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억 백지신탁 싫다" 사퇴한 구청장…구민들 "살다살다 처음 본다"

이영근 2024. 10. 16.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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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일 구로구청장이 2022년 7월 1일 서울 구로아트밸리 예술극장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 문 구청장은 취임 2년 3개월 만인 지난 15일 자신이 보유한 주식 백지신탁을 거부하며 사퇴를 발표했다. 뉴시스


" 최소한 구청장 하면서 받은 월급은 전부 반납하고 나가야지. "
16일 오후 서울 구로구 신도림동에서 만난 안소자(89)씨는 이 같이 목소리를 높였다. 자신이 보유한 주식을 백지신탁하는 대신 자진 사퇴를 택한 문헌일 구로구청장에 분통을 터트리면서다. 문 구청장은 따로 기자회견 없이 “구민 여러분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돼 매우 송구스럽고 죄송한 마음”이라는 A4용지 한 장 분량의 짧은 사퇴문을 발표했다. 문 구청장 사퇴로 내년 4월 새 구청장을 뽑기 위한 보궐선거를 치러야 한다.

구로구 소재 ‘문엔지니어링’이라는 정보통신설비 회사를 운영해온 문 구청장은 국민의힘 소속으로 2022년 지방선거에서 당선됐다. 그러나 지난해 3월 인사혁신처 주식백지신탁심사위는 “직무관련성이 인정된다”며 그가 보유한 문엔지니어링 주식 4만8000주(평가액 약 170억원)을 팔거나 백지신탁하라고 결정했다. 문 구청장은 서울행정법원에 불복소송을 냈고, 최근 1·2심에서 모두 패했다.

1심 판결문에 따르면, 문 구청장은 “구로구 내 다른 업체로부터 수주를 받지 못하게 회사 정관을 변경했고, 본점을 금천구로 이전해 직무관련성이 인정된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정관 변경과 본점 소재지 이전만으로는 구로구청장으로서 업무를 수행할 때 회사의 경영 등에 관한 상당한 정보를 입수하거나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차단된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16일 오후 서울 구로구 신도림동 디큐브시티아파트 입구에 붙은 플래카드. 오피스 시설로 용도 변경돼 오는 6월 폐점을 앞둔 현대백화점 디큐브시티점의 폐점을 반대하는 주민들의 목소리가 높다. 이영근 기자


초유의 수장 공백 사태에 직면한 구로구민은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구로구에 24년째 살고 있는 양모(76)씨는 “백지신탁이 하루이틀 된 제도도 아닌데 문제될 것 같았으면 애초부터 출마를 안했어야 한다”며 “재보궐 선거를 열면 혈세도 낭비되는 건데 책임감이 없다”고 비판했다. 구로구민 안모(37)씨는 “살다살다 임기 2년 만에 주식 챙기겠다고 나가는 구청장은 처음 본다”며 “사익(私益)을 우선하는 구청장이 임기 내내 제대로 일을 했는지도 의문스럽다”고 지적했다.

구로구에는 현대백화점 디큐브시티점 폐점, 구로거리공원 지하주차장, 천왕동 수소발전소 건립 등 주민 반발이 큰 현안이 산적해 있다. 디큐브시티아파트 주민 이경민(68)씨는 “현대백화점은 낙후 지역으로 인식된 구로구의 유일한 대형 편의시설인데 하루아침에 없어질 위기”라며 “구청장이 전문가가 참여한 공청회도 열지 않고 물러나니 분개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문 구청장 사퇴를 계기로 주식 백지신탁 제도도 도마 위에 올랐다. 주식 백지신탁은 2005년 도입된 제도다. 공직자가 직위 또는 직무상 알게 된 정보를 이용해 주가에 영향을 미쳐 재산을 증식하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마련됐다. 재산공개 대상자인 고위 공직자 본인와 배우자 등 이해관계자가 보유한 주식의 총 가액이 3000만원을 넘을 경우 2개월 안에 주식을 매각하거나 백지신탁을 해야 한다. 백지신탁위 심사에서 직무관련성이 없다는 판단을 받아야 백지신탁 의무를 면제받을 수 있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러나 제도에 빈틈이 많다는 비판도 나온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이날 입장문을 내고 “현재 공직자들이 백지신탁 명령에 불복하며 소송을 남용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으며, 이러한 소송이 ‘시간 끌기’ 전략으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인사혁신처에 따르면 백지신탁위의 직무관련성 심사 결정 취소 행정심판·소송은 2021년 1건에 불과했지만 2022년 3건, 지난해 최소 7건으로 늘었다. 지난해 10월 국회 행안위 소속 이성만 전 무소속 의원이 인사혁신처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4년부터 지난해 8월까지 10년 동안 공직자 직무관련성 심사를 한 5073건 중 889건(17%)은 직무관련성이 있다는 결정이 나왔다. 이 중 11건(명)이 불복하는 행정 소송을 냈고, 5건(명)은 소송 진행 중 임기가 끝나면서 결국 소가 취소됐다.

실제 2022년 6월 임명된 박성근 전 국무총리 비서실장은 배우자가 사내이사로 있는 서희건설 등 65억원대 주식을 백지신탁하라는 결정에 불복해 소송을 벌였지만 지난 5월 각하됐다. 재판부는 “박 전 실장이 사직의사를 표시해 지난해 12월 면직됐고 총리비서실장 지위에 있지 않은 사실이 인정된다”며 “주식 매각 또는 백지신탁 의무를 더 이상 부담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지난해 10월 인사혁신처는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에 제출한 ‘주식백지신탁제도 관련 국정감사 지적사항 검토’ 보고서에서 “백지신탁위의 결정에 불복 절차를 밟아 주식 매각이나 백지신탁 의무집행이 정지된 기간 동안 (이해충돌 가능성이 있는) 직무에 관여하는 것을 금지하는 규정을 명문화하는 것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아직 변화는 없는 상태다. 인사혁신처 관계자는 “관련 내용을 포함하여 다른 개선할 내용이 있는지 종합적으로 살펴보는 중”이라고 말했다.

이영근 기자 lee.youngke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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