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관계를 부수고 팔아버리면 서울에는 뭐가 남을까
[김은평]
"서울혁신파크로 은평구를 처음 알게 됐어요. 서울로 이사를 결정했을 때 서울혁신파크와 은평시스터즈 때문에 은평구를 선택하게 됐어요."
A(김씨, 27)는 지방에 살다가 서울, 그중에서도 은평구에 정착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지방에 산다는 것은 기회가 차단된다는 불안과 외로움을 버티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다 그는 일 때문에 서울혁신파크(이후 혁신파크)에 방문하고 깜짝 놀랐다. 홍콩 프리, 퀴어 이슈, 비건 등 다양한 의제 관련 포스터나 모집글이 많았다. 혁신파크는 '공공기관'인데도 다양한 의제가 가시화되는 공간처럼 보였다.
"마치 퀴어 퍼레이드 기간의 러쉬(글로벌 화장품 브랜드)에서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A에게 혁신파크는 단순히 일자리뿐만 아니라 외롭지 않을 수 있는 곳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를 하게 만드는 공간이었다. 그래서 서울로 이주하기로 했을 때 고민 없이 은평구를 택했다.
따듯한 가족 같은 기분을 나눌 수 있던 공간
A의 기대감과 현실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혁신파크는 2015년 질병관리청의 전신인 국립보건원이 있던 자리를 서울시가 매입해 약 600여 개의 마을공동체, 시민단체, 청년·예술단체 등의 활동 공간이 됐다. 혁신파크에는 사회 문제를 각자의 방식으로 해결하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노동, 페미니즘, 환경, 공동체, 도시농업, 비건, 예술... 언제나 뒷전으로 밀렸던 가치들이 혁신파크에서는 사회 문제를 풀 열쇠로 등장했다. 혁신파크의 '혁신'의 주인공들은 기술, 개발, 자본이 아니라 바로 사람들과 그들이 마음속에 품은 가치였다.
혁신파크의 공간도 이런 분위기에 맞게 지어졌다. 한가운데 잔디밭과 공원이 있어 시민 누구나를 환대했고, 건물 사이사이 국립보건원 때부터 자리 잡은 나무들이 자연스러운 숲의 기능을 해주었다. 3개의 '청'건물과 10개의 '동'건물로 이뤄져 있었는데, 대부분 1층에는 라운지, 공용주방, 네트워킹 공간이 있었다. 돈을 들이지 않아도 머물고, 쉬고, 빌릴 수 있는 공간들은 시민들이 자유롭게 모이고 작당할 여지를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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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성1인가구 공론장 <점, 선, 면 여성 1인 가구 혼자 있지만 연결 되어 잇는> 서울혁신파크에서 열린 공론장을 통해 은평시스터즈가 탄생할 수 있었다. |
| ⓒ 은평시스터즈 |
혁신파크는 단순한 물리적 공간을 넘어 더 깊은 의미가 있었다. 공동체를 형성하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피어나는 인큐베이터 역할을 했다. 특히 도시의 익명성과 단절 속에서 1인 가구 여성들이 서로를 발견하고 연결하는 장소로 중요한 기능을 했다. 그러나 혁신파크가 사라진 지금, 이런 만남과 기획을 어디서 실행할 수 있을지 대안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상품화 된 공동체는 껍데기일 뿐
은평구 밖에는 탈잉, 프립, 문토, 트레바리, 넷플연가 등 돈을 내고 참가하는 콘텐츠와 커뮤니티를 결합한 플랫폼 기업들이 있다. 또 중고거래 플랫폼 당근에서도 지역 커뮤니티 서비스를 제공한다. 은평시스터즈도 이런 기업들처럼 매월 혹은 분기별로 수십만 원의 회비를 받고 기업식으로 운영한다면 재정 문제는 해결될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의 만남은 하나의 '이벤트'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이런 '상품화된 공동체'는 대부분 가입비나 참가비라는 문턱을 세운다. 지불할 능력이 없다면 그 공간에 발을 들일 수조차 없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돈으로 구매한 소속감의 피상성이다. 같은 공간에 모여 있어도 진정한 인간적 교류가 없다면 그것은 껍데기뿐인 공동체일 뿐이다. 결국 상품화된 커뮤니티 속에서 사람들은 연결된 구성원이 아닌, 서비스를 구매한 고객에 불과하다.
"제가 갑자기 여행을 가게 됐는데 고양이를 맡아 주실 분 계실까요?" "벌레 잡아 주실 분 구합니다. 살려주세요." "안전캡을 못 열겠어요. 안전캡 좀 열어주세요." "장마가 시작됐는데 깜빡하고 집 창문 활짝 열어놓고 왔어요. 엉엉. 혹시 창문 닫아주실 분 계실까요?"
중고거래 플랫폼 당근에서는 이런 도움 요청이 건당 만 원 정도로 가격이 매겨져 올라오지만, 은평시스터즈 안에서는 같은 요청이 이웃의 호의로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진정한 공동체는 이렇듯 일회성 거래가 아닌 지속적인 교류에서 싹튼다. 공통의 관심사나 이념이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계기가 되지만, 소속감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함께 고민하고, 때로는 갈등하며, 서로를 지지하는 경험들이 쌓여야 비로소 의미 있는 관계가 형성된다. 그저 돈을 내고 참여하는 일시적 이벤트로는 이런 깊이 있는 연결을 형성할 수 없다. 시장 논리를 넘어서는 진정한 커뮤니티를 위해서는 그에 적합한 물리적 토대가 필요하며, 혁신파크는 바로 그런 역할을 해왔다. 공공장소이면서도 사람들의 삶 속에 깊이 스며드는 특별한 장소였다.
마포와 은평이 여성 1~2명이 살기 좋은 곳인 이유
최근 한 인스타툰 작가가 올린 "여자 1~2명이 살기 좋은 지역 서울 Top3(https://www.instagram.com/p/DG-NWhcxV9C/?igsh=MTkwN2M2aWpmejUxMQ%3D%3D )"라는 제목의 콘텐츠에 따르면, 독자 612명이 직접 보낸 응답 결과 1위는 마포구였다. 그리고 2위는 의외로 은평구였다. 비건 친화적이고 강아지를 키우기 좋으며 여성 커뮤니티가 잘 되어 있는 것이 이유였다. 한국리서치의 조사에 따르면 2030세대, 1인 가구, 저소득일수록 외로움을 더 많이 느낀다고 한다(정한울, 사회적 고립과 외로움 인식보고서, 2018). 그렇기에 누군가에게는 지역사회에서 활발한 연결이 이루어지는 것이 그 도시의 매력으로 다가올 수 있다. 은평구의 장점으로 "여성 커뮤니티"가 언급된 이유도, A가 서울의 수많은 구 중에 은평구를 택한 이유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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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평시스터즈 북토크 <다시만난 시스터즈> 나무, 흙, 볏짚 으로 지은 비전화공방에서 은평시스터즈 주최로 북토크를 진행하고 있다. |
| ⓒ 은평시스터즈 |
지난 2월 서울시가 혁신파크 부지를 민간에 판다는 공고와 보도자료에는 혁신파크라는 이름이 쏙 빠져있다. "옛 국립보건원"이라 칭하며 혁신파크의 가치를 지우려 한다. 마치 혁신파크가 유휴지였던 것처럼. 처음에는 혁신파크에 초고층 쇼핑센터를 지어 랜드마크를 만들겠다고 했다가, 이제는 공유지를 기업에 팔아넘겨 미디어 특화 산업단지와 주거공간을 짓겠다고 방향을 바꾸었다. 거기에 숙박시설, 판매시설까지 허용하면서, 기업이 원하는 건 뭐든지 할 수 있게끔 용도지역 상향을 가능하도록 했다.
서울시가 그려놓은 혁신파크부지 창조타운 조성 조감도 속 건물처럼 겉보기엔 그럴싸하고 번쩍이는 고층빌딩은 서울에 지겹도록 많다. 그리고 서울 곳곳에는 비어있는 채로 흉물이 되어가는 속빈 강정과 같은 공실 건물역시 허다하다. 서울시에 필요한 공간은 시민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고, 시민들의 상상을 실험해볼 열린 공간이다. 북한산이 시원하게 보이는 탁 트인 공유지다. 공공의 공간, 경험과 기억, 관계를 다 부수고 다 팔아버리고 나면 서울에는 뭐가 남을까. 서울시가 바라는 것은 파괴와 개발 그 자체인지 묻고 싶다.
1. 김은평님은 은평시스터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2. 은평시스터즈는?
왜 우리는 우리만의 커뮤니티가 없고, 우리의 목소리를 내기 어려우며, 우리는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 이러한 욕구가 모여 잘 알지 못하는 서로가 '여성 1인 가구'라는 공통점으로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현재는 여성 모임으로 확장해서 커뮤니티를 꾸려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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