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에 남,녀가 있나요?
젠더리스의 확산
10여 년 전, 남자친구였던 지금의 남편은 좋은 피부를 갈망했다. 피부과 시술에 종종 돈을 들였고, 꽤 값비싼 남성 전용 화장품 구입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들인 공에 비해 결과는 남루했다. 나는 그에게 유분기를 앗아가지 않는 세안제와 보습력 좋은 모이스처라이저, 붉은 기를 커버해줄 비비크림 등 내가 즐겨 쓰는 화장품을 선물했다. 결혼 후 우리는 화장품은 물론 더 많은 것을 공유하는 사이가 됐다. 화장품과 향수를 구분 없이 원하는 대로 골라 쓰고, 옷도 공유한다. 화장대와 옷장을 채우는 일은 ‘같이 쓰자!’는 핑계로 서로에게 좋은 쇼핑의 명분이 되었다.
그사이 세상이 변했다. 패션과 뷰티업계에는 ‘젠더리스(genderless)’ 개념이 점점 확산하며 자리 잡았다. 혁신적이며 명석한 마켓 분석 능력을 지닌 브랜드들은 남녀 공용 제품을 선보이며 불황 속에서도 새로운 시장의 주역으로 자리매김했다. “냄새에는 성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개념을 지닌 바이레도 창립자 벤 고햄은 잉크병 모양 향수를 세상에 내놨다. 검은 글씨를 새긴 흰 라벨의 담백함, 직관적이지 않은 향의 이름은 오직 후각과 취향에 따른 선택을 따르게 만든다. 이런 쿨한 감성의 브랜드가 사랑받자 성을 규정짓는 브랜드와 마케팅은 꽤나 고리타분한 것이 되었다. 특히 니치 향수가 이러한 젠더리스 붐을 일으킨 까닭에 로컬부터 글로벌까지 뷰티업계에서는 성별 마케팅이 사라지고 있다.
2 20주년 기념으로 완성한 샤넬 J12 패러독스 워치.
3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지 않는 바이레도 선글라스 컬렉션 캠페인.
4 구찌의 2021 리조트 컬렉션.
5 루도빅 드 생 세르넹의 2020년 F/W 컬렉션.
6 더 이상 성별 마케팅을 하지 않는 몰튼 브라운의 새 향수.
젊음과 건강, 피부 관리, 좋은 향기 등 외형적 아름다움은 남녀를 막론한 공통의 관심사가 됐다. 몇 달 전, 다양한 직종의 남성에게 즐겨 사용하는 뷰티 제품에 대한 답변을 구했을 때 가장 많은 답안에 포함된 제품이 바로 라 메르의 크렘 드 라 메르다. 탁월한 제품력이야 잘 알려졌지만, 상당히 고가 제품이기에 실제로 남성들이 즐겨 쓴다는 사실에 많이 놀란 기억이 있다. 이러한 사실을 방증하듯, 얼마 후 라 메르가 배우 공유를 모델로 발탁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부드럽고 세련된 분위기로 여성은 물론 남성에게도 좋은 인상을 전하는 그가 하이엔드 뷰티 브랜드의 모델이 된 것은 시대 변화를 반영한 꽤 파격적 행보로 비쳐졌다. 이처럼 요즘 남성에게 노화나 잡티, 건강한 피부 톤에 대한 니즈는 보편적인 것이 되었고, 눈썹의 결과 숱을 정리하고 피부 보정을 위해 파운데이션을 바르는 등 메이크업 제품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높아졌다. 성 중립적 가치관을 지닌 남성을 겨냥한 뷰티업계 제품의 다양성도 주목할 만하다. 샤넬은 그루밍에 관심이 높은 남성을 겨냥해 보이 드 샤넬 라인을 출시했고, 지방시 뷰티는 ‘Share the beauty’즉 아름다움은 공유하는 것이라는 취지로 남녀가 함께 사용 가능한 미스터 컬렉션을 선보였다. 모두 누구나 자연스럽고 쉽게 메이크업을 할 수 있는 제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원화 역시 업계의 주된 화두
얼마 전, 제품 촬영 섭외를 위해 브랜드 홍보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브랜드의 상징적 엠블럼을 장식한 벨트 백이었다. 하지만 룩북에는 남녀 공용 제품임이 명시되어 있지 않은 상황. 남성 매거진에도 협찬이 가능하느냐는 물음에 딱히 성별을 구분 짓지 않은 가방이니 얼마든 촬영하라는 홍보 담당자의 적극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2020년 F/W 시즌의 다양한 컬렉션에서도 성의 중립적 변화가 예고되고 있다. 남편이나 남자친구의 옷장을 기웃거리던 여성처럼, 이제 여성의 옷장을 탐닉하는 남성의 시대가 도래할지 모른다. 해방과 자유의 시대였던 1970년대를 주요 테마로 한 구찌와 셀린느, 드리스 반 노튼 컬렉션은 실루엣과 소재 등 여성도 기꺼이 지갑을 열 만한 피스로 가득했고, JW 앤더슨, 프로나운스, 팔로모 스페인처럼 실험적 태도를 지닌 젊은 디자이너 브랜드는 페플럼 디테일의 니트 톱, 실크 캐미솔, 코르셋 등 여성복에서나 볼 수 있던 아이템을 남성복으로 끌어들였다. 옷뿐 아니라 가방에도 이러한 단서가 심심찮게 포착된다. 패션 하우스의 상징적 백(과거 여성을 위해 디자인한)은 본래의 디자인을 그대로 살려 남성 컬렉션에도 등장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를 평정한 구찌의 재키 백이 대표적으로 GG 자카드, 가죽 트리밍, 그린 웹 디테일 모두 예전 모습 그대로 부활했다.
2 루이 비통 볼트 컬렉션.
3 페플럼 장식 니트 톱을 선보인 JW 앤더슨의 2020년 F/W 컬렉션.
4 레이스, 뷔스티에 등을 접목한 팔로모 스페인의 2020년 F/W 컬렉션.
5 라 메르의 크렘 드 라 메르.
주목할 만한 것은 패션과 뷰티업계에 확장되는 성 중립적 태도와 다원화가 LGBT(성소수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예쁘게 화장한 남성 아이돌, 중성적 스타일을 근사하게 소화하는 남성 배우처럼 대중의 사랑을 먹고 사는 이들이 시대 변화의 신호탄을 자처한 것. ‘인간 구찌’이자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페르소나와도 같은 해리 스타일스는 시스루 러플 블라우스, 진주 목걸이를 완벽히 소화하는 동시에 네일 아트를 즐기는 등 기존 ‘여성의 영역’을 자유롭게 오간다. 하지만 그가 많은 여성에게 사랑받는 가수이자 배우이며, 패션 아이콘인 동시에 톱 모델과 데이트를 즐기는 이성애자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수려한 외모의 영화배우 티모테 샬라메는 지난 2월에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다른 레드 카펫 룩으로 화제를 모았다. 대개 남성 배우가 턱시도를 입는 것이 공식임에도 그는 프라다의 네이비 보머 재킷을 타이 없는 화이트 셔츠와 매치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더욱 눈길을 끈 것은 왼쪽 가슴을 장식한 다이아몬드와 루비 브로치로, 1955년 까르띠에가 만든 빈티지다. 시계가 아닌 남성의 하이 주얼리라니! 그가 쏘아 올린 작은 공에 화답하듯 하이 주얼리업계 역시 발 빠르게 수요와 공급을 새롭게 확장하고 있다. 강인한 스터드 장식이 특징인 클래쉬드 까르띠에는 러브와 저스트 앵 클루의 뒤를 잇는 까르띠에의 샛별로 부상했고, 루이 비통은 8월 중순 남녀 모두를 위한 하이 주얼리 볼트 컬렉션을 새롭게 런칭했다. 그뿐 아니라 샤넬 역시 많은 여성의 손목을 수놓았던 샤넬 J12 워치, 퀼팅 모티브가 특징인 코코 크러시 컬렉션에 남녀 글로벌 앰배서더를 함께 기용하는 등 남녀 모두를 위한 것으로서 저력을 넓히는 중이다. 마침내 뷰티와 패션을 넘어 남성 역시 평생을 함께할 주얼리를 자연스레 구입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남성도 아름답길 원한다. 그리고 아름다움을 원하는 이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 아름다움을 좇는 욕망은 보편적인, 모두의 것이니까.
에디터 정유민(ymjeong@noblesse.com)
사진 김흥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