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용지 부족사태, 한국은 무엇을 바꿀 것인가

정병진 2026. 6. 7. 13:53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주장] 재선거 논란을 넘어 선거관리위원회 구조와 책임 체계를 다시 묻는다

[정병진 기자]

지난 6·3 지방선거 과정에서 발생한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시민들의 재선거 요구로 번지고 있다. 일부 시민들은 나흘째 시위를 이어가며 선거관리위원회의 책임을 묻고 있다. 선관위는 당초 서울지역 14개 투표소에서 투표용지가 부족했다고 발표하였다. 그 뒤 재조사해 보니 전국 67개 투표소(서울 35개, 송파구 15개 포함)에서 추가 투표용지를 공급한 사실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향후 국정조사 등이 이뤄질 경우 관련 사례가 더 늘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번 사태가 발생한 원인을 두고 일부에서는 부정선거 가능성을 제기한다. 하지만 이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특정 후보의 당락을 좌우하기 위한 목적이었다면 누구나 쉽게 인지할 수 있는 투표용지 부족이라는 방식을 선택할 가능성은 높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 원인은 선관위 스스로 밝혔듯이 투표율 예측 실패와 투표용지 배분의 부실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 여수 개표소 지난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여수 개표소
ⓒ 정병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2024년 편람에는 지방선거의 경우 사전투표율을 감안해 본투표용지 인쇄량을 전체 유권자의 60% 수준까지 줄일 수 있도록 지침이 돼 있었다. 사전투표율이 꾸준히 상승해 온 현실을 고려하면 모든 유권자 수만큼 투표용지를 인쇄할 필요는 없다는 판단이었다. 실제로 지금까지는 이러한 방식으로도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그런데 2025년 개정된 편람에서는 각 지역 선관위의 판단에 따라 인쇄 비율을 50%까지 낮출 수 있도록 기준이 변경됐다. 지방선거의 낮은 투표율과 사전투표 증가 추세를 고려한 조치였다. 더욱이 선관위는 전체 유권자 수의 1.1배에 해당하는 투표용지 인쇄 예산을 확보하고도 실제 인쇄량은 크게 줄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현재까지 드러난 사실을 보면 실제 문제는 절대적인 인쇄량 부족보다 지역별 배분 실패에 있었다. 다시 말해 투표용지가 실제로 부족했다기보다 필요한 곳에 적시에 공급하지 못한 행정상의 문제였다.

그 결과 많은 유권자들이 투표소에서 장시간 줄을 서야 했고, 일부는 기다리다 돌아갔다는 증언도 잇따랐다. 선관위는 투표용지가 부족해 투표하지 못한 유권자들에게 번호표를 배부해 밤 10시까지 투표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공직선거법은 투표 마감 이전에 투표소에 도착했으나 혼잡 등으로 투표하지 못한 유권자의 권리를 보장하도록 규정한다.

다만 이 규정은 일반적으로 마감 직전 유권자가 집중돼 투표가 지연되는 상황을 상정한 것이지, 선관위의 행정 실수로 투표용지가 부족해진 상황까지 전제로 한 것은 아니라는 지적도 나온다. 특히 법정 투표 마감시간인 오후 6시 이후 무려 밤 10시까지 투표를 허용한 것이 적절한 법 적용이었는지를 두고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선관위의 실수로 발생한 문제를 선관위 스스로 확장 해석한 법 적용으로 해결한 셈이기 때문이다.
▲ 투표함들 개표 대기 중인 여수의 투표함들
ⓒ 정병진
이번 사안이 재선거 사유에 해당하는지는 결국 사법부의 판단 영역이다. 참고할 만한 해외 사례로는 독일 베를린 선거가 있다. 2021년 베를린에서는 투표용지 부족, 장시간 대기, 기표소 부족, 잘못된 투표용지 배부, 법정 시간 이후의 투표 등 복합적인 관리 부실이 발생했다. 이에 베를린 주 헌법재판소는 주의회 선거 전체를 무효로 하고 재선거를 명령했다.

이어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연방하원 선거에 대해서는 전체 2256개 투표구 가운데 455개 투표구에서만 부분 재선거를 실시하도록 결정했다. 재판소가 문제 삼은 것은 부정선거 때문이 아니다. 선거관리상의 중대한 하자로 인해 유권자의 평등한 참정권이 침해됐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유사한 판단이 내려질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은 대법관이고 시·도 및 구·시·군 선관위 위원장 상당수도 현직 법관이 맡고 있기 때문이다. 선거 소송의 최종 판단 기관인 대법원과 선관위가 구조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는 점에서 이해충돌 가능성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선관위의 중대한 과실이 인정되면 결과적으로 사법부의 책임 문제와도 연결될 수 있기에 그런 결정을 내리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 개표 중인 선관위 위원들 위원 검열석에서 개표 중인 여수선거관리위원회 위원들
ⓒ 정병진
이러한 이유로 선관위 구성 방식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현행 선거관리위원회법은 위원장을 위원들 간의 '호선(互選)'으로 선출하도록 규정한다. 호선이란 구성원들이 서로 투표해 대표를 선출하는 방식을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오랜 관행에 따라 법관이 위원장을 맡아 왔으며, 형식적인 호선 절차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비판도 있다.

또한 선관위원장은 대부분 비상근직이어서 선거 행정의 실무를 직접 담당하지 않는다. 실제 투·개표 업무와 조직 운영의 중심에는 사무총장, 사무처장, 사무국장 등 상근 간부들이 있다. 따라서 단순히 위원장의 직함만으로 선거의 공정성과 전문성이 보장된다고 보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번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단순한 행정 착오로 보기에는 그 파장이 너무 크다. 무엇보다 국민이 선거 과정 자체에 의문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 심각하다.

재선거 여부와 별개로, 철저한 진상 규명과 책임 소재의 명확한 정리가 필요하다. 아울러 선거관리위원회의 운영 구조와 책임 체계 전반을 재점검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신뢰를 잃은 선거 제도는 민주주의의 기반을 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겨자씨신문에도 실립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