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라마 <한지붕 세가족> '순돌이'로 사랑받은 국민 아역스타 이건주 근황이 화제다. 오는 6월 10일 방송 예정인 TV조선 <아빠하고 나하고>에 출연한 이건주는 태어나자마자 복지기관을 통해 프랑스로 입양 간 친동생과 40여 년 만에 재회 장면이 담겨 시청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건주는 성인 연기자로 변신하며 각종 드라마와 예능에 간간이 출연했으나 아역 시절만큼의 사랑은 받지 못했다.'순돌이' 이건주를 비롯해 '미달이' 김성은, ‘꼬마신랑’ 김정훈, '고교얄개' 이승현, ‘똑순이’ 김민희처럼 특정 배역의 이름이 곧 배우 이름처럼 불릴 정도로 강한 인상을 남긴 아역배우들은 대중의 뇌리에 깊이 각인된 그 이미지 탓에 성인 연기자로 안착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연기력은 거듭 성숙해졌지만 아역 시절의 캐릭터가 그림자처럼 따라붙으며 다른 역할로 확장되지 못했던 것이다. 같은 아역 출신이지만 특별한 캐릭터가 남아있지 않은 강수연, 손창민, 장서희 등은 성인 배우로도 자연스럽게 커리어를 이어간 것과는 대조적인 결과였다. 어릴적 강렬한 캐릭터 때문에 성인 역할 정착에 어려움을 겪었던 배우들을 소개한다.
이건주
'순돌이'로 각인된 이미지


<한지붕 세가족>의 ‘순돌이’로 국민 아역이 된 이건주는 이름보다 ‘순돌이’로 더 잘 알려졌다. 그 인기는 어지간한 스타 못지않았고, 어린이 영화 <은하에서 온 별똥왕자>의 주인공까지 맡으며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성장과 함께 통통하고 귀여운 이미지가 사라지자 ‘순돌이’로 각인된 이미지가 오히려 독이 됐다. 이후 단역과 조연을 전전하다 점차 대중의 기억에서 잊혔고, 2020년대 들어 예능 프로그램 <보이스 트롯>, <TV쇼 진품명품> 등에 출연하며 근황을 전했지만 연기자로서의 제2막은 열지 못했다.
김성은
'미달이'로 울고 웃은 아역의 상징


<순풍산부인과>의 ‘미달이’로 전국민적 사랑을 받았던 김성은은 90년대 후반을 대표하는 아역 스타였다. ‘미달이’라는 이름은 여전히 친숙하지만, 김성은은 성인 연기자로는 뚜렷한 필모그래피를 쌓지 못했다. 2010년대 이후 간간이 활동하며 2015년 성인 영화 <꽃보다 처녀귀신>에서 파격적인 변신을 시도했으나 아역 이미지와의 간극은 오히려 논란이 됐다. 2019년 <해피투게더>에 출연한 김성은은 "나는 오랫동안 연기를 했지만 아직도 내 이름을 대중에게 알리는 것조차 못하고 있는데, 너는 그걸 이루지 않았냐"는 한 무명 배우와의 대화를 소개하며 현재는 자신을 ‘미달이’로 기억해 주는 것에 감사하고 있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김민희
'똑순이'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름


1978년부터 아역으로 활약한 김민희는 드라마 <달동네>의 ‘똑순이’로 전국적인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이 ‘똑순이’라는 캐릭터는 오히려 그의 연기 인생에 발목을 잡았다. 청소년 역할까지는 무리 없이 이어졌지만 성인 역할로의 도약은 어려웠다. 동국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하여 정식으로 연기 내공을 쌓았지만 성인 연기자로는 주연보다는 조연, 혹은 예능에서 주부 캐릭터로 소비됐다. 90년대 SBS 시트콤 <아빠는 시장님> 등에서 보여준 코믹하고 푼수 같은 이미지가 오히려 ‘똑순이’의 그림자를 더욱 짙게 만든 셈이다.
김정훈
'꼬마신랑'이라는 그늘



1960~70년대 아역계를 주름잡던 김정훈은 단연 독보적인 존재였다. 영화 <꼬마신랑> 시리즈를 필두로 <미워도 다시 한번>,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까지, 귀공자 같은 외모와 안정된 연기로 스타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이 ‘너무 어린 얼굴’이 오히려 족쇄가 됐다. 아역의 이미지를 지운 성인 역할이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고, 1990년대 초 드라마 <3일의 약속> 이후 주연으로 나선 적도 있지만 그 흐름을 이어가지는 못했다. ‘귀엽다’는 말이 칭찬이 아닌 한계가 된 채 김정훈은 대중의 기억 속에 멈춰 섰다.
이승현
성장하지 못한 '얄개'


이승현은 김정훈과 함께 19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를 이끈 또 다른 아역 배우계의 강자다. 이승현은 6살에 데뷔해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를 섭렵했다. 특히 <고교얄개> 시리즈로 청소년 스타로 자리매김했지만, 1980년대 성인물 중심의 영화 트렌드에 적응하지 못하고 캐나다로 유학을 떠났다. 이후 부모님의 사업이 실패하며 생계형 노동자로 살다가 필리핀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결혼도 했다. 1997년 장영일 감독의 영화 <스커트 속의 드라마>로 복귀했으나 주목받지는 못했다. 한때 ‘얄개’란 별명이 대명사처럼 통했던 그는 2002년 KBS2 <인간극장>에서 힘겹게 재기를 시도하는 모습으로 회자되며 대중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나우무비 에디터 김무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