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정책 시작은? 경제 이끈 한은 70년史 [소소한 금융TMI]
경제·사회 변곡점 때마다 '우여곡절'
98년 이후 금통위 기능·독립성 강화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4년 5개월 만에 내렸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의 그림자에서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할 무렵부터 시작된 길고 긴 통화정책 긴축 터널의 종지부를 찍은 것이죠. 여러분도 이 뉴스를 보셨나요?
그럼 기준금리는 어떻게 결정되는 걸까요? 오늘 소소한 금융TMI에서는 통화정책의 첫 시작, 그리고 그 의미와 함께 우리나라 역사의 변곡점마다 우여곡절을 겪어 온 한은의 과거를 엿보려 합니다.
‘탕, 탕, 탕.’
한은 총재가 의사봉을 세 번 두드리는 소리입니다. 동시에 한은 금융통화위원회가 우리나라 기준금리를 0.25%포인트(p) 내린 3.25%로 결정했다는 소식이 일제히 보도됩니다. 관련 그래프들도 움직이고 각계 분야 관계자들도 분주해집니다. 그만큼 한은의 통화정책이 우리나라 경제 곳곳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죠.
통화정책의 첫 시작은 지금으로부터 74년 전인 1950년 6·25전쟁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광복 이후 경제적 혼란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가득했습니다. 이에 따라 자주적인 통화·금융체계를 확립하기 위해 1950년 6월 12일 대한민국 중앙은행인 한은이 역사적인 첫 발을 내딛게 됩니다.
1909년 11월 24일 영업을 개시한 옛 한은이 한일 강제합병 이후인 1911년 8월 15일 일본에 의해 조선은행으로 명칭이 바뀌며 역사 속으로 사라진 지 40여년 만입니다.
앞서 그해 5월에 한은법이 제정됐으며 6월 5일에는 제1차 금통위가 최초로 구성돼 회의를 했습니다. 당시 금통위는 한은 정관, 업무개시일, 지점설치 및 직제 등을 심의·결정했죠. 금통위는 70년의 세월 동안 한은의 통화신용정책에 관한 주요 사항을 심의·의결하는 정책결정기구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금통위원에는 한은 총재 및 부총재를 포함한 7명의 위원으로 구성됩니다. 한은 총재는 금통위를 대표하는 의장으로서 회의를 주재하는데요. 금통위 정기회의는 통상 매월 둘째주, 넷째주 목요일에 열리며, 의장이 필요하다고 인정하거나 2인 이상의 위원이 요구하는 경우 임시회의가 개최되기도 합니다.
한은의 가장 큰 역할 중 하나는 바로 통화정책입니다. 통화정책은 중앙은행이 돈의 양을 늘리거나 줄임으로써 경제활동의 수준을 조절하는 정책을 의미합니다. 한은은 기준금리 수준을 정한 뒤 여기에 맞춰 통화량을 조절하는데, 그러면 금융시장에서 콜금리, 채권금리, 은행예금및대출금리 등이 변동하면서 경제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기준금리는 한은이 금융기관과 환매조건부증권 매매, 자금조정 예금 및 대출 등의 거래를 할 때 기준이 되는 정책금리입니다. 한은은 물가안정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연간 8회 금통위 본회의를 개최하고 기준금리 수준을 결정합니다.
금통위 본회의에서 기준금리를 결정할 때에는 ▲국내 물가 ▲경기 및 금융·외환시장 상황 ▲세계경제의 흐름 변화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합니다. 본회의 직후에는 한국은행 총재가 기준금리 결정 배경 등에 대해 설명하는 기자간담회가 열리죠. 2주 후에는 금통위 의사록이 일반에게 공개됩니다.
지난 11일 열린 한은이 발표한 기준금리는 이 과정들을 모두 거친 후에 결정된 것입니다.
한은은 통화정책뿐만 아니라 많은 역할을 통해 우리 경제에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다시 1950년대로 가보면 한은은 우리나라의 뼈아픈 역사와 함께 태동합니다. 창립된 지 13일 만에 6·25전쟁이 터졌기 때문이죠. 첫 임무는 전쟁기간 중 화폐사용의 혼란을 막고 인플레이션을 제어하는 것이었죠. 당시 ‘긴급통화조치’가 단행되면서 화폐제도는 큰 변화를 겪었는데요. 1959년에 첫 한국은행권 발행 이후 9년 만에 최초의 주화를 발행하는 등 화폐제도가 정비됐습니다.
특히 휴전 이후에는 경제부흥을 위해 국제통화기금과 국제부흥개발은행 등 국제금융기구에 가입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고 1955년 가입을 추진했다고 하네요.
1960~70년대는 그야말로 격동의 시대였습니다. 1960년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 1961년 5·16 군사정변 등 일련의 정치적 변혁을 거치게 된 것이죠. 당시 한은은 중소기업이나 서민과 같은 취약부문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고 무역·외환 부문의 제도를 개선해 나갔습니다. 또 통화량 급증으로 유동성 관리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독자적인 통화량 목표를 설정해 운용했다고 합니다.
1970년대 중·후반 한국 경제가 다시 고도성장기를 맞이했는데요. 특히 이때는 통화량이 급증하면서 유동성 관리의 중요성이 부각됨에 따라 정책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관련 제도를 정비하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대에는 고비용-저효율 구조와 같은 고도성장에 따른 후유증 등으로 어려움에 처한 우리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총액한도대출제도를 도입했습니다. 이때 한은 금융망을 구축하는 등 정책 시스템도 새로 정비했습니다.
한국 경제는 1986년 이후 원유가 하락, 미달러화 약세, 국제금리 하락 등 이른바 3저 현상에 힘입어 3년 간 매년 10%가 넘는 고성장을 이룩하게 됐고, 경상수지도 큰 폭의 흑자로 전환하는 등 이례적인 호황을 맞이했습니다.
1990년대 들어서 한은의 역할은 조금 더 확대됩니다. 총액한도대출제도 도입, 한은 금융결제망 구축, 외화자산 관리·운용 시스템 확충 등 다양한 정책분야에서 새로운 수단과 시스템을 마련한 것이죠. 특히 1998년 한은법 개정을 계기로 금통위의 기능과 정책 중립성을 강화하고 물가안정목표제를 도입해 금리 중심의 시장친화적인 통화신용정책이 뿌리내리도록 했습니다.이제는 한은이 중앙은행으로서 독립된 주체인건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그 기간은 20여년 밖에 되지 않은 것이죠.
파란만장한 역사와 함께 시작한 한은은 현재도 글로벌 금융위기와 성장세 둔화, 새롭게 부여된 금융안정 책무 등을 대응해 나가고 있습니다.
다만 최근 한은의 기준금리 결정에 앞서 금융권 안팎으로 간섭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논란이 된 바 있습니다. 그만큼 경제가 어렵다는 뜻일 테지요. 그러나 한은의 독립성은 시대와 상황을 막론하고 보장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 옛날 광복 직후 극도로 혼란스러웠던 시대에 건국 이념을 구현하고 나라의 정체성을 되찾고자 세웠던 중앙은행의 역할이 훼손되지 않고 계속 이어지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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