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도 여우가..." 91세 토박이가 기억하는 은평의 옛 풍경

은평시민신문 박은미 2024. 11. 22.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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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평 토박이 차철수 어르신과의 만남

[은평시민신문 박은미]

 1968년 은평 전경 (사진 출처 : 은평구청, 차철수 제공)
ⓒ 은평시민신문
은평구가 지금의 모습을 갖춘 건 1979년 서대문구에서 은평구로 분리되면서다. 1949년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에 속해있던 녹번리, 응암리, 불광리 등이 서대문구에 편입되고 녹번 삼거리에 서대문구 은평출장소가 설치되었다. 오랜 기간 고양군 신도면 진관내리, 진관외리, 구파발리로 분류되었던 진관동 일대는 1973년에 가서야 서대문구에 편입되면서 서울로 편입될 수 있었다.

경기도와 서울의 경계면에 위치했기 때문일까? 은평이라는 지역의 역사와 기록은 고양에서도 서울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도시 발전이라는 급행열차를 탄 것 마냥 지역의 많은 역사와 기억해야 할 장면이 훅훅 넘어가버렸다.

은평시민신문에서는 아직 당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차철수 어르신(91세)을 만나 과거 은평의 모습을 들어보았다. 어르신은 1933년 대구에서 태어나 5살에 서울 은평구에 자리잡고 86년의 세월을 보냈고 월남 파병 기간을 제외하고는 줄곧 은평을 지켰다. 80년 전의 일도 마치 어제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며 하나하나 옛 이야기를 들려주는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1940년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초 불광리 닭장뒷집 불이농장사택에서 차철수 일가(사진출처 : 은평문화관광역사관, 차철수 사진제공)
ⓒ 은평시민신문
앨범 한 장 한 장을 넘기며 들려주신 옛 은평의 모습은 불과 몇 십년 전의 일이라고는 상상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서울 서북권의 은평은 서울의 경계면의 역할을 수행하며 채소와 과일, 나무와 꽃 등을 짊어지고 산골고개를 넘어 영천시장에 내다팔며 생계를 이어가는 이들이 많았다.

서울혁신파크에서 독바위역에 이르는 넓은 땅에는 일본인이 지주가 운영하는 경성농원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 농원은 불이흥업주식회사에서 운영하는 곳으로 당시 주민들은 이 곳을 불이농장이라고 불렀고 이 곳에서는 돼지와 닭을 비롯한 다양한 과일이 재배됐고 인근 주민들은 하루 날품팔이로 농장에서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차철수 어르신 가족이 1938년 대구에서 서울 은평으로 옮겨오게 된 이유는 바로 불이농장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열 한 살위였던 큰형님이 불이농장의 책임자로 일을 하게 되면서 어르신 가족은 대구생활을 정리하고 불광동 불이농장 사택에서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은평 토박이 차철수 어르신 (사진 : 정민구 기자)
ⓒ 은평시민신문
- 예전 불이농장 모습은 어땠나요?

"불이농장이 굉장히 넓었어요. 지금 녹번역에 은평면사무소가 있었는데 여기 지나서 녹번동, 양천리, 지금 혁신파크 일대 전부하고 독박골 풀장이 있던 위쪽까지 전부 다 농장이었어요. 연신내를 넘어가지는 않았는데 동네에서 농사 안 짓는 사람들은 전부 여기와서 일당 받고 밭매고 생활하고 그랬어요. 그 때는 일정 때라 아주 어려운 시절이었거든요. 갈현동, 구산동, 역촌동, 대조동, 홍제동까지 그 때 직업 없는 사람들은 전부 여기와서 일을 했는데 일당 주면 보리쌀 사고 쌀 사가지고 가서 살았죠.

불이농장에는 양돈장도 있고 양계장도 있었는데 양계장에서는 닭 수십만 마리를 키워서 군납을 했고 사택 주변이 전부 자두밭이었고 길가에는 앵두가 심어져 있었죠. 농장안에 사택이 두 채가 있었는데 한 채는 우리가 살고 또 한 채는 직원이 살았어요. 지금 불광초등학교 정문 앞으로는 주택이 서너 채 있었어요. 지금 구기터널 올라가는 길에는 풀장이 있었는데 더울 때 여기와서 목욕하고 그랬는데 동네 주민들도 많이 왔어요."
 1943년 불이농장에서 일하는 아낙네들 (사진 출처 : 은평구청, 차철수 제공)
ⓒ 은평시민신문
 1943년 불이농장에서 일하는 차철수 어르신 형님과 직원 (사진 출처 : 은평구청, 차철수 제공)
ⓒ 은평시민신문
 1940년 불이농장 전경 (사진출처 : 은평문화관역사관, 사진제공 : 차철수)
ⓒ 은평시민신문
- 옛 모습이 잘 상상되지 않는데요. 과거 은평의 모습은 어땠나요?

"지금 녹번삼거리에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사무소가 있었어요. 그게 나중에 은평출장소가 됐다가 은평구청을 옮겨 지었고 그 자리에는 소방서가 들어온 거에요. 통일로 쪽으로 내려가다보면 왼쪽에 한전이 있는데 그건 나중에 들어왔고 불광쪽으로 내려가다 왼편에는 큰 도살장이 있었어요. 여기서 잡아서 시내로 보낸다고 들었어요.

불광사거리 왼쪽으로 대조시장 내려가는 길가에 굉장히 넓은 터가 있었는데 거기는 전부 말깐이었어요. 군용마를 키우고 옆에는 당근을 키웠는데 군용마 먹이는 양식으로 삼았다고 해요. 근처에는 장구치고 북치고하는 국악 교습소 같은 게 있었고 그 옆에, 지금 대조시장에는 옛날에 오일장이 섰어요. 오일장 옆으로는 우시장이 있어서 소도 팔고 개도 팔고 조랑말 이런 것도 파는 걸 봤어요. 오일장 옆으로 가죽공장도 아주 큰 게 하나 있었어요."
 차철수 어르신이 직접 표시한 예전 은평구 현황
ⓒ 은평시민신문
- 도살장에서 나오는 가죽으로 뭔가를 만들었나 보네요.

"도살장에서 나오는 건 거의 다 가죽공장으로 가서 뭘 만들었죠. 그리고 관턱고개를 넘어가면 서울국제전신전화건설국이 있고 서울중개소도 있어서 말하자면 직장인들이 생활할 수 있는 터전이 있었어요. 그 고개 넘어가면 연신내 사거리에는 큰 양조장이 있었어요. 그 양조장은 은평구 일대 뿐만 아니라 홍은동, 홍제동 일대도 거의 다 거기서 배달받고 했던 거 같아요. 양조장 일꾼들이 많아서 잔칫집에도 보내고 농사짓는데도 보내고 그렇게 잘되는 모습을 봤어요.

그리고 박석고개에서 갈현동 쪽으로 내려오면 거기가 전부 복숭아 밭이 그렇게 많았어요. 관턱고개 넘어 왼쪽으로 지금은 대조동 동사무소인데 그 일대가 전부 분뇨 처리장이었어요. 서울시내 마차꾼들이 전부 마차로 분뇨를 싣고 와서 거기에 버렸는데 그 일대가 파리떼랑 냄새 때문에 굉장히 고통을 겪었어요. 그게 꽤 오래 계속됐는데 해방 이후에 정리가 되면서 없어졌어요."

(관턱고개 : 불광에서 연신내를 넘어가는 고개. 관티고개라고도 부른다.)

"녹번삼거리에서 수색 방향으로 내려가면 왼쪽이 지금 응암동인데 여기 포수말, 매바위 이 쪽은 전부 꽃밭이었어요. 여기 사람들이 꽃을 재배해서 시내에 가져다가 팔고 그렇게 살았는데 일제 강점기 일본 사람들이나 좀 잘 사는 사람들은 전부 꽃을 좋아해서 집안에 전부 꽃을 두고 했어요.

그 때 은평구는 큰 산업시설이라고 할 게 없었는데 불광초등학교 앞하고 녹번초등학교 앞에는 당면 공장이 큰 게 있었어요. 공장이 커서 생산도 많이하고 시내로 출하하고 그랬어요.

신사동 쪽으로 내려가면 지금 숭실고등학교 올라가는 쪽, 신사동 고개 넘어 현대아파트 주변 그 근처가 전부 공동묘지였어요. 고택골이라고. 그리고 수색쪽으로 넘어가면 큰 변전소가 있어서 철도, 교통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그 동네에 많이 살았어요. 증산동은 산업시설이라고 할 게 없어서 불이농장 와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높은 산거리(산골고개)에서 응암시장있는 쪽은 전부 허허벌판이고 전부 논밭이고 집들이 거의 없었어요. 백년사로 넘어가는 데는 야산인데 그 때는 소나무도 작고 자라지 않은 상태였어요.

그리고 산골고개 넘어가다보면 오른쪽에 큰 유리공장이 있었어요. 우리가 학교가다보면 뭐 훅 불어서 병도 만들고 그랬는데 산골고개 넘어서 홍제동 쪽으로 우측에 내려가다보면 거기에도 유리공장이 또 하나 있었어요."
 차철수 어르신이 찍은 1960년대 역촌오거리 풍경 (사진출처 : 은평구청)
ⓒ 은평시민신문
- 사진을 보니 산에 나무가 별로 없네요.

"그 때는 나무가 없었고 돌산이 돼놔서. 낮에도 여우가 캥캥하고 다녔어요. 저녁에 해거름하면 늑대들이 쌍으로 돌아다니는데 사람 혼자 가면 막 뛰어 넘어요. 사람 머리위로 그냥 펄쩍펄쩍 뛰어넘으니까 혼자 다니다가는 물려 죽어요. 여우는 사람을 해치지 않는데 늑대는 물어요."

- 호랑이는 못 보셨어요?

"호랑이는 못 봤어요. 그리고 이 지역에 숲에 다니면 뱀이 무척 많았어요. 우리가 다니면서 모르고 밟아서 꿈틀거리면 놀라서 보면 뱀이고. 한 번은 불광동에서 뱀을 밟았는데 그냥 막 덤비고 쫓아오더라고. 마침 돌이 있길래 돌을 집어서 던졌더니 쭉 뻗더라고."

- 지도를 보니까 녹번동에 화약고가 있는데요. 이건 어떤 건가요?

"지금 은평문화예술회관 바로 앞에 화약고가 있었어요. 그 앞에 산이 있는데 그 산 밑으로 터널을 뚫어가지고 터널 창고를 만들어서 거기다 화약을 둔 거죠. 전쟁 대비해서 둔 건데 그 땐 채석장이 있었는데 다이나마이트 갖다가 넣고 폭발시키고 했죠. 녹번초등학교 자리가 옛날에는 기와도 굽고 벽돌도 굽고 하던 곳이에요. 거기에 홀트씨양자회(현 홀트아동복지회)가 들어와서 오래 있다가 일산으로 갔어요. 불광동 미성아파트 자리에는 아동보호소가 있었는데 아동보호소가 홀트씨양자회 자리로 갔어요. 그 다음에 미성아파트가 들어온 거에요."
 차철수 어르신 (사진 : 정민구 기자)
ⓒ 은평시민신문
- 녹번역 산골고개가 지금하고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나요?

"지금은 얕은 고개가 됐죠. 옛날보다 한 10m를 올리고 메꾸고 고개를 깎고 그 아래로 하수관을 전부 묻고 그렇게 해서 편평하게 만들어서 지금은 고개가 얕은 거에요."

- 그럼 관티고개나 박석고개도 그런가요?

"많이 깎았어요. 옛날에는 경사지고 힘들었죠. 산골고개에 짐 싣고 올라가려면 힘들고 그러면 학생들도 밀어주고 어른들도 밀어주고 그렇게 해서 올라갔어요. 그 때는 사람들이 순수하고 좋아서 고개 넘을 때 힘들게 가면 서로 도와주고 그랬어요. 산골고개에 해장국집이 큰 게 하나 있었는데 얼마나 맛있고 좋았는지 기억이 나네요. 그 때 나무짐지고 넘어가서 시내가서 팔고 오는 사람들, 또 달구지 몰고 가는 사람들, 그렇게 많은 장사꾼들이 다니면서 새벽에 넘어갔다가 해장국 한 그릇씩 먹고 갔어요."

- 어르신도 드셔 보셨어요?

"먹어봤죠. 그 때는 진짜 못 살던 때인데 우리 형님들하고 넘어가다가 저거 한 그릇 먹고 가자고 해서 먹었는데 아주 맛이 좋더라고요."
 1960년 독박골 이재민촌 (사진출처 : 은평구청)
ⓒ 은평시민신문
- 은평구에 국민주택도 만들어지고 새집도 지어졌는데 어느 지역 사람들이 많이 왔어요?

"수재민들이죠. 옛날 한강변에 수재민들이 많았으니까. 그 사람들이 쪽방에 살다 장마지면 떠내려가고 하니까 그런 사람들이 많이 왔죠. 응암시장 부근, 매바위 그 쪽 일대도 수재민들이 많이 와서 살았어요. 방 하나 부엌 하나 있는 일곱 여덟평짜리 집을 불광동 쪽에 지어서 분양을 했어요."

- 은평구에서 장을 볼 만한 시장은 어디가 있었어요?

"장을 볼 곳이 없었죠. 대조시장 5일장은 나중에 생긴 거고 그 전에는 영천시장에 가서 장을 봤어요. 그 때는 뭐 가끔 장을 가는 거고 보통은 감자나 고구마나 있고 반찬거리도 많지 않았어요.

지금 회상하면 벌써 한 80년이 넘어가는데 그때는 어릴 때니까 겨울에 독박골에 올라가면 썰매 만들어서 산꼭대기 올라가서 쫙 내려오면서 썰매 치고 내려오고 팽이치기 하고 동네 와서는 잣치기. 동전치기도 많이 하고 그런 게 지금도 머리에 선하네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은평시민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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