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못산다… 다시 뜨는 ‘하숙집’
지난 8일 오전 8시쯤 서울 성동구 한양대 근처의 한 하숙집. 민군자(82·여)씨가 오전 6시30분쯤부터 부엌에서 분주하게 아침밥을 준비하고 있었다. 7년째 하숙집을 운영 중인 민씨는 “매일 아침저녁마다 하숙생들 식사를 준비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했다. 민씨의 하숙집 방은 6개인데 입주가 완료된 상태였다.
하숙집 공용 공간 중앙 식탁에는 계란말이와 소고기장조림을 포함한 반찬 9개가 놓여 있었다. 식사 준비가 끝난 지 한참 지난 오전 8시30분, 식탁으로 나온 하숙생은 한 명도 없었다.
하숙생을 깨우는 민씨 목소리가 여러 차례 들린 뒤에야 한양대 재학생 최종윤(21)씨가 식탁으로 나왔다. “국도 먹겠냐”는 민씨의 질문에 고개를 가로저은 최씨는 밥그릇에 밥을 절반 정도 담고는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민씨는 최씨에게 “반찬 좀 골고루 먹어라”고 잔소리를 했다.
밥그릇을 다 비운 최씨는 1교시 수업이 있다면서 서둘러 하숙집을 나섰다. 민씨는 “다들 아침잠이 많아도 너무 많다”며 “다섯 번 정도 일어나라고, 밥 먹으라고 외쳐야 그제야 방에서 나온다”고 했다.
1990년대 대학가 풍경으로 사라진 듯했던 하숙집이 대학생뿐 아니라 사회 초년생들의 숙식 공간으로 다시 떠오르고 있다. 고물가 시대 숙식비를 아끼려는 수요가 늘어난 영향으로 분석된다.
18일 부동산 정보 플랫폼 ‘다방’에 따르면 지난 8월 서울 주요 대학가 원룸의 평균 월세와 관리비를 합친 금액은 68만원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이 발표한 청년·사회 경제 실태조사를 보면 2021년 기준 18~34세 청년의 한 달 평균 생활비는 약 85만원이었다. 2017년 기준 약 75만원에서 4년 새 10만원 올랐다.
물가가 뛰고 집값을 감당하기 어려운 시대에 하숙집은 매력적인 선택지로 여겨진다. 1인실은 보통 매달 60만원을 내고 쓸 수 있으며 주 6일 밥도 제공된다. 식재료값 상승으로 한 끼 식사를 제대로 챙겨 먹기 힘든 이들에게 하숙집의 ‘집밥’은 값싸고 영양가 높은 식단이 될 수 있다.
서울 동대문구의 한 하숙집에 사는 A씨(21)는 “혼자 살다 보면 밥을 잘 챙겨 먹기 어려운데 하숙집에선 균형 잡힌 음식을 먹을 수 있다”며 “보증금도 필요 없고, 월세가 저렴한 것이 하숙집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말했다.
혼자 사는 것보다 안전하다는 장점도 있다. 한양대 주변에서 여성 전용 하숙집을 운영하는 70대 여모씨는 “현재 방 14개에 입주자가 모두 들어온 상태”라며 “혼자 사는 사람들을 노리는 강력 범죄가 끊이지 않는 만큼 여러 사람이 모여 있는 하숙집을 안전하다고 느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 동대문구 경희대 주변에서 하숙을 치는 김민정(64)씨도 “4층으로 된 하숙집이 모두 찼다”며 “요즘 전세사기도 기승이고 워낙 세상이 흉흉하다 보니 특히 여학생 부모들의 입주 문의가 많다”고 했다.
과거 하숙집은 대학생의 전유물이었지만 최근에는 중장년층뿐 아니라 노년층도 하숙집을 찾는다. 서울 광진구 건국대 근처에서 하숙집을 운영하는 60대 김모씨는 “방 15개가 다 찼다. 입주자 15명 모두 학생이 아닌 30~60대 사이 일반인들”이라며 “코로나 이후로 직장인 입주자가 늘면서 공실이 없다. 대학생들은 하고 싶어도 입주를 못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김씨 하숙집에는 직장인이 있고 연금 받아 월세 내는 이들도 산다. 정모(75)씨가 서울 용산구 숙명여대 주변에서 운영하는 하숙집도 입주자의 주 연령대가 60대다. 이곳에는 80대 노인도 입주해 있다.
외국인도 하숙집 문을 두드리고 있다. 민씨 하숙집에는 멕시코 출신 유학생이 산다. 민씨는 “멕시코 사람들이 음식을 맵게 먹어서 그런지 매운 김치도 곧잘 먹는다”며 “올여름에는 멕시코에 사는 부모님이 한국으로 여행 와서 하숙집도 구경하고 갔다”고 전했다.
물가 상승으로 하숙집 운영은 갈수록 어려워지지만 가족처럼 지내는 옛 풍경이 고스란히 유지되는 하숙집도 있다. 정씨는 “최근 고물가로 어려움이 있는 건 맞다. 우린 시골에서 농사짓기도 하는데 식재료를 직접 가져오는 방식으로 비용을 줄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래도 가족 같은 분위기가 좋아 하숙을 치는 것 아니겠느냐”며 웃었다.
정씨는 “입주자 중 한 명이라도 아프면 하숙생들이 서로 병원에 데려간다고 하거나 약을 사주면서 병간호도 해 준다”고 말했다. 지난달 추석 명절에도 정씨는 하숙생들과 전을 부치고 잡채와 송편 등 명절 음식을 나눠 먹었다.
한양대생 최씨도 하숙집 주인인 민씨를 할머니라고 부르며 친손자처럼 따른다. 최씨는 “할머니가 잔소리도 자주 하시곤 하는데 하숙집의 가장 큰 매력은 이렇게 함께 사는 것”이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외면받던 하숙집이 다시 주목받는 사회적 배경에 의미를 부여했다. 김윤태 고려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하숙집의 인기를 두고 “주거 비용이 치솟고 최근 여성 상대 강력 범죄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안전을 중시하는 분위기가 두드러졌다”며 “사생활을 중시하는 MZ세대도 이런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한 선택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각자도생 사회에서 중년층을 비롯해 나이를 불문하고 가족적인 분위기를 찾는 현대인들의 새로운 삶의 풍속”이라고 말했다.
최원준 윤예솔 기자 1ju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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