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최악의 폭군이 민주주의 시초가 된 까닭
[이준목 기자]
존 왕은 13세기 중세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으로 '영국 역사상 최악의 폭군'중 한 명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의적 로빈 후드>의 빌런(악역)이나 동화<벌거벗은 임금님>의 모티브가 된 인물로서, 현대인들에게도 친숙한 이름이다.
자국인 영국 <BBC>에서 도 '최악의 영국인'중 하나로도 선정될 만큼 시대를 뛰어넘어 악명을 떨친 존 왕이지만, 한편으로 그에게는 폭군 이미지와는 정반대로 '민주주의의 초석을 다진 인물'이라는 아이러니한 평가도 공존한다. 과연 실제의 존 왕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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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벌거벗은세계사 존왕 |
| ⓒ tvN |
형제들과 나이차가 있는 막내였던 탓에, 존이 태어날 무렵에는 이미 왕의 자손들에게 돌아가야 할 영지가 모두 배분된 상태였다. 유일하게 영지를 물려받지 못한 존은 사람들에게 결지왕(Lackland)' '영지없는 존'으로 불리며 놀림을 받았다고 한다.
불안했던 입지속에 존은 형들 사이에서 열등감과 경쟁심을 느끼면서 성장했다. 성격이 괴팍했던 존은 어릴 때부터 탐욕이 강했고, 만일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 벌컥 화를 내며 바닥에 몸을 내던지거나 손톱을 물어뜯는 등 과격한 행동을 저지르기 일쑤였다고.
이 시기의 잉글랜드의 왕실은 그야말로 막장드라마 뺨치는 복잡한 가족사로 유명하다. 국왕 헨리 2세의 집안은 일반적인 부자, 부부, 형제 관계처럼 가족이나 혈육의 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철저히 자신들의 권력과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하면서 수시로 뒤통수나 패륜조차도 서슴지 않던 정적관계였다.
헨리 2세는 아들 중 막내 존을 총애했고 자신의 왕위까지 물려주려고 했다. 장자 헨리와 삼남 제프리가 일찍 사망하면서 공식적인 왕위계승 서열 1순위는 둘째 리처드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차별 대우에 깊은 불만을 품고 있었다.
리처드는 아버지에 맞서기 위하여 프랑스의 국왕 필리프 2세와 동맹을 맺었다. 필리프 2세는 어머니 엘레노오르의 전 남편이기도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의 아들이었다. 왕위를 위하여 아버지의 최대 정적들과도 손을 잡기를 마다하지 않은 것이다.
1188년 리처드는 결국 아버지 헨리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다. 이미 노쇠했던 헨리2세는 리처드와 프랑스의 연합공격을 막지 못했다. 헨리 2세를 더욱 충격에 빠트린 것은 그토록 총애하던 막내 존마저 전세가 불리해지자 아버지를 배신하고 재빨리 형 리처드의 편으로 돌아섰다는 것이다.
결국 패배한 헨리 2세는 1189년 리처드를 자신의 후계자로 공인하고 불과 이틀 뒤에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해 9월 3일 잉글랜드의 새로운 국왕으로 리처드 1세가 즉위한다. 존은 리처드 1세의 편에 선 덕분에 목숨을 건졌고 귀족 작위와 영지까지 얻으며 보상받았다.
당시 유럽은 '십자군 원정'이 한창 진행중이었다. 리처드 1세 역시 즉위하마자 직접 군대를 이끌고 십자군 원정에 참전했다. 그 사이 잉글랜드의 권력은 어머니 엘레오노르와 존이 맡게 된다.
1192년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오던 리처드 1세가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드 5세와의 불화로 인하여 포로로 잡히는 사건이 벌어진 것. 리처드 1세의 신병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6세에게 인계됐다. 신성로마제국은 리처드 1세의 석방을 조건으로 당시 잉글랜드 왕실 수입의 2-3년치에 해당하는 15만 마르크의 거액을 요구한다.
엘레오노르와 존은 리처드 1세의 보석금을 마련한다는 명분으로 백성과 귀족의 신분을 가리지 않고 거액의 세금을 징수했다. 목표치에 못 미친 이들은 세금을 낼 때까지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또한 존은 이렇게 거둔 세금의 일부를 착복하여 자신의 화려한 사치를 위하여 낭비를 일삼았다. 한편으로는 어머니 엘레오노르 모르게 하인리히 6세에게 거액의 뇌물과 서신을 전하며, 형 리처드 1세를 계속 억류하고 있어줄 것을 은밀히 청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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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벌거벗은세계사 존왕 |
| ⓒ tvN |
1199년 4월, 다시 전장에 나선 리처드 1세는 프랑스 반란 진압을 위하여 출정했다가 전투 도중 부상을 입고 결국 사망하게 된다. 그리고 왕위를 이어받게 된 것은 바로 존이었다. 잉글랜드 왕가의 기구한 막장 가족사 속에서도 살아남아 최후의 생존자가 된 '헨리네 막내아들'은, 1995년 5월 27일 마침내 염원하던 국왕의 자리에 올라 '존 왕'이 된 것이다. 당시 그의 나이 33세였다.
하지만 존 왕은 즉위와 동시에 '준비된 암군'다운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그는 첫번째 부인이었던 이사벨라 글로스터와 이혼하고, 프랑스 명문귀족가문이었던 이사벨라 앙굴렘이라는 소녀에게 반하여 새로운 신부로 맞아들였다. 문제는 이사벨라는 이미 약혼한 정혼자가 있었고, 나이는 10대 초반의 소녀로 존 왕과 무려 20살 이상 차이가 났다는 것,
존 왕의 이러한 막장 행보는 엄청난 후폭풍을 불러온다. 존 왕에게 약혼녀를 빼앗기게 된 루지냥 가문은 국왕 필리프 2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필리프 2세는 이 사건을 명분삼아 전쟁을 일으켰고, 존 왕은 크게 패하여 잉글랜드로 도주했다. 노르망디를 비롯하여 유럽 본토내 잉글랜드의 영역 상당수가 프랑스에게 넘어갔다. 이로서 잉글랜드는 유럽 진출을 위한 중요한 요충지를 잃은 반면, 프랑스는 훗날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로 성장하는 계기가 된다.
존 왕의 기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어머니 엘레오노르마저 사망하면서 제어할 사람이 사라진 존 왕은 온갖 폭주를 거듭한다. 교황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잉글랜드 교회를 자신이 통제하려고 무리수를 두던 존 왕은 교회와도 심각한 갈등을 빚게 된다. 격노한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존 왕을 '파문'시켰다.
당시 중세 사회에서 교회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으며, 파문은 종교를 넘어 사회적으로도 고립을 의미했다. 국왕과 국가조차도 예외는 아니었다. 존 왕을 향한 잉글랜드의 민심은 더욱 흉흉해졌다. 사면초가에 몰린 존 왕은 결국 교황이 보낸 특사에게 굴욕적으로 무릎을 끓고 교황의 봉신이 될 것을 약속하며 백기투항한다.
국왕의 연이은 실정으로 잉글랜드의 국격은 갈수록 추락했고, 프랑스와의 전쟁에서는 거듭된 패전으로 영토를 대거 상실하면서, 존 왕은 '실지왕(失地王)' 이라는 오명까지 얻게 된다. 그럼에도 존 왕은 여전히 전통과 관행을 무시하고 '방패세' 등 각종 무리한 세금을 징수하다가 잉글랜드의 주류 귀족 집단같은 내부세력들도 존 왕에게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됐다.
1215년 6월, 귀족들과 평민들은 무장 봉기를 일으켜 존 왕에게 반기를 들고 런던을 점령한다. 마지못해 협상에 나선 존 왕은 귀족들의 요구를 담은 문서에 강제로 서명해야했다. 이것이 바로 법적절차를 통하여 국왕의 권리가 제한될 수 있음을 명시하여 군주제에 최초로 제동을 건 '마그나 카르타(대헌장)'였다.
마그나 카르타는 국왕이 마음대로 신체의 자유를 빼앗거나 세금을 징수하는 행위를 금지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이로써 왕의 권력도 법의 테두리 안에서 존재함을 명시함으로서 법치주의의 시초가 됐다.
사실 존 왕은 생전에 대헌장을 부정하고 취소하기 위하여 무던히 노력했다. 당시 교황은 대헌장이 사회질서를 무너뜨린다며 무효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대헌장의 정신은 이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훗날 영국의 의회민주주의, 미국의 독립선언문, 프랑스의 인권선언문 등은 모두 대헌장의 내용과 정신을 그대로 계승하며 현대 민주주의의 제도적 기반이 됐다.
존 왕은 말년까지 각종 수난을 겪다가 1216년 10월 18일, 4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비록 존 왕은 당대에나 후대에나 영국 최악의 폭군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무능함과 실패가 오히려 민주주의의 필요성을 일깨우는 시발점이 되었다는 것은 기묘한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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