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연기획사, 뮤지컬파크 김향란 대표 -
Q.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90년대, 해외 공연을 한국에 선보인 1세대 해외 라이선스 뮤지컬 프로듀서이자 현재는 주로 재즈 공연 등 연주 공연을 기획하는 공연기획사, ‘뮤지컬파크’의 대표 김향란입니다. 뮤지컬 파크는 뮤지컬 라이선스 계약, 음반 프로듀싱, 공연 페스티벌 기획, 해외 공연 시나리오 번역, 창작극 제작 지원 등 다양한 공연 관련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좀 뜬금없어 보이지만, 해외 업무를 주로 하던 저는 2002년 창립된 국제 청소년 창업대회, 쎼이지월드컵과 2019년에 연을 맺고, 현재 쎄이지코리아의 대표를 맡아 한국 대회를 주관하고 있습니다.
Q. 공연기획자의 길로 들어선 계기는 어떻게 되나요?
전 커리어를 광고대행사에서 시작했다고 보면 맞아요. 졸업 후 방황하던 시기에 잠깐 출판사에서 일을 한 적은 있지만요. 이래저래 글 쓰는 것이 저한테 잘 맞았던 것 같아요. 광고대행사에서 외국 클라이언트 담당 AE를 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삼성전자 나이세스팀에서 홍보담당으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어요. 당시 광고대행사가 연봉이 더 높아서 조금 망설이긴 했지만 길게 보고 삼성전자에 특채형식으로 입사를 했어요. 당시 삼성전자는 막 시디 플레이어를 출시했는데, 이를 판매하기 위한 소프트웨어 개발 필요성을 느끼고 나이세스라는 레이블로 직접 음반을 발매하기 시작하고 있었거든요. 이때 나이세스에서 출시되는 음반 그리고 음반을 낸 가수들을 홍보하는 것이 제 임무였어요. 그렇게 음악 관련 일을 시작했는데, 나중에 나이세스가 삼성영상사업단으로 통합되면서 공연팀이 생겨났고, 그때 전 순전히 영어를 한다는 이유로 해외공연 담당을 맡게 됐던 거죠. 그러니까 뭘 알아서라기보다는 그때 회사 상황이 그리되어 우연찮게 공연 일을 하게 된 것이 업이 되어버린 경우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참 재미있었어요. 적성에도 잘 맞았고요. 당시에는 왜 뮤지컬이나 예술경영 같은 분야를 체계적으로 공부할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 지금 참 후회됩니다. 대학시절부터 시작된 두통과 피로, 등뼈 통증 등으로 항상 흐리멍덩한 상태로 지냈기 때문에 무엇 하나 똑 부러지게 할 생각을 못했고 전공 공부도 흐지부지해서 머리에 남은 게 없었어요. 지금 뒤돌아보니 많은 부분이 체력이 달렸던 것, 특히 두통 때문인 것 같아요. 최근에 어떤 계기로 두통이 사라졌는데 머리가 어찌나 맑고 집중이 잘 되는지 ‘내가 만약 젊었을 때 두통만 없었더라도 참 많은 것을 이루었겠구나’하고 나도 모르게 탄식을 하고 있더라고요. 두통이 만성이 되니 남들도 그러려니 하고 대충 살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죠.
Q. 90년대 브로드웨이를 누비고 다니던 헬렌 킴, 지금의 커리어에 오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합니다.
한마디로 파란만장했죠. 그때도 삼성 끗발이 끝내줬어요.
한마디로 파란만장했죠. 삼성영상사업단 공연팀 해외공연 담당 과장이었으니 얼마나 일하기가 쉬웠겠어요. 삼성 이름으로 먹고 들어가는 게 얼마나 많은 지 짐작이 가실 거예요. 딱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그런 경우죠. 런던과 뉴욕을 날아다니며, 세계 굴지의 뮤지컬 제작사들, 예를 들어, RUG(The Really Useful Group), 디즈니 씨어트리컬(Disney Theatricals), 카메론 메킨토쉬를 비롯하여 브로드웨이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뮤지컬 프로듀서들과 일을 하게 되었죠. 당시에 브로드웨이에서 헬렌 킴 하면 다 알 정도였어요. 디즈니는 절 VIP로 대우했었고요. 아직도 라이언 킹(Lion King) 오프닝 나잇에 초대되었던 기억을 잊지 못해요. 어마어마했었죠. 브로드웨이 42번가 쪽 길을 다 막고 초대장이 없는 사람은 갈 수 없도록 거리 하나를 다 통제했어요. 얼굴만 봐도 다 아는 셀럽들을 여자 화장실에서 봤고요. 엘튼 존이 축하공연을 했던 오프닝 나잇 파티도 정말 어마어마했죠. 막 그렇게 엄청난 프로젝트들을 기획하기 시작했는데 하필 1997년 외환 위기가 터졌어요. 삼성은 하필이면 제가 속해있는 삼성영상사업단을 해체하기로 결정했고, 사업단은 공중분해되고 말았어요. 전 이듬해인 1998년 5월 명예퇴직 형식으로 강제 퇴직을 당하게 되었죠. 그 엄청난 해외 인맥을 양손에 쥔 채 말이죠. 그때만 해도 그 인맥이 얼마나 대단하고 중요한 지 몰랐어요. 그냥 막막한 상태에서 일단 소규모 공연기획사로 옮겨 숨 고르기를 하고 아기를 낳을 결심을 했죠.
출산 후 ‘오페라의 유령’으로 화려하게 컴백
출산 후 대충 헤매고 있는데 ‘오페라의 유령’을 하자는 제의를 받았어요. 제가 가지고 있던 해외 인맥의 가치를 알아본 사람이 있었던 거죠. 2000년에 RUG의 호주지사인 RUC와 시작한 ‘오페라의 유령’ 한국어 버전 프로젝트는 협상과 계약에만 꼬박 1년이 걸렸고 계약서만 45개에 달했어요. 역삼역 엘지아트센터에서 개막된 공연은 엄청 성공적이었어요. 2001년 당시 단일 뮤지컬 프로젝트로는 사상 최대인 200억이라는 매출을 달성했고, 그야말로 한국 뮤지컬의 역사를 새로 써버렸죠. 그 이후 ‘미녀와 야수’, ‘캐츠’를 비롯하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42번가’ ‘킹 앤 아이’, ‘사운드 오브 뮤직’, ‘애니’ 등등 이후 한국에 라이선스 된 대부분의 대형 뮤지컬들은 제 손을 거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죠.
‘스텀프’시조새, 영국 에든버러에 ‘난타’ 론칭
한국에 넌버벌 퍼포먼스(Non-verbal Performance) 붐을 일으켰던 ‘스텀프 STOMP’도 제가 기획해서 성공했던 프로젝트였어요. 당시 얼마나 홍보를 했는지 몰라요. 사람들에게 당시로서는 생소했던 넌버벌 퍼포먼스를 홍보하긴 쉽지 않았죠. 이태원 길거리에서 외국인들에게 전단을 나눠주면서 ‘STOMP is coming!’을 얼마나 외쳤는지 몰라요. 그런 열정이 어디서 났었는지 참. 하지만 그런 엄청난 물량공세와 홍보활동이 먹혀들어 스텀프는 엄청 성공했죠. 이후 이를 본 딴 수많은 국내 넌버벌 퍼포먼스들이 생겨났죠. ‘두드락’, ‘도깨비 스톰’, ‘난타’, 등등요. 그중 난타가 유일하게 살아남은 공연이었는데, ‘난타’의 해외공연 계약 물꼬도 제가 텄지요. 송승환대표도 제가 가지고 있던 해외인맥의 힘을 알아본 사람 중 한 사람이었죠. 저만 보면 난타 좀 수출하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어요. 처음엔 난타의 퀄러티 때문에 망설였어요. 하지만 송승환 대표가 진심이고 절실한 것 같아 마침내 나서보기로 했죠. 에딘버러를 시작으로 난타는 성공적으로 세계 넌버벌 시장에 론칭을 했고, 그 여파로 국내 공연이 대박이 났어요. 한국인들은 뭐든 해외에서 잘 됐다고 하면 호기심이 급발동하는 모양이었어요.
사람에 실망, 건강이 무너지며 ‘나’에 집중하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몇 번에 걸쳐 배신을 당하고, 이후 진행했던 몇몇 프로젝트들이 실패하면서 공연계에서 슬슬 밀려나기 시작했어요. 어찌 보면 이것 또한 체력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아요. 부당한 일을 당하면 이를 시정하기 위해 물고 늘어지면서 싸워야 하는데 체력이 달리니 그냥 포기해버렸어요. 그 스트레스를 감당할 체력이 안됐던 거죠. 만성 두통과 만성 피로를 안은 채 아이 키우랴, 가사일 하랴, 남편 공연하고, 집안 살림도 꾸려야 했으니. 그때는 억울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때 포기하지 않고 싸웠더라면 아마 건강이 무너졌을 거라고 생각하니 포기한 게 현명했던 것 같아요. 암 같은 병을 얻을 수도 있었을 거잖아요. 아무튼 성공의 기초는 체력이라는 생각을 강하게 하게 되었고 이후 아이를 키울 때도 공부를 시키기보다는 뛰어놀면서 기초체력을 기르고 건강한 정신을 기르도록 했던 것 같아요.
뮤지컬을 포기해버린 대신에 남편 공연에 집중했죠. <재즈 크리스마스!>와 <서머나잇재즈!> 같은 남편 프로젝트들은 의외의 성공을 거두며 매해 매진을 이어갔고, 서울 국제 재즈 페스티벌도 2회를 개최했어요. 태화강 재즈 페스티벌 해외 아티스트 프로그래머로 8년째 일하고 있고요. 굳이 뮤지컬에 연연할 필요가 없게 되었지요. 22년째 이어오는 <론 브랜튼의 재즈 크리스마스!> 공연은 올해도 12월 21일 과천시민회관 대극장, 12월 22일 광림아트센터 장천홀, 12월 24일 대전예술의전당 아트홀에서 열릴 계획이에요. 특히 작년부터 소프라노인 딸이 특별 게스트 형식으로 출연하여 공연을 같이 하고 있어요. 어렸을 때 무대공포증도 극복할 겸 꼬마 게스트로 3년간 출연시킨 적이 있었는데 벌써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소프라노로 성장했어요.
Q. 화려한 커리어의 길을 걸어오셨는데, ‘김향란의 커리어’는 어디까지 와 있나요?
‘내일모레’ 60을 바라보는 김향란의 커리어는 ‘늘 새로움에 도전하는 공연기획자’입니다. 예전엔 건강 문제로 포기해야 하는 것이 많았어요. 지금은 건강이 많이 좋아져서 새로운 일들을 기획하고 있어요. 대학 때 영문학을 전공하기도 했고 워낙 글쓰기도 좋아해 오랫동안 꿈꿔왔던 영어 창작극을 준비하고 있어요. 창작 뮤지컬도 한편 만들어놓긴 했는데 흥행 부담 때문에 아직 무대에 올리지 못하고 있어요.
저는 이제 큰 욕심을 부리지말자! 미루지 말자!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하자! 라는 다짐으로 모든 일에 임하고 있어요.
그래서 시작한 것이 바로 ‘영어연극’이에요.
제가 자신있는 두 가지를 꼽으로면, ‘영어’와 ‘공연’이라 연극을 통한 ‘영어와 연기 교육’을 기획하고 있어요. 영어공부와 연기공부를 원하는 성인을 대상으로 단원으로 모집하여 제가 쓴 영어 창작 시나리오를 ‘교재’ 삼아 영어를 가르치며, 연기를 지도해 일반인의 영어연극 공연을 무대에 올리려고 해요. 올해 가을에 개강해 3개월을 함께 준비해 12월 공연을 계획하고 있답니다. ‘영어를 못하는데, 연기가 처음인데….’ 하며 참여를 망설이시겠죠? 그런데, 그렇게 쭈볏거리던 분들이 거짓말처럼 3개월 후, 긴 영어 대사를 외우고 자연스럽게 연기를 해내는 걸 보고 확신을 얻었어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영어교육은 시나리오의 문장을 분석하고, 감정선을 이해하고, 대사를 통째로 외우다 보면, 영어 문장이 내 것이 되고, 심지어 자연스럽게 대사를 내뱉을 수 있는 연극을 통한 일상영어 교육! 이라고 믿고 있어요. 내가 가진 두 가지 재능, ‘영어’과 ‘공연’을 한 번에 실현시킬 수 있는 ‘영어연극공연’에 지금 저의 열정을 쏟고 있습니다
Q. 현재 본인의 ‘커리어브랜딩’에 만족하세요? ‘커리어 브랜딩’에 있어서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젊었을 때, 잘 나갈 때는 여성잡지나 주간지, 일간지에도 꽤 자주 오르내리던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결정적으로 주목을 끌만한 이슈는 없었던 것 같아요. 소소하게 미디어에 소개되었지만,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만한 ‘저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고, 저도 그때는 어떻게 저를 스스로 브랜딩해야 하는지, 전혀 몰랐어요. 그러다가 개인사업자로 돌아서면서 세간의 이목에서 멀어졌던 것 같아요. 매체들이 냉정하잖아요. 개인 기획사 대표에게서 얻어 낼 게 뭐가 있겠어요. 매력도 없고 보도가치도 없고, 또 주목받을만한 프로젝트를 하지도 못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오페라 유령’이 성공한 이후 주요 일간지 중 하나가 저를 전면 기사로 기획해서 대대적인 인터뷰를 했었는데, 기사가 나오기로 되어있던 날 저녁에 911 테러가 터졌고, 그 기사는 영영 빛을 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게 저에게는 앞서 말한 그 ‘결정적인 한 방’이었을 것 같았는데 말이죠. 그 기사가 나왔다면 뭐가 좀 달라졌을까요?
공연기획자에게는 유명 공연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해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오페라의 유령’이랄지, ‘캐츠’ 이런 거요. 전 여러 훌륭한 기회들을 살리지 못한 채 묻혀버린 경우가 되겠죠. 이것은 개인의 운과도 연관이 있다고 봐요. 주변의 질투와 배신까지도 말이죠.
저는 ‘의미 있는 일’을 지속하려면, 어쨌거나 지속적인 홍보 활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일관성 있고, 시의성 있는 메시지로 대중과 소통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아요.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SNS를 열심히 하지만 저 같은 세대에겐 정말 쉽지 않네요. 꼰대같이 들릴지 모르겠지만 크게 신뢰가 가지도 않고요. 특히 ‘사실’를 의심케 하는 가짜 뉴스들이 판치면 판칠수록 정통 언론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니, 언론과의 관계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Q. 향후 커리어 목표는? 이를 위해 어떤 준비와 노력을 하고 있나요?
남편과 같이 만들어놓은 창작 뮤지컬<타이거>가 한편 있어요. 이걸 무대에 올리려면 펀드레이징을 해야 하는데 쉽지 않아요. (복권을 사서 당첨이 되면 아마 올릴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예산 내에서 할 수 있는 프로젝트들을 하는 것이 지금의 목표입니다. 우선 연례적으로 해오고 있는 론 브랜튼의 <재즈 크리스마스!> 공연과 태화강 재즈 페스티벌 뮤지션 라인업을 잘 해야 하고요. 현재 제가 라이선스를 가지고 있는 오프 브로드웨이 뮤지컬 한 편도 무대에 올려야 합니다. 그리고 재즈 페스티벌을 하나 만드는 게 제 꿈인데, 그것과 관련해서는 국제재즈협회를 결성하여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어요.내년부터는 인디애나 대학에서 성악 석사를 마치는 딸의 매니지먼트도 시작할 계획이에요. 제 딸은 제이콥스 스쿨 오브 뮤직에서 오페라 보이스(Opera Voice)를 공부하고 있는데 최근 들어 실력이 부쩍부쩍 늘고 있어요. 성악은 일정 나이가 되어야 무르익는 거라 성급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서서히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아요.
‘나’와 ‘가족’의 미래를 위해 일한다!라는 것이 제 남은 인생의 목표인 것 같아요. 저는 되찾은 건강을 지키며,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욕심부리지 않고 즐겁게 해 나아갈 겁니다! 그러다 보면 길이 열릴 거라고 믿고 있어요.
※ 해당 기사는 개인의 브랜딩을 돕는 플랫폼, ’꺼리어’에 등록된 회원의 인터뷰입니다.
'꺼리어'(www.kkurry.com)는 세상의 모든 꺼리어들(자신의 커리어를 성장시키고 싶은 사람들)과 취재원을 찾는 미디어가 직접 만나 미디어를 통해 자신을 브랜딩하고 명성을 얻을 수 있도록 돕는 커리어 브랜딩 플랫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