경을 조용히 응시할 뿐이다. 워낙 말수가 적은 주인공은 '벙어리 소녀'로 불리면서 마을 10대들과 이질감을 느낀다.

그러던 어느날, 단조롭던 마을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가죽자켓을 입고 오토바이를 탄 여성 '레나'가 등장하면서 안느는 묘한 이끌림을 느낀다. 점점 레나에게 호기심을 느끼는 안느는 주유소에서 일을 하다가 그녀와 인사를 나누고, 우정이라기엔 애매한 감정을 발견한다.

영화가 보여주는 '여성을 향한 시선'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된 영화 <썸머> 중 한 장면. 강간 당한 여자는 가해자와 사건으로 인한 갈등 봉합 차원에서 교회에서 자의가 아닌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 제17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썸머>는 세상과 단절된 듯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보수적이다 못해 폐쇄적으로 보이는 마을의 분위기는 도로가 연결돼 있음에도 '섬'처럼 느껴질 정도다. 마을 입구에서 외부인의 방문에 거리낌없이 불쾌함을 드러내는 장면이 이를 압축한다. 더욱이 적극적인  레나의 등장에 사람들은 그녀를 외계인처럼 기괴한 존재로 대한다. 레나와 사랑에 빠진 주인공 안느의 앞날이 어둡게 느껴지는 이유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남성들의 '여성을 향한 시선'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가 드러내는 폭력성과 연결된다. 이는 마을 여인들의 인물 묘사로 이어진다. 이웃 농부에게 강간 당하는 주인공의 친구, 이웃의 강간 피해보다 깨진 마리아상에 더 슬퍼하는 안느의 사촌, 남편에게 맞으면서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사촌의 어머니, 아버지 모를 아이를 낳은 10대 미혼모까지. 마을에서 여성은 인격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 마치 타자화된 도구처럼 다뤄진다.

'성모 마리아'를 찬양하던 마을 교회는 가정폭력에 시달리다가 자살한 여성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이는 만취한 소년이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성대하게 장례식을 치르는 장면과 대비된다. 또한 강간당한 여성을 가해자 남성과 결혼시키는 것으로 사건을 어설프게 봉합하려고 결혼식을 주관한다.

주인공의 엄마는 다른 마을에서 온 인물이다. 그녀는 잔병치레와 막내아들의 선천적 장애를 발전소 탓이라고 주장하지만 의견은 쉽게 묵살된다. 주인공 안느의 가족과 마을 주민들은 질풍노도의 10대를 보내는 청년들의 탈선은 "남자애들이라 그렇다"고 이해하지만 안느의 커밍아웃은 '철없는 돌출행동'으로 인식한다.

남성 위주의 질서로 유지되는 마을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 보수적 가치관의 공동체 속에서 성별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지배 혹은 배제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영화는 보여준다.

평탄한 줄거리 구성, 입체적인 인물 묘사

 영화 <썸머> 중 한 장면. 영화는 줄지어서 자전거를 타고 등교하는 청소년들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 제17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영화 <썸머>는 '기승전결'의 줄거리 진행이 뚜렷한 미국 영화를 주로 관람하는 한국 관객들에게는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극의 구성이 상황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등장인물의 입체적인 묘사에 무게를 두었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흘러가면서 주인공과 등장인물이 위기와 갈등을 겪는다. 그러나 상황을 긴박하게 만들기 위해서 인물의 성격을 단조롭게 하는 대신, 반대로 인물의 내적 변화에 집중했다.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 일부는 선택에 따라서 달라진다. 주인공 안느는 레나와 당당하게 연애하면서 더 이상 주위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둘은 마을의 발전소 앞에서 반핵 시위에 참가한다. 사촌은 애지중지하던 마리아 상을 모두 내던진 뒤 마을을 떠난다. 안느의 친구였던 미혼모는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교회 연단에서 당당하게 밝힌다.

물론 안느의 어머니와 많은 여성들은 여전히 남성들이 내키는 대로 살아가는 곁에 묶인 듯이 지낸다. 그들의 모습은 밝은 표정의 안느와 레나,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한 여성들과 사뭇 다르게 보인다. 감독은 관객으로 하여금 ,결국 기존의 질서에 부합하기를 요구하는 목소리와 보수적 가치관이 무엇을 희생하면서 이루어지는지 돌아보게 한다. 그것들이 여성의 소외와 멸시가 당연한 것처럼 일어나게 만들면서까지 진정 필요한 것인지 묻는 듯 하다.

영화 <썸머>는 '각자의 위치'를 인식하면서 달리는 10대 청소년들의 자전거 무리로 시작해서, ''자신의 길'을 택하면서 갈라진 상황으로 마무리된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어느 '여름'은 사랑과 방황, 선택과 혼란을 겪는 과정을 거치면서 '벙어리 소녀' 안느를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여성'으로 발돋움하게 했다. 그녀가 의견을 드러내는 일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마음을 열기까지의 이야기가 막을 내리자, 상영관 안에서는 낮은 박수소리가 잔잔하게 울려퍼졌다.

덧붙이는 글 |영화 <썸머>는 제17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상영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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