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서 캄보디아로... 이렇게 쉬운 국경은 난생 처음 [가자, 서쪽으로]
[김찬호 기자]
저는 호치민 시를 떠나 국경을 넘어 캄보디아의 프놈펜으로 들어왔습니다. 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는 과정은 아주 쉬웠습니다. 버스 승무원이 거의 대부분의 출입국 사무를 대행해 주더군요. 심지어 캄보디아는 비자가 필요한 나라인데도, 비자 비용만 지불하고 저는 캄보디아 측 입국심사관을 만날 일조차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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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트남-캄보디아 국경 |
| ⓒ Widerstand |
생애 가장 쉬운 국경 넘기를 경험하면서, 버스 안에서 캄보디아와 베트남 사이의 관계에 대한 생각을 잠시 했습니다. 프놈펜 중심가, 캄보디아 왕궁에서도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캄보디아-베트남 우정 기념탑"이라는 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우정"이라는 것이 누가 정의한 것일지를 생각합니다.
이 기념탑은 1970년대 말에 세워진 것입니다. 많이들 아시다시피 1970년대 캄보디아는 크메르 루주의 집권과 '킬링 필드'라는 대규모 학살극을 경험했습니다. 크메르 루주는 '민주 캄푸치아'라는 정부를 세우고 공산주의를 추구하는 정당이었지만, 같은 공산주의 계열의 베트남과는 갈등을 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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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캄보디아-베트남 우정 기념탑 |
| ⓒ Widerstand |
어떤 의미에서 베트남은 해방자였을 수 있습니다. 크메르 루주의 집권과 킬링 필드라는 학살극은 이런 방식이 아니라면 종결될 수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캄보디아 내전과 킬링 필드를 경험하며 수백만 명이 학살당하고 그 이상의 사람들이 난민이 되었던 상황에서, 다시 한 번의 전쟁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베트남은 이후에도 캄보디아에 계속해서 주둔했고, 일부 지역에서 반군 활동을 벌이던 크메르 루주와도 전쟁을 이어갔습니다. 이런 상황에 반발해 중국이 베트남을 침공하며 중월전쟁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베트남은 중국에 사실상 승리하고 캄보디아 주둔을 계속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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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버스 차창에 붙은 베트남-캄보디아 국경 통행증 |
| ⓒ Widerstand |
베트남은 1988년부터 군대 철수를 시작했고, '민주 캄푸치아 연합정부'와도 평화협정을 시작했습니다. 1991년 양측은 UN 감시 하에 총선을 치르기로 합의했고, 1992년 UN 캄보디아 신탁통치 기구가 만들어져 1993년에 총선에 치러졌습니다. 그제서야 캄보디아의 긴 전쟁의 역사는 끝이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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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놈펜 야경 |
| ⓒ Widerstand |
"60-70년대 베트남의 통일 과정에서 희생된 캄보디아인과, 70-80년대 민주 캄푸치아의 학살로부터 캄보디아인을 해방하는 과정에서 희생된 베트남군과 베트남인을 기억하며."
언급했듯 이 기념탑은 베트남이 캄보디아에 주둔하던 1970년대 말에 건설된 것입니다. 이 탑에 새겨져 있는 것처럼,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현대사는 서로에게 많은 희생과 상처를 남겼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 탑이 프놈펜 중심에 여전히 서 있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 흔적이 아직 완전히 치유되지 않았다는 상징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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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메콩 강변의 캄보디아 국기 |
| ⓒ Widerstand |
언젠가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 복잡한 선악의 구분은 메콩 강의 물길처럼 뒤섞이고 흩어져 사라질 날이 올 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이었는지 굳이 애써 구분하지 않고 잊어버릴 수 있는 세대가 올 수도 있겠죠.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구체적이고 분명한 역사의 평가가 너무 시간이 흐르기 전에 필요한 것은 아닐지 저는 생각합니다. 역사의 흔적이 너무 큰 상처가 되어 지워질 수 없는 흉터가 되기까지, 남은 시간이 그리 길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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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에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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