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상금 받고도 공장 나간다…'살인의 추억' 그의 인생

김선미 2024. 10. 1.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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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더중앙플러스-나는 무죄입니다

「 하루아침에 가족과 헤어지고 찬란한 시절을 잃어야 한다면 어떨까요. 누명을 쓰고 유죄를 선고받은 사람들을 아시나요. 간결한 판결 기사 뒤엔 깊은 사연이 숨어있습니다.

중앙일보 구독자 여러분을 위해 ‘나는 무죄입니다(https://www.joongang.co.kr/plus/series/198)’ - ‘살인의 추억’ 억울한 20년, 그 이야기를 전문 무료로 공개합니다. 어느날 삶에 스며든 고통과 무죄를 쟁취한 과정까지. 이들의 영화 같은 삶을 전달해드립니다.


“사상 최악” 꼽힌 장기 미제, 화성 연쇄살인

1980~90년대 전국을 공포로 몰아넣은 화성 연쇄살인 사건. 윤성여(56)씨는 8차 사건의 피의자로 몰렸다. 연합뉴스

1986년부터 1991년까지 경기도 화성시 일대에서 여성 10명이 강간·살해당했다. 수사에 투입된 경찰은 총 205만여 명. 수사 대상자는 약 2만1000명. 오랫동안 범인이 밝혀지지 않아 대한민국 강력범죄 사상 최악의 장기미제 사건 중 하나로 불렸다.

이 중 8차 사건은 유독 특이한 점이 많았다. 1988년 9월 16일 피해자 박모(14)양이 자신의 방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실내에서 벌어진 첫 사건이었다. 경찰은 범인이 박양을 살해·성폭행하고 옷을 입혀놓고 도망갔다고 했다. 용의자가 검거된 것도 8차 사건이 유일했다.

이듬해 7월 당시 스물두 살이었던 윤성여(56)씨가 검거됐다. 경찰은 윤씨가 앞서 7건의 사건을 보고 모방범죄를 저질렀다고 결론 내렸다. 89년 10월, 윤씨는 1심에서 강간치사·살인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2009년 모범수로 출소할 때까지 20년 동안 감옥에 있었다.

그가 죄의 굴레를 벗어난 건 그로부터 11년 뒤였다. 2019년 9월, 무기수로 복역 중이던 이춘재(61)가 용의자로 특정됐고, 이씨가 범행을 자백하면서 사건의 실마리가 풀렸다. 윤씨는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사건 발생 31년 만이었다. 이후 국가로부터 형사보상금과 손해배상금을 받았다.


29년 된 아파트와 안마의자


윤성여씨는 지난해 5월 충북 청주의 29년 된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 전까지는 다가구주택에 세 들어 살았다. 김종호 기자

지난해 겨울, 충북 청주시 한 아파트 앞에서 윤씨와 만났다. 혹한의 날씨였지만 그는 멀리서 봐도 이를 환하게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십여 분 전부터 기자를 기다리던 그는 “오느라 고생했다”며 다가와 악수를 건넸다. 왼쪽 다리가 불편해 걸을 때마다 몸이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인터뷰 일정을 잡는 건 쉽지 않았다. 그는 한 공장에서 한 주씩 번갈아가며 주간·야간 근무를 한다고 했다. 야간 근무를 하는 날 낮에 그의 집으로 가기로 했다. 약속을 조율하며 마음 한편으론 의아했다. ‘감옥에 20년 넘게 갇혔는데, 더구나 적지 않은 보상금과 배상금을 받았는데 왜 고된 일을 계속할까.’

■ 나는 무죄입니다


“무죄가 선고됐다.”

간결한 판결 기사 뒤에 가려진 이야기가 궁금했습니다.
오늘날 수사 단계에선 수많은 보도가 쏟아지지만,
재판 결과와 당사자의 이야기는 비교적 자세히 알려지지 않습니다.

누명을 썼다가 뒤늦게 무죄로 밝혀진 이들의 사연은 더 길고 씁니다.
주변 사람에게도 고통이 스몄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다시 희망을 찾고 삶을 살아내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기억에서 희미해지는 사건 속 사람을 만나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내막과 이들의 인생을 톺아봅니다.

📃 목록

EP1 멈춰버린 두 친구의 21년…영수증에 새긴 진실
EP2 작은 섬마을 노인의 눈물…50년 만에 꺼낸 이야기
EP3 잊을 수 없는 목소리…진범이 풀려났다
EP4 10년 동안 14번의 재판…귀농 부부에게 생긴 일
EP5 증거는 그를 가리켰다…조작된 현장의 비극
EP6 아버지 성폭행 누명 벗긴 딸의 고군분투
EP7 31년 만에 벗은 살인 꼬리표…그가 일하는 이유

지어진 지 29년 된 22평짜리 아파트로 그는 7개월 전쯤 이사했다고 했다. 그 전까진 다세대주택에 세 들어 살았다. 냉장고와 세탁기 같은 필수 가전과 책상, 소파 정도를 제외하곤 눈에 띄는 살림살이는 없었다. 그는 거실 한편에 놓은 안마의자를 보며 말했다. “이걸 사놓고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어요. 정말 큰마음 먹고 샀어요.”

그의 일터는 자동차 가죽 시트를 만드는 공장이다. 이곳에서 일한 지는 만 14년이 넘었다. 그의 업무는 가죽을 재단하는 것이다. 주간 근무를 하는 날은 오전 7시20분, 야간 당번인 날은 오후 6시30분에 집을 나선다. 왕복 두 시간씩, 주로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한다. “출소해서 처음엔 침대 매트리스 공장에 취직했어요. 그땐 전과자 신분을 숨기고 들어갔지. 교도소에서 봉제 기술을 배워서 취직했던 건데, 사회 나와서 보니까 실력이 모자라더라고. 얼마 못 있다가 나와서 아는 선배 통해서 지금 직장에 왔죠.”

“편하게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는 말에 그가 웃었다. “내 지난 인생을 보상받은 돈이지만, 잃어버린 인생을 돌릴 순 없잖아요. 허투루 쓰기 싫어요. 또 사람은 욕심 부리지 않고 자기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해요. 큰돈이 생겼다고 해도, 내가 자립할 수 있으면 그걸로 먹고사는 거죠. 당연한 얘기지, 제가 뭐 존경받을 깜이 아니에요.” 그는 다른 재심 사건 피해자들과 함께 형편이 어려운 학생을 돕는 등대장학회 이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22세 윤성여에겐 어른이 없었다


윤씨는 3세 때 고열을 앓은 뒤 소아마비 진단을 받았다. 10세 되던 해 겨울엔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채소를 팔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다. 대학생이 귀하던 70년대, 서울의 한 4년제 대학에 다녔던 아버지는 어느 날부터 도박에 빠졌다. 큰 빚을 진 뒤엔 자취를 감췄다.

윤씨를 포함해 사남매는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세 살 많은 큰누나는 두 살배기 막내 여동생과 함께 경기도 안성 친척집으로 갔다. 윤씨는 안성을 거쳐 화성으로 갔다. 어린 나이에도 신세 지는 게 싫었던 그는 중국집 등에서 일하며 숙식을 해결하다가 약 1년간 노숙 생활까지 했다.

우연히 동네에서 농기구 가게를 운영하는 사장을 알게 되면서 기술을 배웠다. 마땅한 처우도 없이, 밥 한 끼 먹으면 감사한 날이 이어졌다. “열다섯인가 여섯인가, 쇠파이프랑 호스로 맞아가면서 기술을 배웠어. 울기도 많이 울었지.”

그러던 어느 날, 화성시 전체가 연쇄살인 사건으로 술렁였다. 윤씨도 뉴스를 챙겨 봤지만 자기 일이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89년 7월 어느 날 퇴근 뒤 저녁을 한술 뜨려던 순간 경찰이 찾아와 수갑을 채웠다. “네가 8차 범인이지.”

윤성여씨의 구속 소식을 다룬 1989년 7월 29일자 신문 기사. 중앙DB


체포 얼마 뒤 그는 뉴스에 등장했다. 맨발에 낡은 고무 슬리퍼, 구겨진 티셔츠와 더러운 면바지 차림으로 경찰서에 앉아 있었다. 손톱과 손끝엔 흙먼지가 새까맣게 묻어 있었다. 그는 시선을 아래쪽에 고정한 채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친구들하고 일을 마쳤는데 친구들이 (장애를) 놀리는 바람에. 한참 돌아다니다 보니까 그 집이 딱 보이더라고요. 원래는 죽일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그 집의 담을 넘다 보니까 문고리가 하나 있더라고요. 그래서 보니까 여자가 있길래 나도 모르게. 낮에 일한 게 있고 욕먹은 게 있어서 그 기분에….”

경찰은 “장애라는 신체적 특성 때문에 (성폭행) 범행이 쉽게 발견될 것을 우려해 살해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윤씨의 설명은 달랐다.

“한 3~4일을 안 재웠어. 그러면 내가 뭘 말했는지 몰라. 그냥 쓰라고 하면 받아 쓰고, (지장) 찍으라고 하면 찍고. 그때 뉴스 인터뷰 영상 보면, 경찰이 뭐라고 써준 종이만 계속 보고 읽은 거야.”

일찍 엄마를 여읜 그에게 누나는 각별한 존재였다. 그가 감옥에 들어갈 때 누나는 20대 중반이었다. 그리고 약 10년 뒤 다시 만났을 때는, 두 아이의 엄마가 돼 있었다. “처음 10년간은 서로 소식을 못 챙겼지. 나도 교도소 안에서 내 밥그릇을 찾아야 했고, 누나도 먹고살기 힘들었으니까. 일하며 막냇동생까지 건사하며 고생하며 살았더라고. 친척집에서도 나 때문에 구박받고 욕도 먹었겠지.”

중학생이었던 막내 여동생은 어느새 성인이 돼 있었다. “누구냐고 물어보기까지 했어. 교도소에 오래 있으면 사진으로만 보니까 구분하기 힘들거든.”


장애로 힘든 수감 생활…별명은 ‘무죄’

윤성여씨는 세 살에 소아마비 진단을 받았다. 겨울이면 혈액순환이 잘 안되는 왼쪽 다리를 목도리 등으로 칭칭 감아둔다. 김종호 기자


한참 이야기를 하던 그가 왼쪽 바짓단을 들어 올렸다. 오른쪽보다 확연히 얇은 왼쪽 종아리에 천이 두툼하게 둘러져 있었다. 추운 겨울엔 마비된 다리에 혈액순환이 잘 안된다고 했다. 그래서 고안한 방법이, 목도리 같은 천을 두르고 그 위에 탄성 있는 줄로 고정하거나 양말을 신는 식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다리가 금방 퍼렇게 변했다.

몸이 불편한 그에게 교도소 생활은 특히 더 혹독했다. 특히 양변기가 아닌, 쭈그려 앉는 변기를 이용하는 게 곤욕이었다. “간식으로 나온 빵 봉지 있죠. 그걸 엮고 묶어서 경첩에 묶어놨어요. 그러면 그 줄을 잡고 용변을 보는 거지.”

시비가 붙어 싸우는 일도 잦았다. 그의 장애를 조롱하는 이들 때문이다. 그는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오늘도 아무 일 없이 그냥 지나가자, 제발”하고 생각했다. 누구와도 싸우지 않는 게 매일의 목표였다. 모범수로 석방되려면 사고를 쳐선 안 되기 때문이다.

그는 교도소도 작은 사회라고 했다. 부유한 사람은 영치금으로 생활 물품을 충분히 사서 쓰지만, 가난한 이는 그들의 허드렛일을 하고 물품을 나눠 받는다. “두루마리 화장지 한 개를 주고 한 달을 쓰라고 하데. 비누, 화장지를 더 사서 써야 하니까, 다른 수용자 빨래랑 설거지도 해주면서 살았지.”

그의 별명은 ‘무죄’였다.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하도 이야기하니 사람들이 붙여줬다. 그는 가수 하춘화의 노래 ‘무죄’를 달고 살았다고 했다.


그가 범인일 수 없는 이유…슬리퍼와 담, 책상

화성 연쇄살인 사건 수사엔 날고 긴다는 경찰이 대거 투입됐지만, 아무도 윤씨의 결백을 밝히지 못했다. 그는 검찰 지휘를 받아 경찰이 현장검증한 날을 회상했다. 피해자 집 담 앞에 슬리퍼 자국이 있었는데, 경찰은 슬리퍼를 자주 신는 윤씨가 담을 넘어 집에 들어갔다고 결론 내렸다.

“담이 벽돌 같은 걸 조립식으로 딱딱 올려놓은 거였어요. 콘크리트가 아니어서, 흔들면 흔들려요. 비가 오면 더 그렇지. 그걸 내가 이 다리로, 그것도 슬리퍼를 신고 넘었다는 거야. 현장검증한 날 경찰이 양쪽에서 잡아줘서 얹혀 있는 채로 사진을 찍었어요. 그만큼만 올라가도 담이 넘어갈 것 같더라고.”

피해자의 방은 문턱이 높았다. 문 바로 앞엔 좌식 책상과 책꽂이가 있었다. 당시 윤씨가 쓴 자필서에는 “맨발로 책상을 넘고 들어가 자는 아이를 오른손으로 목을 누르고”란 표현이 있었다. 다리가 불편한 그가 소리 없이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수사는 허술하게 짜인 채로 흘러갔다.


잃어버린 20년 세상 물정…외면하는 친척


윤성여씨는 "수감됐던 20년 공백을 메우는 데 7년 정도 걸렸던 거 같다"고 말했다. 김종호 기자

2009년 윤씨는 모범수로 가석방됐다. 수감 20년 만이었다. 하지만 윤씨의 인생 시계는 22세에 멈춰 있었다. 바뀐 세상의 물정을 알 수가 없었다. “처음 버스 탈 때 카드를 찍으라는데 그게 뭔지 알아야지. 누가 충전해서 쓰는 법을 알려줬는데, 하루는 그걸 몇 시간씩 돌아다니면서 반복했어. 익히려고. 20년 공백을 메우는 데 한 7년은 걸렸던 거 같아.”

그는 종종 사기꾼의 타깃이 됐다. “어느 날은 후배가 휴대전화 좀 잠깐 빌려 달래. 뭔 인증을 따야 된다는데 인증을 따니까 2000만원이 날아갔어. 신용카드에서 뭘 어떻게 빼냈더라고. 그거 갚느라고 몇 개월 동안 고생했지. 핸드폰으로 돈을 뺄 수 있다는 거를 상상이나 했겠나.”

하지만 그가 제일 적응하기 힘들었던 건, 가족의 차가운 외면이었다. 명절에 친척집에 찾아갔지만, 누구도 그를 반기지 않았다. “여길 왜 왔냐는 식이지. 뭐 범죄자니까 그랬겠죠. 보통 가벼운 죄도 아니고. 이후론 왕래를 잘 안 했어요.”


2019재고합17 윤성여, 무죄

2019년 9월 18일, 윤씨는 진범 관련 보도가 나왔던 날을 떠올렸다. 이춘재는 94년 처제를 강간·살인하고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었다. DNA 검사로 그가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났고, 8차 범행까지 시인했다. 윤씨는 그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는 기쁨보다 두려움을 먼저 느꼈다. “제발 사건 더 커지지 말라고 했어. 어렵게 들어간 직장인데 사건 터지면 바로 잘릴 거 아니야. 그 사건을 다시 떠올리는 것 자체가 악몽이었지. 야근하고 집에 왔는데 기자들이 와 있는 거야. 경찰을 불러서 도망갔어요.”

윤씨는 누나와 지인의 도움을 받아 일주일간 숨어 있었다. 재심을 결심하기까지도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사건을 되짚는 것만으로도 악몽을 꿨기 때문이다. “결국 엄마 때문이었지. 내가 죽어서 엄마를 볼 때 떳떳해지고 싶었으니까.”

우리나라 최악의 미제사건으로 남았던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현장도.연합뉴스.


“현장 검증 과정에 담 넘었어요, 피고인이?”(윤씨 변호인)

“넘지는 않고 이렇게 매달려 있었어요.”(화성 8차 사건 수사 경찰)
“왜냐하면 당시 현장검증 사진 보면 피고인이 담을 넘는 담 윗단에 다리를 올리는 사진이 전혀 없어요. 안 넘었죠?”
“네 시늉만 했습니다.”

재심 재판에서 숨겨졌던 많은 진실이 드러났다. 2020년 11월 윤씨의 재심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이춘재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아직도 (용의 선상에 오르지 않은 이유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재판부는 “법원이 인권의 마지막 보루로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점에 대해 사법부 구성원의 일원으로 사과한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나중에 후배들한테 이야기를 듣고 벙찐 게 ‘우리 선배인데요’ 그러더라고. 내가 화성에 와서 초등학교 때부터 친했던 친구 형이라고 하더라고. 참 기구한 운명이지. 그래도 내 사건 빼고 자백했으면 나는 이 죄를 평생 갖고 가는 거 아니야. 그래서 그게 고맙기도 했지.”

윤성여씨는 사건 발생 31년 만에 죄를 벗었다. 그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만났을 때 떳떳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뉴스1


사건에 휘말리지 않았다면 그의 삶은 어떻게 흘렀을까. 윤씨는 그저 평범하게 사는 것만으로 감사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농기구 기술 잘 배워서 주어진 일 하면서 성실하게 살았으면 어땠을까 생각해요. 이런 평범한 삶을 지키기 위해서, 억울한 일이 더 일어나지 않도록 경찰도, 검찰도, 법원도 힘써줬으면 좋겠어요.”


사람 윤성여를 믿어준 한 사람

윤성여씨는 자신을 믿어준 거의 유일한 사람으로 박종덕(오른쪽) 청주교도소 계장을 꼽았다. 연합뉴스

윤씨는 인터뷰 말미에 교도소에서 자신을 살려준 은인을 꼭 소개하고 싶다고 했다. 그가 건네준 번호로 전화했다. 박종덕(58) 청주교도소 사회복지과 계장이었다. 그는 무죄를 주장하는 윤씨의 말을 믿어준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선배 교도관들이 화성 살인 사건으로 들어온 애라고 알려주는데, 그렇게 보이지 않더라고요. 인사성도 밝고 순박하고, 20년 동안 사고 치지 않고 산다는 게 정말 쉽지 않거든요.”

억울함에 죽음을 이야기하는 윤씨에게, 박씨는 “죽을 용기로 살라”며 용기를 북돋았다. 윤씨가 가석방 심사 대상자에 올랐을 땐, 취업할 만한 곳을 알아봐 주기도 했다. 출소 뒤 윤씨는 박씨를 ‘형’이라고 불렀다. 박씨가 윤씨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궁금했다. “평생 고생만 했으니까, 이제 자신을 위해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여행도 가고, 건강도 챙기고. 그런데 지금 삶이 성여를 행복하게 한다면, 저도 그걸로 족해요.”

■ "나는 무죄입니다" - 그들의 이야기가 더 알고 싶다면?

① 경찰 할리우드 액션에 당했다, 귀농 부부 덮친 지옥의 10년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15926

② 北 탈출 후 50년 지옥 갇혔다…‘섬마을 빨갱이’ 노인의 사연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12490

③ “1명은 호리호리, 1명은 넓적” 이 한마디에 난 21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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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아버지 누명 밝힌 딸은 유산했다…곡성 성폭행 사건의 진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19166

⑤ 아버지 강간 살인범 만들다…10살 아들 속인 조작된 연필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17564

⑥ 잊을 수 없는 그 목소리…그런데 진범이 풀려났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14170

김선미 기자 call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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