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랩소디]② 성수동이 왜 ‘한국의 브루클린’일까…‘핫플’의 과거와 현재
“아주 옛날엔 신발이 닳으면 염천교에 가라 했는데 우리 때는 성수동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요즘 성수역~뚝섬역 바로 앞보단 성수지구대 쪽으로 공방들이 많이 옮겨 가고 있습니다.” (60대 이정환씨)
“성수동이 수제화거리였다는데 잘 몰랐어요. 저는 카페에서 찍은 사진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리러 왔어요.” (20대 김서연씨)
서울 성동구 ‘성수동(聖水洞)’. 현재 대한민국 최고의 핫플레이스(핫플)다. 뚝섬(뚝도)으로 불리던 이곳, 초고층 마천루와 최고급 주거공간이 속속 들어섰다. 기존 낙후한 공업 지대 사이사이도 변했다. 젊은 세대들이 찾는 힙(hip)한 문화 공간으로 바뀐 것. 이를 노리고 임시 오프라인 매장인 ‘팝업 스토어’도 여럿 성업 중이다. 서울의 대표적인 ‘팝업 성지(聖地)’로 떠올랐다.
마치 공장 지대에서 환골탈태한 미국 뉴욕의 ‘브루클린’과 비슷하다. 그래서 ‘한국의 브루클린’이란 별명도 얻은 상황. 대세가 된 성수동의 알쏭달쏭한 과거와 현재를 ‘맨땅에 헤딩하기’ 방식으로 찾아 나섰다.
역사책에도 안 나왔는데…
성수동과 뚝섬은 한강과 중랑천이 만나는 곳에 있다. 퇴적으로 자연 제방이 생겨났다. 덕에 사람들이 살 수 있었다. 허나 한양이 도읍지인 조선의 역사책에도 잘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성수동 북쪽 중랑천과 청계천이 합류하는 인근 ‘살곶이다리’(보물 제1738호)만이 전설을 품고 있다.
‘함흥차사(咸興差使)’ 때 얘기다. 화난 태조(이성계)가 여기서 태종(이방원)에게 화살을 쏘았다는 풍문이다. 태종이 인근 응봉에서 매사냥하다 쏜 화살이 다리 쪽 나무에 맞았다는 전설도 있다.
이 지역이 떠오른 계기는 일제 강점기던 1930년대다. 주체는 철도회사인 경성궤도주식회사(당시 시내 전차를 운영하던 경성전기주식회사와 별개). 왕십리에서 이곳까지 4.3㎞ 구간에 철도를 부설하면서다. 이 철도는 ‘기동차길’이란 별칭을 얻었다.
이후 경성궤도㈜는 종착 지점인 한강 변에 유원지와 수영장을 만들었다. 당시 이촌동의 한강백사장과 더불어 가장 인기를 끈 유원지였다. 성수동은 이후 노선을 따라 발전했다.
그러나 한국전쟁(6·25) 이후 복구 과정에서 운명이 바뀐다. 버스가 시민의 발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시내 전차길과 함께 뚝섬을 잇는 기동차길 역시 노면 교통에 걸림돌이 됐다. 결국 68년 시내 전차와 함께 궤도가 뜯겨 나갔다. (『한국 도시 60년의 이야기』)
본지가 기동차길의 흔적을 조금이나마 찾으려 했다. 그러나 발견할 수 없었다. 다만 뚝섬역 5번출구와 경동초등학교 앞 사거리 담벼락에 ‘성수동 기동차길’이란 표지판이 이 자리에 궤도가 있었다는 점을 알리고 있다.
성수대교·2호선 개통으로 재부상
노면 기동차길은 사라졌지만 70~80년대 새로운 길과 교통수단이 탄생했다. 바로 성수대교·용비교, 그리고 전철 2호선 뚝섬역·성수역이 잇따라 개통된 것. 특히 성수역은 을지로순환선(본선)과 성수지선(신설동 방향)의 환승역으로 교통 요충지가 됐다.
시내 곳곳에 산재해 있던 자동차 부품·정비 공장도 인근 장안평(장한평) 자동차 매매 단지와의 접근성 덕에 성수동으로 옮겨왔다. 관련 기계·주물 공장도 들어섰다.
염천교에 이어 명동에 자리하던 소규모 피혁·수제화 공장과 액세서리 제조업체도 성수동에 자리 잡았다. 전용찬 쁘띠공방 대표는 “당시 명동의 지가 상승으로 인해 더 이상 영세업인 수제화·피혁 공장이 버틸 수 없었다”며 “2호선 성수역과 뚝섬역 사이가 교통도 좋은 데다 임대료가 저렴해 하나둘씩 옮기면서 수제화거리가 형성됐다”고 설명했다.
무주공산된 뚝섬 경마장
한국전쟁 직후인 54년 동대문구 신설동(현 용신동 위치)에 있던 경마장(한국마사회)이 뚝섬으로 옮겨왔다. 뚝섬 유원지와 함께 경마장은 성수동을 대표하는 장소가 됐다. 경마장 트랙 내부에는 골프 코스도 운영됐다. 88 서울 올림픽 직후 경마장은 경기도 과천으로 이전했다. 무주공산(無主空山)이 된 것. 원래 체육 부지다 보니 체육 관련 시설에 우선권이 있었다.
큰 관심을 보인 곳이 LG그룹이다. 90년 MBC 청룡을 인수해 LG 트윈스를 창단한 첫해 우승을 차지했다. 94년에도 ‘신바람’ 야구를 펼치며 두 번째 축배를 들었다. OB 베어스(현 두산 베어스)와 잠실 야구장을 나눠 쓰던 LG그룹은 이듬해인 95년 아예 자체적으로 뚝섬에 야구장을 짓기로 했다. 돔 형태의 실내 경기장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2002 월드컵을 위해 축구 전용 경기장을 짓자고 주장하는 축구계의 반발, 그리고 97~98년 터진 외환위기로 계획은 무산됐다.
박근찬 한국야구위원회(KBO) 사무총장은 “뚝섬에 야구 돔 경기장이 지어졌더라면 성수동이 지금보다 더 빨리 발전하고, 유동 인구가 많은 핫플레이스가 됐을 거 같다”고 아쉬워했다. 부지 개발을 두고 논란이 이어지자 녹지로 보존하는 입김이 세졌다. 결국 서울시는 ‘뚝섬 숲 조성 기본계획’을 발표했다. 2004년 공사에 들어갔다. 48만㎡ 부지의 ‘서울숲’은 2005년 문을 열었다.
서울숲은 미국 뉴욕의 센트럴파크, 영국 런던의 하이드파크처럼 대표적인 도심 속 녹지 공간이 됐다. 서울숲에서 경마장의 자취를 찾아봤다. 동편 출입구에 군마상을 볼 수 있고, 서편에 폐쇄된 승마훈련원이 남아 있었다. 서울숲에서 좀 떨어져 있지만 성수2가1동 주민센터 인근 경찰기마대 부지(지난 2월 운영 종료)도 뚝섬이 ‘말들의 고향’이었던 추억을 담고 있다.
마천루로 상전벽해
서울숲과 함께 성수동의 가치를 끌어올린 곳이 있다. 바로 신세계그룹의 이마트다. 성수점(2001년 개점) 옆에 신사옥을 짓고, 2008년 본사를 이전했다. 대기업 본사로는 처음 성수동에 자리 잡은 것. (※이마트는 e커머스 강화를 위한 유동성 확보를 위해 지난해 성수동에서 남대문으로 본사를 이전했다.)
이어 주거 공간으로도 가치가 올라갔다. 초고층 주상복합 건물인 2011년 갤러리아 포레, 2017년 트리마제, 2021년 아크로 서울포레스트가 잇따라 건립됐다. 요즘 ‘성수동 3대장 아파트’로 불리는 곳이다. 학군에서는 상대적으로 강남에 떨어지는 편이란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프라이버시를 중시하는 연예인과 유명인들이 대거 입주했다. 덕분에 최고급 주거 공간으로 인정받게 된다. 강남의 대표적 부촌인 압구정동과 인근 지역의 재건축이 지연돼 성수동을 대안으로 삼는 경우도 있다.
금융사 임원으로 근무 중인 유모(51) 씨는 “성수동은 한강 뷰가 남향이라 북향 위주인 강남보다 선호하는 이들이 많다”며 “시내 출퇴근도 성수동이 훨씬 편하다”고 말했다.
이런 트렌드를 반영한 사례도 있다. 강 건너 강남 신사동의 초대형 교회에서 부목사로 목회한 경력의 K목사가 2년 전 서울숲 앞에 교회를 개척한 것. 이 교회에 다니는 60대 여성 신도는 “목사를 따르는 신도가 많았는데 강남에서 강 건너 이곳까지 예배를 드리려 대거 합류했다”며 “아이들 다 키우고 아예 성수동으로 이사 온 사례도 있다”고 설명했다.
새로운 K-팝·한류 중심지
이마트 본사가 떠났지만 현대자동차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핵심인 물류기업 현대글로비스가 2021년 아크로 서울포레스트의 D타워에 새 둥지를 틀었다. 비슷한 시기 같은 곳에 카셰어링 업체 쏘카(SOCAR)가 입주했다. 중견 자산운영사인 트러스톤자산운용은 금융 중심지 여의도를 떠나 사옥까지 지었다. 스타트업에서 출발해 최대 국내 온라인 패션 전문몰로 성장한 무신사는 본사뿐만 아니라 여러 팝업 스토어를 운영하고 있다.
연예기획사의 움직임도 눈에 띈다. 물꼬를 튼 건 큐브엔터테인먼트다. 포미닛·비스트·(여자)아이들 등을 데뷔시킨 큐브는 강남을 떠나 성수동으로 본사를 이전했다. 이어 대형 연예기획사의 원조라 할 수 있는 SM엔터테인먼트가 2021년 D타워로 본사를 옮겼다. 지난해 인근 뚝섬역에 연습실·작업실인 ’SM 아티스트 & 뮤직 센터‘를 신축, 성수동 SM 타운을 완성했다.
연예기획사의 이전으로 성수동은 강남·홍대에 이은 새로운 K-팝·한류 중심지로 떠올랐다. 지난달 5일 성수역 1번 출구 쪽 큐브엔터테인먼트 사옥 1층의 카페. 외국인 관광객으로 가득 찼다. 줄이 테이블 좌석을 중심으로 두 바퀴 채 똬리를 틀고 출입구까지 이어졌다. 캐리어를 끌고 있는 개인 단위가 많았다.
자신을 앤디라고 밝힌 20대 대만인 관광객은 “대만 출신 슈화가 걸그룹 (여자)아이들의 멤버라 대만에서도 인기가 많다”며 “큐브 본사 1층 카페에서 사진 찍고 SNS에 올리는 게 여행의 주요 일정”이라고 말했다.
서용구 숙명여대 교수(경영학)는 “성수동은 마치 파리 에펠탑처럼 한국에 오는 관광객들이 꼭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는 장소가 됐다”며 “이런 수요에 맞는 관광 상품을 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분석했다.
성수동의 변화는 현재진행형
성수동은 외국인 관광객과 젊은 세대들이 찾는 힙한 핫플로 탈바꿈했다. 다양한 형태의 팝업 스토어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2호선 뚝섬역~성수역 남쪽 연무장길의 큰 도로만 하더라도 10여 개가 넘는 팝업 스토어가 고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골목길 곳곳에도 팝업 스토어용 공간이라고 광고하는 간판을 쉽게 볼 수 있다.
임시라는 꼬리표를 떼고 아예 상설화한 곳도 있다. 대표적인 곳이 명품 매장 ‘디올 성수’. 기아의 전기차(EV) 팝업 ‘언플러그드 그라운드’도 2년 전 문을 열었는데 일단 올 연말까지 운영할 예정이다. 다양한 카페와 문화 공간, 팝업들이 몰렸고 이 지역에서 근무하는 직장인이 늘어나면서 퇴근길 성수역 3번 출입구 인파가 SNS에서 화제를 모았다.
지난달 7일 오후 6시쯤 성수역 3번 출입구 현장을 확인한 결과, SNS와 마찬가지로 전철을 타려는 승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구청과 경찰은 10여 명의 질서 요원을 투입해 만일의 사고를 대비했다.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의 지구당 당협위원장들은 조만간 추가 출입구를 신설하겠다는 플래카드를 경쟁적으로 붙여놨다.
성수동의 인기는 현재 진행형이다. 그렇지만 다른 지역(명동·경리단길 등)의 젠트리피케이션(임대료 상승으로 원주민·자영업자가 쫓겨나는 현상)처럼 성수동에서도 흑역사가 되풀이될 수 있다.
디벨로핑 전문가 박범수 삼호BNR 대표는 “성수동 지역은 팝업스토어의 성업으로 10년 뒤에도 지금 보다 인기를 끌 것으로 본다”며 “다만 홍보 효과를 노린 팝업스토어 외에는 지가 상승세에 큰 요인이 없어 투자 수익만을 생각한다면 중간에 마음고생을 할 수 있다”고 조심스레 내다봤다.
※다음 회는 ‘후암동의 해방 일지’를 다룹니다.
강병철 기자 bong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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