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시아가 보이 주연, 파리에 가다
누구에게나 기억하고 싶은 어린 시절의 패션 모멘트가 있기 마련이다. 잡지를 오려 만든 엉성한 스크랩북이나 자아가 꽤 단단해진 이후 처음 산 옷처럼 비록 거창한 게 아닐지라도 말이다. 발렌시아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뎀나에게도 이런 순간이 있었다. 판지에 그린 룩을 하나하나 오려 할머니 집 부엌 탁자에서 작은 패션쇼를 열던 소중한 순간이! 35년 뒤 나폴레옹이 잠든 파리의 앵발리드에선 여덟 살짜리 뎀나의 판타지가 다시금 펼쳐졌다. 달라진 거라곤 꽤 거대해진 탁자와 손님의 규모 정도였다. 테크노를 입고 한층 더 샐쭉해진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Gimme More’가 울려 퍼지자 수십 미터에 이르는 탁자 위로 가장 먼저 오른 정찬은 란제리였다. 새하얀 레이스 브래지어와 가터벨트, 스타킹을 향해 속절없이 손님들의 시선이 쏠리자 곧이어 뎀나식 위트가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이들의 뒤통수를 쳤다. 알고 보니 그 모든 란제리 디테일은 살색 보디수트 위를 교묘히 수놓은 자수에 불과했던 것.
니콜 키드먼부터 깜짝 캣워크를 선보인 로미오 베컴까지, 만찬을 즐긴 손님들 틈바구니에서 유독 빛나던 인물도 있었다. 사춘기 중학생처럼 잔뜩 뻗친 머리와 반항적인 애니멀 프린트 티셔츠, 가방에 무심히 꽂은 꽃다발과 함께 쇼장에 나타난 더보이즈 주연이 그 주인공. 어릴 때부터 발렌시아가를 좋아했다며 쇼 전날까지 눈을 빛내면서 꼼꼼히 옷을 고르던 스물여섯 살의 주연 그리고 부엌 탁자 위에서 자신만의 작은 쇼를 열던 여덟 살의 뎀나는 이렇게 서로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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