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스커트' 그녀 보다가, 남자는 맨홀에 빠졌다…첫 한류 아이돌
데뷔 72년차 ‘영원한 현역’ 윤복희
이유가 있다. 그의 정체성은 뮤지컬에 있다. 부친 윤부길이 만든 극단에서 5살 때부터 가무극을 하고 70년대 최초의 상업 뮤지컬 ‘빠담빠담빠담’을 시작으로 불모지를 개척한 ‘뮤지컬 대모’가 그다. 지난해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공로상을 받은 ‘레전드’지만 여전한 현역 배우다. 7년째 출연 중인 뮤지컬 ‘하모니’를 연습 중이고, 100번째 뮤지컬 ‘바울과 나’도 제작 중이다. “콘서트는 마지막일지 몰라도 뮤지컬은 죽을 때까지 할 것”이라는 게 그의 말이다.
Q : ‘첫 서울 단독 콘서트’라니 믿기 힘들었어요.
A : “매니저나 기획사가 없으니까요. 칠순 때 후배 허준호가 선물로 LA에서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리는 극장을 빌려서 콘서트를 제작해 줬어요. 뮤지컬 스태프들과 같이 하니까 편하고 재밌어서 국내서도 지방부터 가끔씩 하고 있어요. 많은 분들이 아껴주셔서 70여년 활동을 하고 있으니, 감사카드 보내는 마음인 거죠. 5살 때부터 다른 사람을 연기하는 게 익숙하지, 가수 윤복희로선 별 내세울 게 없으니 쑥스러운 거예요. 지금은 ‘하모니’만 신경 쓰고 있어요. 7년째 하고 있는데, 이번에 규모가 커지고 업그레이드 되거든요.”
박칼린, 내 인생 다룬 뮤지컬 제작 추진
5살에 데뷔해 9살 때부터 미 8군 무대에 서다 루이 암스트롱에게 발탁되어 라스베이거스에 입성, 귀국 후엔 ‘원조 뮤지컬 디바’로 등극한 그의 삶이 한 편의 뮤지컬이다 싶은데, 아니나 다를까. 그의 삶을 다룬 뮤지컬도 추진 중이라고 한다. “작년에 걸그룹 이야기인 ‘시스터즈’를 만든 박칼린씨와 몇 달간 이야기를 나눴는데, 제 이야기만 따로 만들고 싶다더군요. 전에 후배들이 하자고 했을 때는 나 죽은 다음에 하라고 했는데, 낼모레 80이 되고 보니 살아있을 때 만드는 게 제작에 도움 되겠다 싶어요. 제가 부른 곡들이 다 뮤지컬에 이용될 테고, 제 삶에 스토리가 많으니까요.”
Q : 첫 데뷔 무대도 기억나세요.
A : “어른들 공연하는 게 재밌어 보여서 아버지를 졸라 딱 한번 허락을 받은 거예요. 전쟁이 한창일 때라 국민들 위로하기 위해서 만든 ‘크리스마스 선물’이란 공연에 내가 선물 역할로 나간 건데, 그게 너무나 히트하는 바람에 계속 하게 됐죠. 그 후로도 노래나 춤을 배운 적은 없어요. 그저 좋아서 놀이처럼 한 거죠.”
Q : 아홉 살부터 미 8군 무대에 섰다는 게 상상이 잘 안 갑니다.
A : “데뷔 5년째였고 어릴 때 더 유명했어요. 어린데 무대 서는 사람이 나밖에 없었으니까. 부모님 계실 때부터 영화도 했고, 어려움은 없었어요. 남들은 소녀가장이 오빠 학비 대느라 고생한 줄 알지만, 전부터 경제활동을 했으니 그저 당연한 일이었어요. 돕는다는 생각도 없었죠.”
7살에 모친을, 9살에 부친을 잃었지만 ‘수양아버지’는 지금도 살아 있다. 60년대 그를 싱가포르에서 발탁해 영국을 거쳐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정착하기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영국인 매니저 얘기다. 걸그룹 ‘코리아 키튼즈’를 결성한 것도 그의 영향이다. “우연히 제 공연을 보시고 영국 갈 의향이 없냐, 생각 있으면 이 춤추는 여자들에게 노래를 가르쳐서 40분 짜리 프로그램을 만들라더군요. 그게 ‘코리아 키튼즈’가 됐어요. 16살 때부터 저를 돌봐준 처음이자 마지막 매니저인데, 부부가 저를 정말 딸처럼 아끼면서 제가 원하는 건 다 하게 해줬어요. 뮤지컬 하느라 한국에 정착할 때도 기뻐해 주시고, 보러 오기도 하셨죠. 지금도 라스베이거스에 살고 계세요.”
Q : BBC에서 비틀즈 노래 부르는 영상을 보니 한국어가 들리던데요.
A : “‘Can’t Buy Me Love’라는 곡의 첫 부분을 ‘어디에 사랑~’이라고 개사를 해서 불렀죠. 지금 보니까 우습던데, 그땐 한국이란 나라를 아무도 모르니 한국인이란 걸 티 내고 싶었어요. 아무도 막지 않았어요. 동양 여자들이 그런 무대를 하는 게 처음이었으니 뭐든 맘대로 할 수 있었죠. 거기선 실력이 문제지, 한국인이라서 힘든 적은 없었어요. 오히려 여기서 부모도 없이 외로웠다면 외국에선 걸그룹 언니들과 함께 다니니 더 좋았죠.”
Q : 불후의 명곡이 된 ‘여러분’(1979)은 직접 만드셨다고요.
A : “당시 오빠를 도와주려고 ‘윤항기 작사·곡’으로 발표했지만, 내가 만든 가스펠 중 하나예요. 76년 2월 27일 교통사고가 났을 때 성령을 만난 뒤 제가 만든 곡은 다 가스펠이고 유행가는 ‘왜 돌아보오’ 딱 한 곡밖에 없어요. 뮤지컬 동료들이 내가 뽕짝 하는 걸 들어보고 싶다고 해서 한번 만들어 봤을 뿐, 가요는 관심이 없거든요. 어려서부터 팝송과 뮤지컬만 해서 그런지 가요는 잘 모르겠어요. 사랑하고 헤어지고 뭐 이런 가요들이 많은데 이해를 잘 못하겠어요. 음악은 취미일 뿐, 내 몫은 뮤지컬이죠.”
Q : 한국 뮤지컬 시장을 개척한 셈인데요.
A : “‘빠담빠담빠담’ 제안이 왔을 때 처음엔 안 한다고 했어요. 미국 활동을 해야 하니까요. 그런데 극단에서 제게 성경을 가르치던 하용조 목사님께 연락을 했어요. 한국에선 목사님이 내 친구이자 선생님이자 매니저 같은 분이었는데, 그분이 공부 삼아 하라고 해서 무조건 따랐죠. 결국 그 작품을 77년부터 97년까지 했고, ‘피터 팬’은 79년부터 97년까지,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는 80년부터 2006년까지 다 원 캐스트로 했어요. 그렇게 십여 년 하다 보니 다른 뮤지컬 배우들이 나오더군요.”
Q : 26년 동안 연기한 막달라 마리아에 애착이 크시겠어요.
A : “웬만하면 다 20년씩 최선을 다해서 했으니 모든 역할이 소중해요. 마리아는 환갑이 넘으니 도저히 못하겠더군요. 성경에 나이가 나와 있는 건 아니지만 왠지 쑥스러워서요. 지금 나에겐 ‘하모니’ 밖에 없어요. 지금이 제일 좋고 지나간 건 잊어버리죠.”
‘여러분’은 작곡 후 오빠 도우려 이름 내줘
그는 편안한 티셔츠와 레깅스 차림에 허리 색을 차고 나왔다. 미용실도 다니지 않고 의상도 직접 만들어 입는다는데, 남의 시선은 개의치 않는 눈치다. 대중을 상대로 하는 공연을 평생 하면서도 “관객 반응은 신경 써본 적 없다”고 말하는, ‘마이웨이’ 그 자체다.
Q : 60년대에 미니스커트를 입고 명동을 걸을 때 마주 오던 남자가 맨홀에 빠졌다고요.
A : “디자이너 노라노 선생을 만나러 가는데 명동에 차가 못 들어가서 걸어갔죠. 앞에 오는 사람이 맨홀에 빠지는데, 내가 꺼낼 수도 없어서 그냥 지나갔어요. 미니스커트에 놀란 게 아니라 나를 실물로 보니까 놀랐던 것 같아요.”
Q : 뮤지컬 초창기엔 배우가 부상을 당해도 쉬지 못했다고요.
A : “낮 공연 때 다치면 병원에 갔다가 밤 공연을 한 시간쯤 늦게 시작하기도 했어요. 그래도 관객은 다들 기다려 주셨죠. 그런 게 힘들다고 생각한 적도 없어요. 일이라 생각하면 힘들었겠지만, 엔터테이너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못해요. 이건 일이 아니라 삶이죠. 난 5살 때부터 이것밖에 몰랐고, 좋아서 하는 일을 지금까지 하고 있으니 얼마나 복 받은 삶인가요.”
그는 평생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어려움이라곤 모르고 살았다면서 “축복 받은 삶”이라고 했다. 두 번의 결혼과 이혼 이후 자녀도 없이 혼자 살아온 45년이 외롭지는 않았을까. 그는 “외로울 시간이 있으면 잔다”면서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결혼과 이혼에 실수는 있었죠. 어려서부터 부모 없이 자랐으니 내가 자존심이 셌어요. 두 번째 남편인 남진씨와는 불과 몇 개월밖에 안 살아서 잘 모르고, 첫 번째 결혼을 유지 못한 게 그분과 팬들에게 죄송할 뿐이죠.”
그는 지금도 첫 남편(가수 유주용)과 좋은 친구로 지낸다고 했다. 의논할 일이 생기면 친오빠가 아니라 첫 남편에게 연락을 한다는 것이다. “13살 때부터 연애를 했고, 줄곧 나를 보호자처럼 챙겨준 사람이거든요. 무슨 일이 생기면 습관적으로 그분께 도움을 청하죠. 헤어질 때도 감정이 상했던 건 아니에요. 그저 그런 일이 있어서 헤어질 수 밖에 없었죠. 하지만 내게 이성적인 만남이라면 그분이 시작이고 끝이에요.”
Q : 100번째 뮤지컬 이후도 궁금한데요. 못 다한 꿈이 있을까요.
A : “여한 없이 살았어요. 두 번 살라고 하면 못살 것 같네요. 너무 스케일이 큰 삶이고, 하고 싶은 일만 계속 하며 살았다는 건 객관적으로 봐도 쉬운 일이 아니죠. 그저 죽을 때까지 뮤지컬을 할 겁니다.”
일이 아니라 삶이라니, 그럴 수 밖에 없겠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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