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적자(適者)' 아닌 '적자(赤字)' 생존의 시대

10년 전 이스라엘 출장을 다녀왔다. 이스라엘의 성공 비결을 다룬 책 『창업국가(원제: Start-Up Nation)』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던 때다. 명문 텔아비브대학과 테크니온공대, 이스라엘 전역의 사이언스 파크 등을 살펴봤다. 그 나라 최고의 연쇄 창업가(Serial Entrepreneur·새로운 기업을 계속해서 세우는 창업가)도 만났다. 그는 “20여개의 기업을 만들었고, 이 중 두 개를 성공적으로 팔았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이미 억만장자였다.
성공 비결은 의외로 간단했다. “될성부른 아이디어를 내고, 그 아이디어를 토대로 투자자를 찾는다”고 했다. “아이디어를 현실 제품으로 만드는 건 자신의 몫이 아니다”라고도 했다. 창업의 시작은 ‘제대로 된 무언가를 내놓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기자에게 그는 ‘미덥지 않은 인물’로 보였다. 당시 느꼈던 충격과 배신감(?)은 지금도 생생하다.

쿠팡의 미국 뉴욕 증시 상장이 화제다. 11일(현지시각) 상장 하루 만에 주가는 공모가(35달러)에서 40.7% 급등한 49.25달러가 됐다. 시가총액은 100조원을 넘겼다. 삼성전자(약 494조2980억원·12일 종가 기준)에 이어 국내 기업 중 두 번째다. 쿠팡의 기업가치가 롯데쇼핑(3조5927억원)이나 이마트(4조9758억원)는 물론 네이버(62조5022억원)·카카오(42조6669억원)보다 큰 게 맞냐는 지적도 나온다. 하지만 기업 가치는 시장이 정한다. 부풀려졌다면 꺼질 것이고, 잘해낸다면 더 커질 것이다.
쿠팡 상장이 보여주는 분명한 사실은 이제 우리도 10년 전 이스라엘 창업가가 말했던 방식의 창업·경영방식을 인정해야 한단 점이다. 사실 쿠팡은 2010년 8월 창업 이후 단 한 번도 흑자를 낸 적이 없다. 4조5500억원이란 적자를 보면서도 투자자의 돈으로 버텼다. ‘적정 가격’ 이하로 물건과 서비스를 팔아 손님을 늘리고, 그 손해는 사실상 투자자에게 넘겼다. 기존 대기업으로선 따르기 힘든 방식이다. 과거 같았다면 쿠팡은 이미 사멸했어야 한다. 하지만 상장을 준비 중인 마켓컬리를 비롯해 쿠팡식(式) 기업은 계속 늘어날 것같다.
전통의 유통 강자인 롯데쇼핑과 이마트가 당혹감을 느끼는 지점도 바로 여기다. 적자(赤字)를 보면서도 죽지 않고 살아있는, 다른 의미에서의 적자생존(適者生存·환경에 적합한 자가 살아남음)이다.
기존 기업으로선 억울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제 그런 방식으로 일하는 기업들과 겨뤄야 한다. ‘완제품 없는 창업이 가능하냐’는 사고방식으론 살아남기 힘든 세상이다.
이수기 산업 1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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